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성문 초입이 어수선하며 행렬이 잠깐 멈추었다.
오일 경이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같았지만 이내 행렬은 성문을 빠져나갔다.
성이 난 듯한 오일 경은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떠먹여줘야 하는 것들이구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제노비아와 카나리스의 계집들이 밤새 도망갔다는군. 그게 말이 되나?”
“수도를 빠져나갔다는 겁니까?”
“그것까진 모르겠네. 지금 이 잡듯 뒤지고 있다고는 하는데.”
“공주 정도라면 훌륭한 볼모였을 텐데요.”
태훈은 이번에도 모르는 척 이야기했다.
“쉽게 풀 수 있는 전쟁을 어렵게 만들다니. 뭐 그래도 명분 만드는 일은 안 해도 되긴 하지.”
오일 경의 말대로 시해 사건 직후 유력한 용의 국가의 고위직이 사라진 것은 좋은 빌미였다.
‘결국 전쟁은 막지 못했나.’
나름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자부했던 그였기에 실망감은 컸다.
거기에 다시 나타난 가면의 인물들에게도 신경을 써야 했다.
‘놈은 내가 카나리스의 왕자였다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어. 그렇다면 지금 신분도 알고 있는 건가?’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그랬다면 진작 자신을 찾아왔을 게 분명했다.
우선 가면과 연결이 되어 있는 아무드의 인물을 찾아야 했다.
“그나저나 소득은 좀 있는가?”
“네, 경쟁 상단도 없고 독자적인 물품이라 좋은 가격에 낙찰받았습니다. 오일 경께서 좋은 제품이라고 소문내 주신 덕분이죠.”
“뭘 그런 걸 가지고. 하하하.”
직원이 건네주었던 서류 뭉치를 펼치자 납품에 대한 것들이 적혀 있었다.
태훈은 잠시 다른 걱정은 접어두기로 했다.
상단의 일 역시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치료약은 외상에 좋은 연고의 개념이었다.
기존의 사냥꾼이나 용병들이 사용하는 연고는 있었다.
다만 태훈이 살펴봤을 때 기존의 연고는 지혈의 용도가 컸다.
거기에서 보강된 연고로, 상처 회복과 파상풍에도 효과가 좋은 연고로 만든 물건이었다.
이번에는 단가를 높였다.
서민이 아닌 군대에서 쓰일 물건이었기에 납품가를 많이 챙긴 것이다.
‘첫 납품으로 남는 건 대금화 2천 닢인가.’
총 5차례 납품을 약조받았으니 순이익이 1만 닢이나 되었다.
“그나저나 몸은 이제 정말 괜찮은 건가?”
“네, 그럼요.”
“그런데 무슨 땀을 그렇게 흘리나. 정말 괜찮은 건가?”
태훈은 자신의 옷을 쳐다보았다.
상의 곳곳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접선 지점에 도리아와 아넬리아를 데려다 준 뒤 속옷까지는 미처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는 괜찮다고 느끼지만 몸이 허한가 봅니다.”
“몸은 챙겨가며 일하게. 자네 특기가 약이니 잘 알 거 아닌가.”
“돌아가면 정말 그래야겠습니다.”
제국 수도로 돌아온 태훈은 달라진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사이 아무드가 제노비아를 향해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이에 연합을 맺고 있는 카나리스 역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아무드는 제국에 원조를 요청한 상태라 수도는 시끌시끌했다.
상회로 돌아오자 알이 달려 나와 태훈의 짐을 들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일은 잘 안풀린 모양이네요.”
“할 수 있는 만큼은 했어. 그보다 장군님한테서는 연락 없어?”
“네, 없었습니다.”
“젠장. 전력이 하나라도 더 필요할 때인데.”
가면이 나타난 만큼 홀든의 전력이 뮤즈 다음이었다.
정황을 묻는 알의 물음에 태훈은 아무드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그렇다면 아넬리아 님과 도리아 공주님은 무사한건가요?”
“아마도. 아무드의 국경만 잘 건너면 좋겠는데.”
“숲에선 수인을 따라갈 자가 없으니 잘해줄 겁니다. 그나저나 가면이 관여되어 있다면 저희 쪽이 더 움직이기 힘들겠네요.”
태훈은 아무드가 일으키는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경우를 대비해 놓고 있었다.
아무드 쪽의 물자 공급에 차질을 빚게 만들 예정이었다.
그를 위해 알이 노예들에게 병장기를 다루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가면이 관여할 경우 보급을 늦춰 빨리 휴전을 가져온다는 계획은 차질이 있을 수 있었다.
“알, 앞으로 레드크로스 상단의 임시 지배인으로 모든 대외 활동을 담당해.”
“갑자기요?”
“난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하러 갔다고 해둘 거야. 오일 경은 아마 믿을 거고.”
알이 상회를 맡는 동안 태훈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는 자신의 한계를 늘릴 필요가 있었다.
뮤즈를 무기화했을 때 능력이 증폭되는 것은 좋지만 이번처럼 같이하지 못할 경우가 있을 수 있었다.
뮤즈 없이도 가면들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으려면 역량을 늘려야 했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그동안 옆에서 잘 봤잖아. 너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
“이런 거 말고 능력으로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알은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검을 만졌다.
“일 처리도 능력이야. 너 아니면 내가 맘 놓고 돌아다니겠어?”
“알겠습니다. 그럼 노예부대는 어떻게 할까요?”
“훈련시킬 만한 사람 주위에 없어?”
“홀든이 있었다면 시키겠는데 마땅한 사람이…….”
곰곰이 생각하던 알은 한 사람을 떠올려 추천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과연 노예들을 상대로 훈련을 시켜줄 지가 의문이었다.
“전쟁 때문에 호송 부대를 늘린다고 하면 될 것 같은데요. 실제로 노예병도 있으니까요.”
“음, 네가 아무리 가까워졌다지만 그렇게까지 해줄까?”
알이 제안한 인물은 유리아.
그도 알과 유리아가 상당히 가까워진 사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제국의 공무원 격인 그녀가 일개 상단의 훈련까지 맡아줄 리는 만무했다.
“솔직히 말해봐. 어디까지 갔어?”
“유리아와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입니다.”
“스승과 제자? 아무리 검술로 친해지라 했지만 그건 좀 너무 간 거 아냐?”
“그녀는 아직 기사의 꿈에 미련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포섭하라고 지시한 건 왕자님이잖아요.”
“아니 뭐. 스스럼없는 사이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좀 의외라서.”
곰곰이 생각하던 태훈은 그녀가 남을 가르칠 만한 실력은 되냐고 물었다.
이에 유리아가 과거 기사 시험을 준비하던 자라 일반 기사 정도는 된다고 피력했다.
“내가 편지 하나 써줄 테니까 오일 경에게 갖다줘. 유리아를 빌릴 수 있을 거야.”
태훈은 편지 한 통을 오일 경 앞으로 썼다.
몸이 좋지 않아 잠시 휴양을 다녀올 거란 말.
그리고 호송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노예병을 훈련시키는 데 필요한 사람으로 유리아를 지원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상당한 양의 뇌물을 준비했다.
“유리아는 여기서 일했던 이력도 있으니까 오일 경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왕자님은 이대로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전쟁 개시일이 언제야?”
“보름 후입니다.”
아무드가 선전포고한 날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일주일만 자리를 맡아줘. 그 시간 안에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
말을 마친 태훈은 간단히 짐을 챙긴 뒤 상회를 나섰다.
* * *
제노비아의 북쪽 국경지대에는 비상이 걸렸다.
카나리스와의 연합 병력이 최전선에 배치되는 것은 물론 제노비아의 주력부대는 모두 북쪽 국경으로 소집되었다.
그렇게 모인 병력의 수는 연합군 병력을 포함에 7만에 이르렀다.
거기에 카나리스에서 원군으로 3만의 병력을 보내준다 하여 전군의 사기는 드높았다.
“아무드의 가용 병력은 얼마로 보는가?”
“10만 정도로 보여집니다. 용병 징집까지 한다면 최대 15만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흠, 나쁘지 않은 조건이군.”
제노비아의 북부군 사령관은 만족한 듯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똑같은 장비와 조건을 갖추었을 때 수성은 공격 쪽보다 우위에 있었다.
반대로 공격 쪽은 성을 공략하려면 최소 3배의 인원이 있어야 했다.
“방어만 한다면 능히 막을 수 있습니다. 거기다 저희는 안전하게 정찰도 할 수 있으니 언제든 움직일 수 있습니다.”
부관 역시 자신 있게 조언했다.
다만 복병은 마장기와 마법사에 있었다.
사전에 연합군이 만들어질 당시 아무드가 마장기를 늘리고 있다는 보고는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우리 쪽 마장기는 준비됐나?”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마법사는?”
“왕궁에서 모레면 도착합니다. 카나리스에서도 마법사 열 명을 보내준다고 했습니다.”
“카나리스도 사력을 다하는군. 하긴 우리가 무너지면 바로 다음 차례니.”
눈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
만반의 준비를 갖춘 제노비아와는 달리 아무드에서는 전략을 세우느라 바쁘게 돌아갔다.
속전속결로 적의 진영을 제압해야 하는데 기구라는 정찰도구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선봉은 누가 하겠소?”
아무드의 총사령관의 말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전쟁을 일으키긴 했지만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는 상황.
그들이 기구의 존재를 안 것은 불과 며칠 전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스피어를 든 남자는 나이가 지긋해 보였고 보기에도 무인스러웠다.
“엠버튼 백작, 좋은 방법이라도 있소?”
“야음을 틈타 공격하면 됩니다. 다행히 구름이 많고 바람이 잔잔하여 밤에도 달이 가려지고 있습니다.”
“야음을 틈타는 것은 우리에게도 많은 변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적이 매복이라도 한다면 피해는 막심할 겁니다.”
“저 허허벌판에 매복이 있어봐야 뭐가 있겠소. 어린애들 장난 같은 함정 정도겠지.”
엠버튼 백작은 완강하게 야습을 주장했다.
논쟁을 보던 총사령관은 백작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좋소, 첫 전투는 백작에게 맡기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반드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가져다 드리죠.”
엠버튼 백작은 기병의 절반을 이끌게 되었다.
백작은 기병들을 바라보다 명령을 내렸다.
“최대한 몸을 가볍게 만든다. 그리고 달빛에 노출될 만한 금속류는 벗어라.”
백작의 명령에 기수들은 정비를 시작했다.
기수들은 중요 급소만 금속의 붙은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벗어버리고 가죽갑옷으로 갈아입은 것.
그리고 말의 갑주도 모두 벗겨내었다.
“백작님. 자칫하다간 기병에 큰 피해가…….”
“우리의 목적은 저들의 요새가 아니야. 우리는 후목을 친다.”
“후목? 적들의 병참을 치겠다는 겁니까?”
“기병으로 어찌 요새를 공략한단 말이냐. 적의 요새를 돌아 병참기지를 공격한다.”
제노비아군의 최전방 요새 뒤쪽에는 병참기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너무 멉니다. 적들이 요새 밖으로 나오면 자칫 고립될 수도 있는데요.”
“그러니 기동성을 살리는 중 아니냐.”
백작은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자정이 되자 칠흑같은 어둠이 깔렸다.
“지금이 기회다. 전원 승마!”
백작은 자신이 부여받은 기병 2만 중 단 5천만을 출진시켰다.
말발굽 소리가 크다는 이유에서 그마저도 다섯 무리로 나누었다.
자정에 출발한 기병들은 거의 걷는 것과 같은 속도로 이동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요새 근처에 다다랐다.
“크크큭, 녀석들. 아무런 낌새도 못 느꼈나 보군.”
후방 병참기지까지의 거리는 말을 달리면 20분 거리.
백작은 작전이 성공했다고 보고 우렁차게 외쳤다.
“전군 돌격!”
백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5천의 기병은 요란한 발굽 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병참기지 근처에 다다른 순간 병참기지에서 불화살이 쏘아져 올랐다.
“적들이 눈치챘습니다.”
“신경 쓰지 마라! 우리의 목표는 적들의 물자다! 모조리 불태워 버려!”
선두가 병참기지에 다다랐을 때 쏘아져 올랐던 불화살이 땅에 떨어졌다.
동시에 불길이 퍼지며 삽시간에 병참기지 주위를 둘러쌌다.
제노비아군은 병참기지 주위에 호를 판 뒤 기름을 먹인 마른 풀을 깔아놓았던 것이다.
그것을 본 백작은 크게 웃었다.
“크크큭, 멍청한 것들! 스스로 불에 타 죽겠다는 건가!”
나무와 천으로 만든 병참기지 쪽으로 바람이 한번 불면 몽땅 불타 버릴 게 분명했다.
“배…… 백작님! 저길 보십시오!”
“음?”
부관이 소리친 쪽은 허공이었다.
삽시간에 떠오르는 거대한 기구들.
기구 안에는 중요 물자들이 실려 있었다.
“기구가 저렇게 많다고? 고작 정찰용으로 몇 개 있던 게 아니었나?”
하늘로 도망간다는 생각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백작은 잠시 넋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뒤쪽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쪽은 제노비아군의 요새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