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아넬리아와 도리아.
그 두 이름을 확인한 태훈은 잠시 장신이 혼미해졌다.
확실히 아넬리아도 혼기를 넘긴 나이.
도리아도 정혼자였던 자신이 사라졌으니 자연히 파혼이 되었을 터였다.
문제는 두 가지.
자신의 추리가 맞다면 전쟁의 촉진제로 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는 이곳에서 그 둘을 마주할 경우 정체가 탄로 난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얼굴을 감추는 수밖에.’
다행히 자신을 대신하여 공개석상에서 얼굴을 비출 관리자급 인물은 있었다.
명단을 본 이후로 태훈은 병을 핑계로 방을 나서지 않았다.
다행히 상단들의 숙소는 왕궁에서 떨어진 곳.
경비는 삼엄하지 않았다.
낮에는 뮤즈로 하여금 주요 인물들의 대화를 엿듣게 했다.
그러곤 몰래 방을 빠져나와 수도의 지리를 익혔다.
그러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정작 사건이 벌어진다면 대상이 혼자 있을 때나 혼잡한 순간.
그렇다면 무도회가 있을 당일 벌어질 확률도 있었다.
고민하던 태훈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오일 경을 찾아갔다.
“가면무도회?”
“네, 일반적인 무도회는 식상하죠. 가면을 쓰고 서로가 신분을 모르는 상태에서 진행하는 겁니다. 재밌을 것 같지 않습니까?”
“굳이? 어차피 무도회는 일을 벌이기 위한 형식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무도회는 3일 동안 열립니다. 첫날과 둘째날은 가면을 쓰고 무도회를 진행하는 거죠. 신분을 떠나 즐겁게 노는 겁니다. 마지막 여흥을 주자는 거죠.”
“흠, 딱히 끌리지는 않는데.”
굳이 귀찮은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오일 경의 모습.
태훈은 준비해 갔던 물건을 전해주었다.
선물을 받아든 오일 경의 입이 헤벌쭉해지는 것을 본 태훈은 다시 그를 타일렀다.
“일을 벌여도 가면을 벗기 전 3일째에 하는 겁니다. 혹시나 일을 진행하다가 실수를 해도…….”
“음, 어차피 모두 가면을 썼으니 일이 틀어져도 증거만 그럴듯하면 우길 순 있지.”
잠시 고민하던 오일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자넨 몸이 아프다더니 괜찮은 건가?”
“네, 며칠 푹 쉬었더니 괜찮아졌습니다.”
“타지에 나와서 몸 아프면 고생이야. 자네 말대로 일을 진행해 보도록 하지.”
태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일이 벌어지는 날을 무도회 3일째로 확정지을 수 있었다.
거기에 자신도 가면을 쓰고 드나들 수 있느니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런데 피해자와 가해자는 정해졌습니까?”
“음, 그렇네. 하지만 이건 기밀이라…….”
“저희 사이에 기밀이 뭐가 중요합니까. 일이 벌어질 때 불똥이 튀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가 알아서 하긴 하겠지만 알아둬서 나쁠 건 없지.”
오일 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명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 * *
태훈의 의견대로 가면무도회 형식으로 행사가 진행됐다.
아무드 측에서도 그 정도의 여흥을 준비하면 자신들이 주모자라고 생각하지 못할 거라며 좋아했다.
무도회 1일차.
태훈은 먼발치에서 아넬리아와 도리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넬리아는 다른 여자들에 비해 말라 보였기에 바로 찾을 수 있었고.
도리아는 자주 봤었기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녀들이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가르데스 왕자를 찾아야 한다.’
아무드에선 희생자로 제 8왕자를 내세웠다.
친어미인 왕비는 서열 싸움에서 밀려나 귀양을 갔기에 버리는 말로 쓰는 모양이었다.
은신한 뮤즈의 안내대로 태훈은 곧 한 인물을 찾을 수 있었다.
새하얀 정복에 가면을 쓴 인물.
올해 8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은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태훈은 잠시 소년을 지켜보았다.
주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소년은 달랐다.
우울함을 나타내는 보랏빛 오로라가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과거가 떠올랐다.
그 역시 자신이 서자라는 것과 눈엣가시라는 점을 확인했을 땐 위축되었었다.
금방 정신승리를 하며 극복했지만 주변의 분위기가 한때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는 소년에게 걸어갔다.
“실례합니다.”
말을 걸자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가르데스 왕자님이시죠?”
“아, 네.”
본래 가면무도회에선 서로의 신분이나 이름을 묻거나 말하지 않는 것이 관례.
하지만 그런 문화가 한 번도 없었던 이곳 문화 특성상 왕자는 덜컥 대답했다.
“말씀 놓으십시오. 전 귀족이 아닙니다.”
“아, 그런가. 어디 사람인가?”
“공국에서 왔습니다. 의원이면서 동시에 장사치이기도 합니다.”
“형님들은 저쪽에 계시네.”
거래를 위해 왕족과 접촉하려 했다고 생각한 가르데스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가리켰다.
“아닙니다. 오늘 용건은 왕자님을 뵈러 왔습니다.”
“나를?”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왕자의 놀란 얼굴을 짐작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즐거운 무도회 날인데 왜 그러십니까? 더욱이 이번에는 가르데스 왕자님의 반려를 찾기 위한 무도회잖습니까.”
“하하, 그렇긴 하지만 가면을 쓰고 있잖아.”
“본래 가면무도회란 것은 신분을 따지지 않고 즐기기 위함입니다. 마음 내키는 영애에게 말을 걸어보시죠.”
“괜찮아. 난 흥미가 없어.”
풀이 죽은 목소리에 왕자가 많이 위축되어 있음을 안 그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거 받으시죠. 왕자님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이게 뭐야?”
“저희 상회가 만든 약입니다. 우울한 기분을 달래줍니다.”
마약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우울증에 좋은 성분이 들어 있는 약초들을 말린 환이었다.
거기에 설탕과 물엿을 첨가해 만든 사탕 같은 개념이었다.
‘우울할 땐 단 것만큼 좋은 게 없지.’
“냄새가 나는데 먹는 건가?”
“그렇습니다.”
“나중에 먹겠네.”
타인이 주는 것을 함부로 먹지 않는다는 규칙.
태훈은 직접 왕자의 손 안에 든 환 하나를 집어 자신의 입에 넣었다.
“맛있다고요?”
“하하, 그런가.”
왕자는 마지못해 하나를 입에 넣었다.
잠시 후 왕자는 놀란 듯했다.
“달구나. 좀 씁쓸하기는 하지만.”
“달콤하다가도 씁쓸한. 씁쓸하다가도 달콤한 것이 인생 같지 않습니까?”
태훈의 말에 한 알을 더 입에 넣으려던 왕자의 손이 멈추었다.
“그렇지. 하지만 내 인생에 달콤했던 적은 없어.”
“근심이 가득해 보이시는군요. 말동무라도 하지 않으시렵니까? 저도 이런 무도회는 갑갑하거든요.”
“내게 잘해줘봤자. 그대가 얻는 것은 없어. 난 그저…….”
“허울뿐인 왕족이라는 건가요?”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모욕죄로 처벌받을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왕자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자존감이 완전히 사라졌어. 하긴 8살의 정신연령으로는 저만한 게 오히려 다행인 건가.’
태훈은 왕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수를 썼다.
쓴소리도 하고 싶었지만 되레 반감을 살까 달래고 어르기를 반복했다.
“너는 왜 그렇게 내 관심을 받으려는 거야?”
왕자가 반응하자 태훈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왕자님의 지금 모습이 제 어릴 적 모습이랑 겹쳐 보여서요.”
“너도 서자 출신이야?”
“그렇습니다.”
“그렇군. 하지만 그대의 어머니는 항상 옆에서 계셔주셨겠지.”
“아닙니다. 저를 낳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아, 그런가. 미안하게 됐어. 너도 참 기구하구나.”
왕자는 미안해하면서도 한층 마음의 문을 연 것 같아 보였다.
공감대가 형성이 되자 왕자는 말문이 트였다.
그러는 동안 무도회는 파장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내일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럼요.”
“그대의 이름을 알려줘.”
“가면무도회에선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게 룰입니다. 내일도 먼저 찾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태훈은 아넬리아나 도리아와 마주치지 않게 조심히 귀가했다.
둘째날도 마찬가지로 주로 왕자와 이야기를 하며 보냈다.
셋째날이 되자 태훈은 준비해 간 환을 건네주며 말했다.
“오늘은 안에 뭘 넣었습니다. 겉은 녹여 드시고 안에건 삼키세요.”
“오늘은 더 맛있군.”
왕자는 흡족해했다.
“오늘이 마지막이군요.”
“그렇군. 너는 돌아가는 건가?”
“아무래도 그렇죠. 저는 공국과 제국에서 지내니까요.”
“아무드로 올 생각이 없나? 내가 힘은 없지만 너 하나쯤은 지켜줄 수 있어.”
처음과 달리 활기가 있는 모습에 태훈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왕자님은 잘해낼 겁니다. 오늘 반려도 정해지지 않습니까.”
“그렇지.”
“기대되지 않으십니까?”
“응, 하지만 그만큼 걱정도 돼.”
태훈은 오일 경으로부터 가해자가 될 사람과 피해자가 될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
피해자가 될 사람은 왕자였고 가해자가 될 사람은 도리아였다.
아넬리아는 얼마 전까지 병약하여 세상과 단절되었던 인물.
반면 도리아는 왕성한 활동을 한 인물이었다.
카나리스와 제노비아의 연합군 창설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듯 보였다.
‘살해 방법은 아무래도 독극물이겠지.’
흉기를 이용한 살해 방법은 아무래도 아무드 입장에서 곤란한 이유가 있었다.
무도회장의 경비 문제부터 해서 수호기사들의 책임을 추궁하는 무리들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독극물이었고 현장에서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야 했으니 치명적인 독극물일 확률이 높았다.
파장 분위기에 이르자 모두가 가면을 벗는 시간이 되었다.
태훈은 커튼 뒤에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왕자가 단상으로 올라가고 뒤이어 도리아가 올라갔다.
둘은 나이차가 많이 났지만 정략결혼에 나이는 무의미했다.
‘기분이 좀 이상하군.’
전 약혼자가 다른 사람과 약혼하는 상황.
두 사람에게 잔이 주어지고 아무드 국왕을 대신하여 제1왕자의 축사가 이어졌다.
축사가 끝난 뒤 두 사람과 함께 모든 사람이 잔을 치켜들었다.
‘잔에 독이 들었겠군. 제발 약이 효과를 보이길.’
다행히 잔을 들이킨 왕자의 상황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 순간 태훈은 단상 위에 있는 인물들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이게 아닌데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사람들.
오늘 왕자에게 건넨 환의 안에는 태훈이 특별히 만든 해독제들이 들어 있었다.
즉사를 유발할 수 있는 치명적인 독은 세 가지.
태훈은 그 해독제를 만들어 특별히 만든 마법캡슐 안에 넣었다.
해당 독극물이 들어오면 캡슐이 사라지며 해독제가 나오는 방식.
그것을 위해 지난 이틀간 밤잠을 설쳐가며 심혈을 기울였다.
‘후, 이걸로 전쟁은 막은 건가.’
당황해하는 관계자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던 태훈은 왕궁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한 인물이 그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무도회장에는 갖은 가면들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가면을 벗었음에도 한 인물은 가면을 벗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인물은 태훈처럼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자신을 향해 있음을 태훈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가면은…….’
포인트를 회수하던 자들과 동일한 가면.
그가 움직이자 태훈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뒤를 쫒기 시작했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뒤를 쫓던 그는 잠시 뒤 발길을 멈추었다.
가면의 사내가 한 방으로 들어가자 태훈은 조심스럽게 뮤즈를 불러내 무기화시켰다.
몸 안의 힘이 넘치는 것을 느끼며 문의 손잡이를 돌리려는 순간 문 안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태훈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안에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유유히 서 있는 가면의 남자.
“내 이름은 오즈왈드. 반갑습니다. 카나리스의 왕자여.”
가면의 사내는 반듯한 몸가짐을 하고 허리까지 굽혀가며 인사를 했다.
방 안을 난장판으로 만든 인물치고는 차분하고 깔끔한 차림이었다.
“내 정체를 아는 네놈은 누구냐. 어째서 이런 짓을…….”
“왕자가 괜한 짓을 하지 않았으면 이 남자는 살 수 있었겠죠.”
“네놈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포인트를 모으려는 거지? 누굴 위해 일하는 거냐?”
“궁금한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짧게 말하죠. 질문은 서로 번갈아가면서 합니다. 어떻습니까?”
태훈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