56화
연합군은 전선을 물리자마자 방어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국경을 내어준 것은 갈림길의 길목을 내어준 것과 같은 상황.
적들이 수도로 진격하지 못하게 주요 길목을 차단해야 했다.
먼저 국경과 가까웠던 영지들의 영지민을 모두 동원.
길목이 있는 영지에 해자를 파고 요새를 지었다.
전략적 요충지가 아닌 영지에는 피난을 명령한 뒤 집을 불태우고 우물을 메웠다.
“진척 상황은?”
“현재 9할 정도 완료되었습니다. 그나저나 적들이 잠잠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우리야 시간을 버니 좋지. 모르긴 몰라도 아무드엔 유능한 참모가 없나 보군.”
“적들이 저희보단 손해가 많았을 겁니다. 아마 정비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겠죠.”
아무드군의 진격이 늦는 것은 태훈과 뮤즈 때문이었다.
다리에서 3일을 더 버텼고 계속해서 보급 물자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연합군은 적들이 무리한 공격으로 타격이 심하다고 판단했다.
“그나저나 난감한 상황이군.”
“썩 좋은 상황은 아니죠.”
최전방에 올인했던 연합군에게 있어 요새를 내어준 것은 크나큰 타격이었다.
그 뒤로는 마땅한 방어 거점이 없는 것을 아는 사령관은 적들의 진격에 노심초사했다.
“하온데 병력이 분산되어 걱정입니다.”
“어쩔 수 없지. 병력을 더 요청하는 수밖에.”
주요 길목은 3군데.
현재 남아 있는 병력 8만을 세등분해야만 했다.
만약 아무드군의 병력이 한 곳만 노리고 몰려온다면 힘든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공주님들을 찾지 못한 건 안타깝군요.”
아넬리아와 도리아를 찾기 위해 파견한 병력은 실종되었다.
부사령관을 필두로 한 2차 구조대마저 소득이 없었다.
지금 적의 손아귀에 들어간 국경 지대로 구조대를 파견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어쩔 수 없지. 지금은 더 신경 쓸 곳이 많아.”
사령관은 제노비아와 카나리스에 추가 병력을 요청했다.
두 왕국 모두 최전방 요새의 함락 소식을 전해 듣고는 대책을 강구했다.
결국 병력의 확충에 초점을 두고 징병을 하기로 했다.
카나리스는 상아탑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총국과 제국의 개입을 우려한 상아탑은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외부의 도움 없이 두 국가에서는 10만의 병력을 모아 전방으로 보냈다.
제국에서는 전쟁 특수로 막대한 이득을 보며 길어지는 전쟁에 만족해하는 듯했다.
아무드는 모든 전력과 물자를 빼앗은 연합군의 요새에 집결.
마찬가지로 추가 병력을 마련했다.
그러곤 연합군의 세 거점 중 수도와 가까운 거점으로 모든 전력을 집중시켰다.
연합군도 추가 병력을 그쪽으로 파견했고 보충된 아무드군의 12만 병력과 맞붙게 되었다.
2주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하루에도 수차례 크고 작은 전투가 지속되었고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후우…….”
“왜 그러세요?”
태훈이 편지를 보여주었다.
알에게서 온 편지였다.
편지엔 상회에서 판매하는 약의 양의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물량을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좋은 소식이네요. 그런데 왜 한숨을?”
“그 약들은 지금 이 전선으로 오고 있는 거야. 그만큼 사상자가 엄청나다는 거지.”
그의 말대로 양측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편지를 받은 다음 날부터는 마장기가 등장했다.
공성 병기이기도 했지만 대보병 전용 병기로도 쓰이는 마장기의 위력은 엄청났다.
다행히 마장기들끼리 맞붙으면서 일반 병력들은 물러났다.
양측은 각각 두 대씩의 마장기를 내놓았다.
카나리스의 문양을 가진 마장기에서 마나석의 기운이 느껴졌다.
‘고품질의 마나석 기운이다. 저 정도면 최상급 정도는 되겠는데.’
마나석의 최대 생산지답게 카나리스의 마장기는 격이 달랐다.
동력원에서 차이가 크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무드 측의 마장기가 밀리기 시작했다.
태훈은 연합군 진영에서 함성이 높아지는 것을 들었다.
‘어쩌면 이길 수 있을지도.’
마장기 싸움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면 전쟁의 승패는 갈린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때 아무드군의 진영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며 무언가가 마장기들 곁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간혹 기병의 빠른 기동성을 살려 쇠사슬을 이용해 마장기를 묶어두는 전술이 존재했다.
하지만 먼지구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마장기였다.
“엇!”
태훈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아무드의 마장기는 자신이 왕자로 있던 시절 4대라고 보고받았다.
거기에 제노비아와의 협정 당시 알 수 없는 루트로 아무드가 마장기를 늘리려 했다는 정보도 들었다.
추가적인 마장기의 등장은 놀랍지 않았다.
다만 그가 놀란 것은 마장기의 형태였다.
마장기가 절대 낼 수 없는 속력으로 이동하면서 내는 먼지구름.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되자 드러낸 마장기의 하단부의 형태가 색달랐다.
‘무한궤도!’
마치 마장기의 상체를 잘라다가 탱크와 결합시킨 모습이었다.
당황한 태훈은 숨을 참고 아무드의 마장기를 주시했다.
마장기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장기의 상체 부분은 상당히 말라 보였다.
‘경량화를 한 건가? 어떻게 무한궤도 생각을 한 거지?’
의문점이 많았지만 전쟁은 과학이 발전하는 장소였다.
탱크를 닮은 마장기는 총 4대.
본 적 없는 형태의 마장기를 인식한 연합군의 마장기 기수들은 패닉을 일으켰다.
기형 마장기는 빠른 속도로 연합군의 마장기를 에워쌌다.
뒷걸음질 치던 아무드의 일반 형태 마장기도 다시 전진했다.
탱크 형태의 마장기 2대가 시선을 어지럽히는 사이 나머지 두 대가 긴 창으로 다리를 걸었다.
제노비아의 마장기가 중심을 잃으며 뒤로 고꾸라졌다.
마장기는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아챈 카나리스의 마장기가 아군 진형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4대의 변형 마장기들이 이번에는 쇠사슬을 들고 뒤쫓았다.
‘큰일이다. 두 대 모두 당하면 이 전쟁은 승산이 없어.’
카나리스는 두 대의 마장기가 있었고 제노비아는 3대의 마장기가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두 기를 잃는다면 전력에 크나큰 손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마장기가 온전하게 넘어간다면 아무드군의 전력을 증강시켜 주는 꼴이 되었다.
“뮤즈, 가자!”
“오오오!”
뮤즈는 신나 하며 태훈의 뒤를 따랐다.
마장기들의 위치까지는 2킬로미터가 넘는 거리.
몇 번의 뜀박질로 단숨에 거리를 절반으로 줄였다.
“어떻게 하면 돼요?”
“일반 마장기를 맡아줘.”
“형체도 없이 부숴도 되나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단, 기수는 죽이지 마.”
“아싸!”
뮤즈는 신나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항상 적을 신경 쓰며 팔다리를 분지르는 정도에서 그쳤는데.
이번에는 마음껏 부숴도 된다는 말을 들었으니 당연했다.
뮤즈는 태훈보다도 더 앞으로 뛰어나갔다.
상대 마장기 쪽에서도 뮤즈가 달려드는 걸 확인하고는 그녀를 향해 거대한 검을 휘둘렀다.
집채보다 큰 검이 뮤즈의 머리 위로 떨어졌지만 뮤즈는 자신의 낫을 들어 그것을 받아냈다.
쿠웅-!
마장기의 기수는 인간이 마장기의 공격을 막아내자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꺄하하하핫! 좋구나, 좋아!”
뮤즈는 삽시간에 마장기의 한쪽 발목을 베었다.
스걱-
마치 무 자르듯 두꺼운 장갑의 잘려 나가며 기울어졌다.
그 사이 뮤즈가 아래서 위로 훑으며 마장기를 타고 올라갔다.
그녀의 낫이 휘둘러진 횟수만큼 마장기가 양분되었고 뮤즈가 땅에 착지했다.
쿠웅- 쿵-
팔다리를 잃은 마장기가 무력하게 지상으로 추락했다.
“히히힛!”
뮤즈가 광적인 웃음소리를 내며 기뻐하는 것을 본 태훈은 변형 마장기 쪽으로 향했다.
변형 마장기들도 처음엔 당황했지만 태훈을 보고는 빠르게 다가왔다.
거리가 좁혀지자 마장기들이 창을 뻗어왔다.
그는 사뿐히 창 위로 올라타고는 창과 팔을 타고 머리 부분을 향했다.
마장기의 다른 팔이 그를 잡으려 했지만 팔은 그의 검에 잘려 나갔다.
터엉-
육중한 머리가 땅으로 떨어지며 마장기의 내부가 보였다.
기수가 놀라는 것이 보였다.
기수의 위치를 확인한 태훈은 마장기의 왼쪽 가슴 부분에 검을 찔러 넣었다.
검기에 휩싸인 검신은 장갑을 뚫고 들어가 안에 있던 마나석에 꽂혔다.
퍼엉-
작은 폭발과 함께 검이 꽂힌 반대 방향으로 불꽃이 튀었다.
키기기기기-
동력을 잃은 마장기의 궤도가 서서히 멈추어갔다.
그때 뒤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느낌에 태훈은 뛰어올랐다.
퍼엉-
마나는 마장기에 부딪히며 폭발했다.
몸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안에 있던 기수는 폭사하고 말았다.
태훈이 마나의 흔적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그곳에는 가면의 사나이가 있었다.
‘역시 이 전쟁에 관여하고 있었나.’
가면의 사나이는 태훈에게 손가락을 까딱이더니 전장을 이탈했다.
“뮤즈, 넌 여길 맡아. 전부 처리하면 나를 따라와.”
“혼자선 위험해요. 같이…….”
“여기도 버려둘 순 없어. 연합군 마장기가 후퇴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
그 말을 끝으로 태훈은 몸을 날려 가면의 사나이를 뒤쫓았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숲속.
가면의 사나이는 이동을 멈추고 태훈과 마주했다.
둘 사이의 거리는 100미터 정도.
태훈은 검을 겨누며 말했다.
“이 전쟁에 관여하고 있나?”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런 당신은 카나리스와의 인연 때문에 관여 중인가요?”
“그것과는 관계없어. 그보다 너희들은 왜 이 전쟁을 원하는 거지?”
“이 전쟁은 그분의 계획 중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훼방을 놓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제거해야겠군요.”
“너희들은 제국의 뒤에서 움직이고 있는 건가?”
이 싸움에서 가장 이득을 보고 있는 것은 제국이었다.
“흠, 궁금한 게 많으시군요.”
“너희들을 알아내려고 노력했지만 방법이 없었거든. 순순히 대답하지 않는다면 붙잡아놓고 말하게 하는 수밖에 없어.”
“대단한 자신감인데요? 그대의 실력을 한번 보도록 하죠.”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태훈이 먼저 검기를 만들어내었다.
동시에 그의 다리에는 신력의 주문이 걸리면서 희미한 빛을 내었다.
탓-
총알만큼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태훈은 검을 휘둘렀다.
텅-
검은 가면의 사나이에게 닿기 전 보이지 않는 물체에 막히며 튕겨졌다.
‘보호막인가?’
태훈의 검은 쉴 새 없이 파공음을 일으키며 허공을 갈랐다.
가면의 사나이는 뒷걸음질을 치며 검을 피했고 피하지 못한 검은 보호막에 부딪혔다.
3분 동안 휘둘러진 검격은 무려 200회가 넘었다.
그의 검기는 6클래스 이하의 방어 주문도 뚫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보호막은 깨지지 않았다.
‘일반적인 보호막이 아니야. 이것도 신기의 힘인가?’
그는 이번엔 마법을 연거푸 퍼부었다.
5클래스 이상의 마법이 쉴 새 없이 뿌려졌고 사방을 초토화시켰다.
수많은 크레이터들이 생기며 초목들이 사라졌다.
쩌적-
방어막에 금이 가는 것을 본 태훈은 검기와 마법을 동시에 써가며 가면을 몰아붙였다.
쩌저적-
금이 커지자 가면의 사나이는 거리를 급격히 벌렸다.
“놓칠 것 같으냐!”
태훈은 빠져나가려는 가면의 사나이를 향해 힘을 실어 발차기를 날렸다.
검기와 같은 색의 오라가 발에 실리며 방어막을 강타했다.
퍼엉-
방어막이 산산이 부서지며 투명한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순간 태훈의 검이 가면에게 날아들었다.
가면은 다시 한번 뒤로 멀찍이 달아났다.
태훈이 다시 쫓아가려했으나 일순간 마나가 고갈되며 무리가 왔다.
“헉, 헉…….”
제자리에서 숨을 몰아쉬자 다시 마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확실히 달라졌어. 마나량도 그렇고 회복 속도도 빨라.’
기운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태훈은 다시 한번 검을 고쳐 쥐었다.
“대단하군요. 저번에 보았을 때는 이 정도일 줄 몰랐는데요.”
가면은 자신의 잘려 나간 옷깃을 매만졌다.
‘겨우 옷깃인가?’
태훈은 맥이 풀렸다.
강해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데 상대의 옷깃을 베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 허탈했다.
‘하지만 저놈도 정상은 아니야. 보호막만 해도 상당했어.’
태훈은 가면이 방어에만 전념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가 맹공을 퍼붓는 동안 가면은 반격하지 못했다.
반격은커녕 그를 피해 다니느라 바빠 보였다.
“아직 감탄하긴 일러. 난 아직 더할 수 있거든.”
“…….”
태훈이 자세를 고쳐 잡자 가면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가 다시 움직이려는 찰나 가면이 손바닥을 보였다.
“더 해봤자 결판은 내기 힘들 겁니다. 이쯤에서 그만하죠.”
“무슨 헛소리야. 내 볼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문명인으로서 대화를 해보자는 겁니다.”
“네 좋을 대로만 흘러갈 거라고 하면 그건 자만이다.”
태훈은 가면의 사나이의 말을 잘랐다.
어떻게든 싸움의 결판을 내서 이 전쟁의 내막을 알아야 했다.
그가 멈출 것 같지 않자 가면의 사나이는 무언가를 태훈에게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