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전쟁이 터진 지 약 두 달이 되어갈 무렵.
양쪽 진영은 보급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태훈과 뮤즈가 양쪽 진영의 보급을 태우거나 파괴하자 그 여파가 누적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다 슬슬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날이 더워지기 시작했다.
보급과 날씨의 괴롭힘.
그리고 진전이 없는 전황에 아무드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총공세를 하도록 한다.”
아무드군 사령관은 작심한 듯 의논이 아닌 공표를 해버렸다.
귀족들도 딱히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들도 영양가 없는 이 소모전을 끝내고 싶었다.
“용병들의 전력을 얼마나 되지?”
“3천 정도 됩니다.”
“투석기는 어떻게 됐나.”
“준비하신 물량은 모두 준비됐습니다.”
보급에 차질이 생기면서 공성 장비의 조달이 늦어졌다.
현지에서 조달하려 했는데 허허벌판 평야에서 투석기를 만들 재료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10대의 투석기가 준비된 것이다.
“요새의 벽을 허물면 용병들이 선두로 진입한다.”
“작전 시간은 밤입니까?”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그 기구라는 것 때문에 낮에는 우리가 그대로 노출돼.”
아무드군의 최대 난제는 기구였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니 쉽사리 움직이기 힘들었다.
“말을 탄 용병들이 진입하면 그대로 요새를 돌파하여 진군한다.”
“네?”
참모들과 귀족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요새를 점령하면 그곳을 거점화 하여 진군하는 것이 기본적인 전쟁법.
하지만 사령관은 그대로 요새를 돌파하여 남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너무 무리가 아닐까요? 적의 잔존 병력을 뒤에 남겨두게 될 겁니다.”
“잔존 병력은 본대가 정리한다. 가장 최우선하는 것은 돌파력이야. 선두는 오로지 돌파에만 전념하고 본대는 뒤따르며 우왕좌왕하는 적들을 정리한다.”
기동성을 내세운 돌파력으로 적의 방어선을 뚫겠다는 생각이었다.
다행히 지금 마주하고 있는 요새 말고는 연합군에게는 큰 요새가 없었다.
“지금 적의 병력도 10만에 다다릅니다. 무리하게 돌파하다가는…….”
“놈들에게 대응할 시간을 줘선 안 돼.”
“피해가…… 상당할 겁니다.”
“왜 거금을 주면서까지 용병들을 쓰겠나.”
사람들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이 교착 상태를 해결해야 했다.
그날 밤.
아무드군은 용병들을 앞세우고 조용히 진지를 나섰다.
그에 반해 연합군 진영은 긴장이 풀어져 있었다.
기구의 활약으로 아무드군이 이렇다 할 공세를 펼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간간히 있던 국지전마저도 연합군이 우세했고 얼마 전엔 지원군도 도착해 있던 터였다.
연합군의 진영에서 아무드군을 눈치챈 것은 투석기에 화염구가 실리면서부터였다.
“적습! 적습이다!”
경계병의 신호와 함께 화염구가 요새 안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불덩이가 날아들자 처음에는 마법사들이 대항하려 했다.
하지만 마법이 아닌 투석기에 의한 공격임을 알자 연합군은 당황했다.
화염구가 곳곳에 화재를 일으키자 그다음에는 벽을 향해 돌덩이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쿵-쿵-
집채만 한 돌덩이들이 요새의 벽을 때리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이 날아드는 돌덩이를 마법으로 맞추려 했지만 지금은 밤이었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라 마법사들이 날리는 공격마법들은 하늘을 수놓기만 할 뿐이었다.
“그랜드 라이트!”
한 마법사가 다급한 마음에 금기 주문을 사용했다.
넓은 지역을 비추긴 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주위로 비춰지는 발광마법이었다.
슈슈슉-
선두에 서 있던 경험이 많은 용병들은 적의 마법사가 노출되자마자 활의 시위를 당겼다.
“커억!”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된 마법사는 요새의 벽에서 떨어지며 절명했다.
요새 안의 병력들도 준비된 투석기를 이용해 화염구가 날아든 방향으로 돌덩이를 날렸다.
하지만 그들의 투석기는 요새 안이라는 한정적인 범위.
반면에 아무드군은 투석기를 옮겨가며 공격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요새 안에는 날아든 돌덩이들이 쌓여갔고 벽은 허물어져 갔다.
텅-!
콰직-
마침내 벽의 한곳이 허물어지자 사령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격!”
“우와아아아!”
아무드군은 맹렬한 기세로 요새로 돌진했다.
요새 근처로 오자 요새의 불빛으로 인해 아무드군의 병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요새 안으로 들어서는 기세는 연합군이 보기에 무너진 뚝으로 흘러나오는 물줄기와 같았다.
“중갑 보병 앞으로!”
돌진하는 용병들의 앞을 가로막아선 것은 거대한 사각방패와 철갑을 두른 보병이었다.
몇 줄로 늘어선 그들이 방패를 내세우자 마치 새로운 벽이 나타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하지만 용병들은 주눅이 들지 않고 익숙하게 말을 몰았다.
“흩어져!”
리더로 보이는 자의 말과 함께 무리가 둘로 갈라졌다.
눈앞의 인간 장벽을 돌아서 가려는 듯 양옆으로 말을 달렸다.
연합군 병력 중 3만의 병력이 요새 안에 있었다.
금세 다른 병력들이 용병들의 앞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퍽!
“으윽!”
연합군의 창과 검에 용병들이 우후죽순 말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연합군은 실소를 터뜨렸다.
“뭐야, 자살하러 들어온 건가?”
“잔뼈가 굵다는 용병 놈들이 뭐 하는 짓이지?”
연합군의 수뇌부도 불에 날아드는 나방 같은 용병들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용병들의 비명들이 아닌 아군의 비명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쿵- 쿵-
계속해서 요새 안으로 날아드는 돌덩이들과 화염구.
거기다 무너져 내린 벽으로 아무드의 정규군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적의 투석기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쿵- 쿵-
화르륵
“으아악!”
이제는 연합군만의 비명 소리가 아닌 아무드군의 비명 소리와 용병들의 비명 소리도 섞여 있었다.
“미친놈들! 아군이 있는데도 투석기를 쏜단 말인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드군의 마법사들이 다가와 마법까지 날리자 요새 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마치 병에 폭죽을 넣고 터뜨린 것처럼 요새 안은 화려한 빛들로 가득해졌다.
적과 아군이 뒤엉킨 상황.
거기에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 마법과 돌덩이들.
아비규환이 되어가자 연합군 수뇌부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거기다 어느새 둘로 나뉘어졌던 용병들은 두 개의 요새 출입문에 다가서고 있었다.
“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전략이라니.”
“얼마가 죽든 상관없는 건가?”
자살과 다름없는 전략에 연합군 귀족들과 장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치 다음 전투는 없다는 식의 무모함의 극치였다.
용병들을 자신의 몸에 구멍이 나든 말든 성문을 여는 데 필사적이었다.
본래 용병들은 국가 간의 전쟁에 참여할 시 많은 보수를 받는다.
그만큼 자신들의 생존률이 낮은데 대한 보수를 강하게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뻔히 보이는 피해를 감수하는 작전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무드에서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살아남을 시 기사 작위 수여.
기사는 귀족 중에서도 최하급 계층이긴 했지만 국가에서 기본적인 수당이 나왔다.
거기에 선금으로 대금화 3닢을 주면서 살아 돌아온다면 다시 대금화 3닢을 약속했다.
사망 시에는 가족에게 2년간 매달 소금화 5닢씩, 그리고 대금화 3닢을 보내준다고 약속했다.
전례 없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 만큼 아무드는 상황을 바꿀 만한 계기가 필요했다.
‘어차피 용병을 하면서 장수하긴 힘들다.’
철칙에 맞게 가족들에게 유산이라도 남겨주고 싶은 나이든 용병들은 목숨을 걸었다.
철컹-
촤르륵-
두 개의 도개교 중 하나의 도르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쿠웅-
도개교가 내려가자 멀리서 아무드군이 물밀듯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어서 피해야 합니다! 곧 적들이 들이닥칠 겁니다!”
“이런, 젠장!”
사령관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너무나 꽉 쥔 나머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흘러내렸다.
그사이 연합군의 귀족들은 앞다투어 말을 타고 다른 쪽 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울 보는 사령관은 치가 떨렸지만 자신도 말에 올라야 했다.
“마장기 기수를 불러라! 마장기를 우선시하며 후퇴해야 한다!”
마장기 한 대는 오천 명의 병사, 열 명의 마법사와 맞먹는 병기.
하지만 공성 병기로 분류될 만큼 세밀한 움직임은 불가능했다.
그런 마장기가 아군과 적군이 뒤 섞인 좁은 요새 안에서 움직이게 했다가는 대참사가 벌어지게 된다.
마장기는 거대한 수레에 뉘어져 있었고 천으로 덮여 있었다.
마장기 기수가 합류했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연합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아무드 군의 본대가 요새 안으로 들이닥쳤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 여기서 놈들을 끝장내야 한다!”
“귀족들을 보호해라! 기사들은 활로를 열어라!”
빠져나가려는 자와 붙잡아두려는 자들의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요새 안에는 연합군의 병력이 더 많았기에 또 다른 문은 탈출구가 될 수 있었다.
“으음! 이렇게 허무하게 요새를 내어주다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렇게 자살 공격을 해올 줄은…….”
분개해 하는 연합군 사령관의 모습에 장교들과 귀족들이 눈치를 보며 위로했다.
요새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사령관은 병참기지로 가서 전열을 재정비할 생각이었다.
“후방에 연락병은 보냈나?”
“워낙 순식간이라…… 아마 보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서둘러라. 전열을 재정비해서 날이 밝기 전에 다시 요새를 되찾는다!”
사령관은 시간을 주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리한 공격으로 피폐해졌을 때가 아니라면 요새를 되찾기 힘들 거라 판단한 것.
그때 후방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뒤에서 적군이 쫓아옵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와 병장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요새에서 연합군의 빠져나가는 것을 본 아무드군의 기병이 그대로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단순히 추격조가 아닌 본대가 그대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안 사령관은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를 따라오는 병력은 얼마나 되나?”
“대략 절반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병력 절반이 죽거나 아직 요새 안에 남아 있었다.
말이 없는 보병이나 느린 중장갑 보병들은 요새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
요새를 벗어날 수 있었던 보병은 탈출문 근처에 있었거나 경장갑 보병이었다.
“남아 있는 보병은?”
“1만 정도입니다.”
“그들을 시켜 적들을 저지해라. 기병은 먼저 후방으로 돌아가 소식을 알리고 전열을 정비해야 한다!”
후방에는 5만이 넘는 병력이 있었고 방금 전의 요새만큼은 아니지만 요새도 있었다.
명령에 따른 보병들은 뛰기를 그만두었다.
자신들은 죽을 것을 직감했지만 명령에 따라야만 했다.
연합군의 보병과 아무드의 기병 싸움은 처절했다.
경장갑 상태인 보병들은 말에 치이거나 발굽에 짓밟혔다.
하지만 그들은 처절하게 본대에게 시간을 벌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매달렸다.
팔이 잘려 나가면 몸뚱어리로 뛰어들었다.
발굽에 치여 내장이 터져 나가도 적 기수의 발목을 잡아채려고 노력했다.
싸움은 30분도 되지 않아서 보병의 전멸로 끝이 났다.
“계속 전진한다!”
“더 쫓는 건 무리 아닐까요? 병사들이 상당히 지쳤습니다.”
“사령관님 말 못 들었어? 날이 밝기 전에 움직일 수 있는 만큼 움직여야 한다! 이건 시간과의 싸움이야!”
“알겠습니다!”
아무드군의 기병은 다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내 폭이 20미터 정도 되는 작은 강이 나타났다.
강에는 나무로 된 작은 다리가 있었고 병력은 다리를 건너기 위해 다가갔다.
“음? 앞에 뭔가가 있습니다.”
“적병인가?”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습니다만 연합군 병사의 복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군이 아니면 상관없다. 짓밟아 버려! 지체할 시간은 없다.”
기병들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다리를 막고 있던 그림자와 말들의 간격이 10여 미터 정도 되었을 때 그림자는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곤 들고 있던 기다란 창 같은 걸로 바닥을 내려쳤다.
퍼엉-!
폭풍의 여파로 사방으로 풍압이 터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