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취기가 오른 오일 경은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럼 아무드가 전쟁을 준비 중이라는 거군요?”
“맞아. 우리가 직접 전쟁을 하는 건 아니지.”
아무드가 남벌을 준비 중이고 제국이 물자를 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은 들은 태훈은 일순간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금방 상인의 얼굴로 바뀌었다.
“그게 언제쯤입니까? 저희도 물자를 좀 사둬야 할 것 같아서요.”
“내년 봄쯤? 만약 뭔가를 산다면 자네들은 곡식보다는 병장기를 사들이는 편이 좋을 걸세.”
“참고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국이 그 전쟁으로 얻는 것이 있나요?”
“아무드가 남벌에 성공하면 제노비아의 곡물과 카나리스의 원석 채굴권 일부를 받기로 했어. 그 때문에 우리 재무국도 그거 계산하느라 머리가 아프단 말이지.”
“아무드에게 구실은 있습니까?”
“구실이야 만들면 되지. 아무드에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
아무드가 딴지를 걸면 뒤는 제국이 봐주겠다는 뜻으로 들은 태훈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음? 왜 그러나?”
“아, 아니요. 뭐가 돈이 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푸하하하, 자넨 뼛속까지 상인이구만!”
오일 경은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태훈의 등을 내려쳤다.
‘내년 봄이면 일 년도 채 안 남았다. 아무드가 무슨 일로 시비를 거는지 알아야 해.’
오일 경과 페리어튼에게 선물까지 두둑이 들려 보낸 그는 뮤즈를 불렀다.
“앞으로 몰래 저들한테 붙어 다녀. 특이 사항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옙!”
“모든 대화 내용을 기억한 뒤에 나한테 전해줘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저는 코흘리개가 아니라고요. 그 정돈 쉽죠.”
“그래, 잘 부탁한다.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비단 뮤즈가 누군가에게 걸린다 하더라도 태훈은 별걱정이 없었다.
노인의 신기를 흡수한 뒤 뮤즈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거기다 뮤즈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군 말고는 없는 상황.
들킨다 하더라도 자력으로 탈출하면 그만이었다.
오픈 행사를 마친 뒤 며칠 후.
태훈은 오일 경에게 다시 한번 선물과 함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유리아가 작은 상자와 함께 지부 건물로 찾아왔다.
그녀는 매우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로……?”
알은 꼭두새벽부터 그녀가 찾아오자 당황한 듯 보였다.
‘설마 이것이 왕자님이 말한 효과인가!’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계속 눈도장을 찍는 것.
그러다 연락을 끊으면 상대방이 먼저 궁금해한다는 전략은 태훈이 알려준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직 연락을 끊은 적이 없는데?’
알이 이상한 착각에 빠져 있는 사이 그녀가 매섭게 물었다.
“어째서 제가 여기에 있는 거죠?”
“그걸 왜 저한테…….”
“당신이 한 짓이 아닌가요?”
툭-
그녀는 알의 앞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작은 종이였고 그것을 펴 들자 편지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오일 경이 보낸 서신이었다.
유리아를 파견한다는 말과 함께 잘 부탁한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알이 태훈에게 달려가 편지를 내밀자 태훈은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어째서 저 여자가 여기에 있게 되는 겁니까?”
“눈에 안 보이면 신경 쓰이잖아. 차라리 옆에 두고 딴 짓 못 하게 하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래도 되는 겁니까?”
“문제 될 건 없잖아. 어차피 지부 건물에서 사무만 보는 거고. 그냥 수금하러 온 사무관 정도로 생각해.”
“하지만 그러다가 들키기라도 한다면요? 은화 제조를 걸리기라도 하는 날엔.”
“걱정은 노노. 어차피 이제부터 은화는 직접 오일 경으로 들어갈 거야.”
태훈은 위폐를 재무국으로 직접 보낸다는 편지를 썼었다.
재무국의 국가 은행에 보관한다는 이유였다.
보관료가 들긴 하지만 나름 괜찮은 작전이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이 좋다고 했어.”
“그러다 그쪽에서 위폐를 눈치채면요?”
“전직 장인께서 완벽하다고 보증한 위폐야. 들킬 염려는 없어. 그리고 그쪽은 오히려 더 좋아할걸?”
실제로 오일 경은 돈을 맡긴다는 서신에 굉장히 좋아했다.
지인 귀족들의 상단에 긴급히 유통시킬 수 있는 자금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거기다 금화와 동화 등 각종 돈과 섞여 있었다.
각국에서 투자로 받았던 돈들의 일부였다.
“그래도 불안합니다만…….”
“네가 있잖아. 감시 잘해.”
유리아 본인도 굉장히 불만이 많은 듯 보였다.
하지만 본인의 성격 탓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을 받아들인 듯했다.
오히려 알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마치 학생 부장 같은 느낌이었다.
유리아가 파견 행정관으로 제국 지부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나서 한 달.
공국의 약 제조 공정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첫 시제품은 면역력을 올려주기 위한 약이었다.
아넬리아와 제노비아의 왕비를 치료할 때 쓴 약과 같은 것이었다.
다만 약을 담는 용기는 비싼 유리가 아닌 자기였다.
보관에 유리만큼 좋은 것이 없었지만 문제는 단가.
약을 싸게 판다 해도 용기값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상황이 생겼다.
그래서 도자기를 굽던 가마를 이용해 시험 삼아 작은 자기를 구웠던 것.
그 결과 유리보다 많이 저렴한 자기용 약병을 만들 수 있었다.
처음은 공국에서 선을 보였다.
공국의 의원들 역시 상당한 비만이었고 그 가족들 중에는 성인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 면역력이 떨어진 자들을 추려내 약을 뿌렸고 반응은 상당히 좋았다.
공국은 소문이 빨랐다.
약의 소문을 들은 상단들이 접촉을 해왔다.
태훈은 제국과 공국 이외의 국가를 드나드는 다른 상단과 일정량의 납품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 상단들은 다름 아닌 제약회사에 투자한 왕정과 귀족들이 가진 상단들이었다.
태훈은 최대한 원가에서 마진을 남기지 않았다.
거래를 하는 상단들에게서 약의 소매가에 대한 확답을 들은 뒤에야 물건을 판매했다.
최대한 저렴한 가격에 팔기 위함이었다.
약이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가자 태훈은 글렘 의원을 찾아갔다.
“공장을 더 늘려야겠습니다.”
“흠, 반응이 좋구만.”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일정을 당겨야 합니다.”
“의료원 말인가? 그건 준비됐네.”
글렌은 태훈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의료원의 개원 허가증이었다.
의료원이란 개념의 상업 형태는 전무했었다.
글렌 의원은 태훈 대신 의료원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여 법안을 마련했다.
“감사합니다. 글렌 의원님의 도움이 큽니다.”
“그리고 하나 더 필요하네. 자네가 말한 지적재산권. 그걸 진행하려면 자네 약의 이름이 필요해.”
“그건 결정해 두었습니다. 페니실린으로 하겠습니다.”
태훈도 가장 기본적인 항생제인 페니실린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푸른곰팡이는 존재하지 않았고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페니실린이라 이름을 칭한 것에는 제약회사에 몸을 담았던 그의 존경심.
그리고 지구에 대한 추억도 겸해서였다.
글렌은 몇 가지 서류를 더 내어주며 말했다.
“지적재산권 법안이 마련되면 당분간 바빠질 거야. 사방에서 자기들이 파는 물건을 신청할 테니.”
“새로운 개념이니까요. 하지만 이걸로 확실히 세수는 증가할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제의한 내용이니 자네가 심사관을 맡아주게.”
“그 정도 협력은 해야겠죠.”
글렌 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인데. 제노비아에는 갈 생각이 없나?”
“도리아 공주 말입니까?”
“으음, 요새 말이 아닌 모양이야.”
태훈도 글렌 의원이나 소문으로 도리아의 소문을 듣고 있었다.
태훈이 죽었다는 카나리스의 공식 발표 이후 도리아는 식음을 전폐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는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녀는 제노비아의 지분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기에 소문은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지금 제가 가서 만난다 한들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거기다 비밀까지 탄로 나면…….”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해주게.”
손녀가 걱정 되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안 태훈은 잠시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조만간 아무드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때 잠시 들르죠.”
“오, 그런가?”
“들르는 것뿐입니다. 그냥 도리아 공주의 상태만 멀리서 확인하도록 하죠.”
“으음, 알겠네. 그런데 아무드로 가는 이유는 전쟁 때문인가?”
태훈은 오일 경을 통해 들었던 아무드의 전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제약회사의 대표로 아무드를 공식 방문을 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전쟁 정당성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무슨 일을 꾸미는지 여기서 알아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지. 내가 도울 일은?”
“소개장을 써주십시오. 제국도 그렇고 생면부지 타지에서는 소개장이 중요하더군요.”
“준비가 되면 말하게. 그전까지 준비해 놓도록 하겠네.”
“겨울 전에는 출발할 겁니다.”
태훈은 바로 공국에 의료원을 개장했다.
기존의 창고를 개조한 것으로 이미 공사는 끝나서 대기 중인 건물이었다.
청결이 중요했기에 태훈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의료원의 청결시스템을 만들었다.
마나 회로와 원석이 사용된 만큼, 많은 자본이 들어갔다.
‘할 일이 너무 많다. 이제 개인위생을 준비해야 하나.’
기본적으로 개인위생이 중요했다.
태훈은 비누와 목욕탕을 준비하려 했으나 큰 난관에 부딪혔다.
깨끗한 물을 공급할 상하수도 시스템이 없었던 것.
카나리스에서 공작을 뒤쫓았을 때 이용했던 지하수로처럼 폐수는 도시 아래를 흐르고 있었다.
물은 수도 외곽에서 퍼오고 있는 형태라 목욕탕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결국 택한 것은 그저 목욕에 대한 위생 지식을 전파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권위 있는 단체나 인물을 통해서 지식을 전달해야 했다.
아직 의료원이 개장 전이었기에 태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총국이 제격이긴 한데. 그들이 이름을 빌려줄 리는 없고.”
“그럼 떠돌이 신관들은 어떻습니까?”
“으음, 그게 차선책이긴 해.”
신관들 중에서는 총국에 소속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총국에서 추방당하거나 기타 사유로 총국에 소속되지 않은 신력을 가진 인물들.
그런 그들은 대게 용병 형태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뽑은 용병대들 중에서 신관 둘 정도만 데리고 와봐. 똘똘한 놈으로.”
태훈의 주문에 알은 두 명의 인물을 데리고 왔다.
두 명 모두 여자.
떠돌이 신관 중에 여자가 많은 이유가 있었다.
총국에서는 여자를 신관으로 임명하지 않고 있었다.
여성이 신력을 가지게 되면 이단으로 몰거나 사기꾼 취급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자신들의 고용주이자 최고층에 있는 인물을 보자 두 신관은 깍듯했다.
“이름은?”
“테미입니다.”
“산드라입니다.”
“자매인가?”
“네, 그렇습니다.”
“호, 그래? 별일이군.”
자매가 나란히 신력을 가지는 일은 신기한 일이었다.
“둘은 추가 임무가 있어서 불렀다.”
“추가 임무요?”
“어려운 일은 아니야. 둘은 용병대를 따라 이동할 때 이동 진료소를 열도록 한다.”
“이동 진료소? 그게 뭔가요?”
“아픈 자들을 돌보라는 뜻이야. 둘 다 글을 읽을 줄 알지?”
그렇게 말한 그는 책 몇 권을 그녀들에게 내밀었다.
거기엔 기본적인 위생 방법.
그리고 흔한 약초로 만드는 처방 방법이 적혀 있었다.
태훈이 환생한 이후 자신의 능력을 통해 터득한 이곳의 지식이었다.
자신의 자산 일부를 내놓는 것이었지만 태훈은 아까워하지 않았다.
책을 집어 들고 읽던 그녀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책의 내용이 전부 사실입니까?”
“사실이다.”
“총국에서 이걸 본다면 바로 이단으로 몰 겁니다.”
“그러라고 해. 자네들은 상단이. 나아가 공국이 지킨다.”
“하지만…….”
그녀들은 망설였다.
안 그래도 총국의 입장에서 자신들은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선뜻 나서기를 꺼려 하는 모습이었다.
“불안하거나 생명의 위협을 받을 게 걱정된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면 임금의 5배를 주지.”
“5, 5배…….”
“그것도 부족하다면 그대들을 호위할 용병대도 따로 뽑아주겠다.”
파격적인 대우였다.
자매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책은 누가 만든 것입니까? 어디서 이런 지식을…….”
“그건 비밀이다. 그대들은 그 책을 토대로 지식을 전파하고 아픈 자들을 진료하는 것이 임무다.”
“하겠습니다!”
동생 쪽인 산드라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언니인 테미는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산드라, 이건 그렇게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언니, 우리가 왜 떠돌이가 되면서까지 신관이 됐어. 엄마처럼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자는 이유였잖아.”
‘그런 사정이 있었나?’ 테미는 동생의 고압적인 태도에 멈칫거렸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우린 더 많은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거야.”
“동생 쪽은 마음이 기운 듯하군.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들의 안전은 공국의 이름을 걸고 지켜내겠다. 언니 쪽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언제든 오도록 해.”
태훈은 책을 갈무리하여 도로 챙겼다.
그 모습을 본 테미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태훈은 다시 책을 둘에게 내밀었다.
“호위대는 따로 편성해서 붙여주지.”
“그냥 지금 있는 용병대로 만족합니다. 전부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라.”
“그래? 그럼 나야 좋지. 그럼 그 용병대의 인원들은 임금을 두 배로 인상하지.”
“감사합니다!”
‘이걸로 시작이다. 이제 총국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어.’ 총국이 배척하는 인물들을 통해 의료 지식을 전파한다.
이것은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
테미와 산드라.
추후 이 자매는 먼 훗날 사망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역사서에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