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공국과 제국에서 의료원이 개원했다.
진료를 진행할 사람들.
즉, 의사들은 태훈이 직접 뽑았다.
약초에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들을 고용했는데 대부분 약초꾼이나 오랜 용병생활로 노하우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다.
하지만 1실버라는 저렴한 진료비에 사람들이 하나둘 찾기 시작했다.
태훈은 지침서를 만들어 의료원에 배포했다.
페니실린이라 이름붙인 항생제가 만병 통치약은 아니었다.
항생제가 효과를 볼 수 있는 증상들에게만 약을 판매했다.
조금 지나자 의료원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줄이 서 있는 것은 기본이라 아침 9시 개원을 8시로 당겼다.
사람들이 붐비는 이유는 저렴한 약값이 컸다.
신전에서 파는 최하급 포션이 소금화 1닢부터 시작되는 반면.
레드크로스 상단에서 판매되는 약은 2실버부터 가격이 형성됐다.
그러다 보니 공국에 주제해 있는 제약 공장은 24시간 풀가동에 들어갔다.
거기다 제국 은화의 위폐 생산도 차질 없이 진행되다 보니 겨울에 들어갈 즘 재화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총국에서 태클이 걸려오기 시작했다.
“고소장?”
“네, 조금 전 경비대장이 전해주고 갔습니다.”
뇌물을 먹였던 경비대장 중 한 명이 기별을 넣어왔다.
총국이 제국에 고소장을 제출했고.
거기다 자체적으로 이단 심문을 진행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이단 심문.’
이미 한 차례 고비를 겪었던 기억이 있던 태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시작인가.”
“다행히 오일 경이 고소장을 각하했습니다.”
“먹인 게 얼만데 그 정돈 해줘야지.”
“그런데 이단 심문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죠?”
알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내용이 뭔데?”
알은 손에 든 두루마리를 펼쳐 읽었다.
“신의 힘을 허락받지 않은 자가 사용하여 민심을 어지럽히고 있다. 하물며 그 힘이 신의 힘인지조차 의문이 든다. 이에 레드크로스 상단의 책임자는 총국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기 바란다.”
“해명도 아니고 책임? 지난번보다 한술 더 뜨는군.”
“그땐 왕자였고 지금은 귀족이니까요. 오일 경한테 이야기해 볼까요?”
태훈은 대답 대신 펜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장문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 이제 그걸 하려는 겁니까?”
알은 눈치챈 듯 중얼거렸다.
태훈은 일찌감치 제국 외곽 숲 한구석에 작은 공방을 마련해 두었다.
그 공방에는 찍어낸 은화를 비롯 제법 많은 양의 금화와 약간의 보석들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총국의 직인을 위조한 편지지들과 명령서들도 함께 놓여 있었다.
총국의 직인은 고위 신관의 신력이 있어야만 날인이 가능했다.
뮤즈와 결합한 태훈은 능히 고위 신관의 능력을 낼 수 있었기에 날인 위조쯤은 간단했다.
알에게 두루마리를 건내주며 말했다.
“유리아한테 전달해.”
“네? 오일 경이 아니라 유리아 양이요?”
“이제 그만 보내게. 이 정도면 그녀도 출세할걸?”
태훈이 쓴 것은 밀고장이었다.
밀고장의 내용은 총국이 제국에게 보고하지 않고 탈세를 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총국은 공국의 자금 이동 제한이 길어짐에 따라 제국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다.
탈세 및 비자금 용도로 보이는 총국의 자금이 있다는 밀고장은 한동안 총국이 관심을 돌리기엔 충분했다.
“너 그동안 유리아가 옆에 있다고 불편해했잖아. 이거면 다시 본부로 돌아가겠지.”
“아, 그렇긴 하죠.”
알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태훈은 피식 웃었다.
기사 지망생이었던 그녀에게 일주일에 두 번 검술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
유리아가 상단에 눌러앉아 있던 시간은 세 달.
항시 붙어 있다 시피한 둘은 톰과 제리 같은 사이가 되어 있었다.
“뭐야, 그 사이에 정들었어?”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네 취향도 아니라며. 이걸로 끝내.”
“네, 알겠습니다.”
알이 나가려 하자 태훈이 그를 불러 세웠다.
“아, 그리고 장군님 좀 오시라 해.”
알이 나가고 잠시 뒤 홀든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장군님, 그 노인네는 아직입니까?”
“네, 적이긴 하지만 입이 무거운 것만은 칭찬해야겠군요.”
태훈이 경고한 이후로 홀든은 자신이 아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흑마법사를 고문했다.
하지만 흑마법사는 비명만 지를 뿐 아무것도 불지 않았다.
“그 노인네도 대단하네. 몇 개월째야?”
“어떻게 할까요? 더는 시간 낭비일 것 같습니다만.”
그간 적들이 신기나 노인을 찾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접촉해 올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태훈이 신분을 완전히 감추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 인지 일절 접촉이 없었다.
“음, 조금 눈에 띄어볼까?”
“어떤 방법으로 말입니까?”
“흑마법사를 미끼로 적을 끌어내 보려고 합니다.”
“음, 저는 반대입니다.”
홀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저들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또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 것이 없습니다.”
“저희도 무방비는 아닙니다. 이미 신기를 흡수할 뮤즈가 가장 큰 전력이고 저도 있고 장군님도 있잖습니까.”
“그래도 지금 상황에 눈에 띄는 것은 불안합니다.”
“저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대로라면 잠재되어 있는 적들을 계속 경계해야 하는데요?”
홀든은 완광하게 거부했다.
태훈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총국에게 탈세 누명을 씌운다 한들 시간벌기용이었다.
거기에 아무드의 전쟁을 비롯해서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는 적들을 계속 신경 쓸 수는 없었다.
“전면전이나 선전포고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적들을 끌어내서 정체를 파악하자는 거죠.”
“왕자님의 뜻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준비는 제대로 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맡겨주시겠습니까?”
태훈은 기꺼이 그러라고 지시했다.
전략이라면 그 누구에게도지지 않을 인물이 있다면 그였다.
홀든은 그길로 노인을 찾아갔다.
망신창이가 된 노인의 결박을 풀자 노인이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결박이 풀리고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되어 있는 지하실에서 나왔지만 노인은 자신의 특기를 쓸 생각도 못 했다.
그만큼 노인은 지쳐 있었고 피폐해져 있었다.
홀든은 짐짝에 노인을 쑤셔 넣고는 마차를 이용해 수도를 벗어났다.
한 시간여를 달려 마차를 세운 홀든은 짐짝에서 노인을 끄집어내었다.
“여긴 어딘가?”
“…….”
노인의 질문에 홀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 말없이 짐을 짊어진 다음 노인을 앞세우고 숲으로 향해 걸어들어갔다.
“날 미끼로 쓰려는 건가?”
“왕자님은 그러자고 했지.”
“후훗, 후회할걸. 무슨 함정을 만들고 기다려도 너 혼자선 당해낼 수 없어.”
“여기가 좋겠군.”
숲이 빼곡한 어느 한 곳에서 홀든이 멈추었다.
그러곤 천에 쌓인 커다란 물건을 풀었다.
스르륵-
천이 풀리자 크고 기다란 활이 나타났다.
사람이 들 수 있는 물건인가 의심이 들 정도의 크기였다.
태훈이 특별히 주문제작한 것으로 재료값으로만 대금화 20닢이 들어간 물건이었다.
“흐읍!”
-끼기기긱
홀든이 시위를 당기자 장력이 느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으로는 화살을 꺼내 들었다.
역시나 일반 활과는 비교도 안 되는 화살이었고 대부분이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무식하군. 드래곤이라도 잡을 참인가?”
노인의 비아냥거림에도 홀든은 묵묵히 활 시위를 당겼다 놓았다 했다.
그리고 석양이 지기 시작했을 때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를 미끼로 우리 편을 끌어낼 셈인가?”
“그래주면 좋지.”
해가 지고나자 홀든은 모닥불을 피웠다.
주변은 온통 벌레 우는 소리만 들렸다.
“나와 거래를 하자.”
“거래? 말했다시피 난 말할 게 없어.”
노인은 홀든의 제안을 거절했다.
“너는 네가 모으러 다닌게 뭔 줄 아나?”
“모아? 뭘 모은다는 거냐?”
“네가 사람들에게 사인을 하라고 내민 증서. 그건 그 사람이 전생의 업적을 모아놓은 점수다. 포인트라고 하지.”
“포인트?”
처음 듣는 이야기에 노인은 관심을 보였다.
“관심 있나?”
홀든은 태훈에게서 들은 포인트에 대한 정보 중 일부만을 이야기했다.
“사람은 여태껏 살아오면서 여러번의 생을 겪게 되지. 그때마다 선한 점수를 얻게 되고 그 점수는 다음 생애에서 쓸 수가 있다더군.”
“흥, 그걸 믿으란 소리냐?”
“너를 고용한 놈은 그런 걸 알려주지 않았겠지. 너는 네가 들이미는 증서에 뭐가 적힌지도 모르지 않나? 하긴 그런 좋은 정보를 회수하는 자에게 말을 해주긴 그렇겠지.”
홀든은 슬슬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가 계속 될수록 노인은 구미가 당기기 시작했다.
포인트.
죽어서 사용할 수 있는 점수로 그 어떤 화폐보다도 값진 것.
설명을 들은 노인은 고민에 빠졌다.
실제로 자신의 상관에게 증서에 적힌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어봤지만 대답을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나는 돈보다 더 귀한 것을 갖다 바치고 있던 것이 아닌가.’
“그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가 뭐냐?”
“네 배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줘. 그렇다면 그 포인트를 네가 갖는 방법을 이야기해 주지.”
“…….”
노인의 동공이 흔들렸다.
“잘 생각해 봐. 돌아가서 지금처럼 포인트를 회수한 다음 그걸 네가 챙긴다면? 하다못해 일부만 조금씩 챙겨도 나쁘지 않을 텐데.”
“……원하는 정보가 뭐야?”
홀든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이야기가 끝난 후 홀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좋은 정보 고마워.”
“나도 아는 걸 다 말했어. 그러니 너도 말해라.”
“날인이 적힌 두루마리를 보름달이 뜨는 밤에 불태우면 된다.”
물론 태훈에게서 그런 정보를 들은 적은 없었다.
“그렇군. 이제 알겠으니 이걸 풀어.”
“풀어줘? 내가 왜?”
“왜는 무슨 왜야. 아는 걸 다 이야기해 주면 풀어준다고 했잖아.”
“나는 포인트를 차지하는 방법을 알려준댔지 풀어준다고는 하지 않았는데.”
“뭐…… 뭐야?”
노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일 일찍 돌아갈 테니 너도 잠이나 자둬라.”
“이런, 빌어먹을 놈!”
새벽이 되자 불도 기력을 다해가기 시작했다.
노인은 홀든의 머리가 아래로 치우친 것을 확인했다.
‘조…… 조는 건가?’
몇 번 끄덕거리던 홀든의 머리가 축 처지자 노인은 뒤로 묶인 자신의 손에 마나를 주입했다.
‘멍청한 놈! 마나를 다루는 자를 두고 한눈을 팔다니!’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 노인은 금세 손목의 밧줄을 끊었다.
그러곤 홀든이 깨지 않게 조용히 걷다가 이내 뛰기 시작했다.
“크크크, 여긴 숲속이다. 눈치채 봤자 그땐 늦는다고! 크크크.”
어둠이 내린 숲.
거기다 빽빽이 나무가 들어차 있었기에 활은 무용지물이었다.
노인도 그동안 자신을 억류했던 자들에 대해 고민했다.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당 인물을 찾아가 사인만 받아오던 것이 임무.
하지만 홀든이라는 자는 자신을 회유하기 위해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다.
포인트라는 보이지 않는 화폐.
그리고 그것이 다음 생에에서 요긴하게 쓰인다는 것.
노인은 포인트라는 것에 대해 더 알아본 다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방법을 연구할 생각이었다.
‘신기를 빼앗긴 건 큰 죄지만 신기를 다루는 자와 우리를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걸 알리면 그 정돈 용서해 줄 것이야.’
넘어지고 구르면서도 노인은 숲을 헤쳐 나갔다.
“이 정도면 벗어났…… 으음?”
뒤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자 노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노인의 몸은 지워지듯 사라졌다.
“무…… 무슨…….”
툭-
허망하고 놀란 눈을 한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어두워지는 자신의 시야에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홀든의 모습이 보였다.
활은 불타는 듯한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그와 자신의 사이에는 깨끗한 일직선의 길이 나 있었다.
활에서 불이 사그러들자 홀든은 묵묵히 자신의 짐을 챙겨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