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왕자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런 실수는 하지 마. 감시를 하랬지 의심을 사란 말은 안 했잖아.”
두 남자가 방 안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공사장에서 유리아와 대화하고 있던 남자.
그리고 그와 대화하고 있는 남자는 검은 머리의 남자였다.
두 남자는 태훈과 알이었다.
“무심코 이름이 나왔습니다. 경솔했네요.”
“다음부터는 조심해. 이왕 이렇게 된 거 다음 단계로 진행한다.”
“그거…… 꼭 해야 합니까?”
“왜? 네 취향이 아니야?”
“아니, 뭐 그렇긴 하지만. 왕자님이 직접 하셔도 되잖아요.”
“이름과 머리색을 바꾼 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돼. 얼굴 팔려서 좋을 건 없어.”
“쳇.”
알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하기를 그만두었다.
언데드 군단과 결전을 벌인 지 반년.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마지막 결전 때 섬광으로 사람들의 눈을 속인 태훈은 바로 모습을 감추었다.
알은 그가 죽음을 위장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조만간 모습을 감추기로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만 골렘과의 전투로 모습을 감춘 것은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알은 왕궁에서 나온 뒤 바로 히스렐다 공국으로 향했다.
글렌 의원을 만나자 그는 알을 태훈에게로 안내했다.
알은 본 태훈은 잘 찾아올 줄 알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나저나 정말 본국에는 알리지 않을 작정이세요?”
“메드니안으로의 인생은 끝났어. 더 이상은 관여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그게 왕국에게 도움이 된다.”
메드니안의 이름은 본국에서 영웅으로 남았다.
정체불명의 흑마법사와 리치.
그리고 언데드의 군대로부터 나라를 지킨 영웅으로.
국민들은 그를 기렸고 로텐바르는 알 수 없는 외부의 적이 왕국을 노리고 있다며 국민들을 일치단결 시켰다.
정계도 로텐바르와 메드니안으로 나뉜 구도에서 하나의 구심점으로 단합되었다.
결과적으로 올 라잇이었다.
“그래도 아넬리아 님이나 국왕님께는 말씀드려도 되지 않아요?”
“한두 명이 알기 시작하면 소문은 퍼지기 마련이야. 넌 비밀이라는 단어를 알긴 아는 거냐?”
“네네, 알겠습니다. 생각해서 말씀드린 건데.”
왕자의 신분을 벗은 태훈은 알에게 친구로 지내자고 말했다.
자신보다 어리긴 했지만 그와 함께한 시간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알이 반대를 했고 결국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껍질이 한 꺼풀 벗겨진 것처럼 예전보다도 가까워졌다.
히스렐다 공국으로 간 태훈은 글렌 의원에게 부탁하여 신분을 세탁했다.
암살자에게서 빼앗은 금화의 절반을 공국에 기부하는 것으로 말단 의원직을 얻었다.
남은 돈은 파케 영애에게 공방을 운영하라며 쥐어주었다.
그러고는 상단을 꾸렸다.
메드니안으로 이루어놓은 주식회사 개념의 상단 계획은 살아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크로이츠로 바꾸고 글렌과 함께 공동 창업주로 상단을 운영하려 했다.
거점은 공방이 있는 히스렐다 공국.
자금은 본국과 히스렐다 공국, 제노비아 왕국 등 여러 왕국의 왕정이나 귀족들로부터 투자받았다.
자금을 투자받는 일은 글렌 의원이 맡아주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뮤즈는 나갔고 장군님은 취조 중.”
“그 장교 말인데요. 장군님이라고 부르는 건 그만두면 안 될까요?”
“내가 이야기했잖아. 그분은 내가 함부로 대할 분이 아니야.”
“아니, 그래도 그렇지. 왕자님이 일개 장교한테 장군님이라고 하는 건 제가 보기에 좀…….”
태훈은 자신의 대한 것을 알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다만 포인트나 저승의 이야기는 빼놓고 전생의 기억만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은 알은 처음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말하며 이곳에는 없는 지식을 말해주자 겨우 믿는 눈치였다.
결정적으로 태훈이 장군이라 부르는 인물과도 얼추 이야기가 맞아떨어지자 믿을 수밖에 없었다.
“너는 깍듯이 안 해도 돼. 그분도 그걸 바라고 있어.”
“아, 적응 안 되네. 쩝.”
덜컥-
방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붉은 머리를 한 사내로 태훈이 장군님이라고 부르는 인물이었다.
“오셨습니까?”
태훈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를 맞이했다.
그의 눈에는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으음, 다녀왔습니다.”
상대도 태훈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성과는 좀 있습니까?”
“입을 열지 않으니 답답합니다. 왕자님 쪽은요?”
“무난합니다. 그리고 왕자라는 말보다는 크로이츠라고 불러주십시오.”
“입에 붙지 않는군요. 노력하겠습니다.”
태훈은 왕국을 떠나올 때 그를 만났다.
싸움에서 그가 화살을 쏘면서 내뱉은 단어는 ‘주작’이라는 단어.
가면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태훈은 그가 자신처럼 전생에 대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대화를 해본 결과 그는 가면과 계약을 했고 부수적으로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가 사방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고대 중국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의 전생의 이름을 들었을 땐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는 머뭇거리며 태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시간 괜찮으시면 지난번에 이어서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어디까지 들으셨죠?”
“그 국제금융인가 머시기 하는 데까지 들었습니다.”
“아, IMF까지 이야기했었군요.”
태훈은 시간을 보더니 그와 마주 앉았다.
알이 차를 가져다주었고 태훈의 옆에 앉아 같이 경청했다.
IMF를 이겨내고 2002년 월드컵. 그리고 연평도 도발까지 이야기 했을 때 붉은 머리의 사내가 분통을 터뜨렸다.
“어째서 같은 민족끼리 싸우려 드는 것인가…….”
“후손으로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태훈이 미안해하자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게 어찌 왕자님의 잘못이겠습니까. 전부 선대의 덕이 부족한 듯싶습니다.”
“그래도 지금 우리 민족은 대단하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기술이며 국민성 모두 전 세계 어디에서도 꿀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것참 다행입니다.”
남자는 착잡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의 이름은 홀든.
북부군 소속 백인대장으로 나이는 이제 27살이었다.
그리고 그의 전생은 다름 아닌 이순신.
충무공이란 이름으로 역사에 길이 남은 해전의 명장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조선의 시대와 임진년에 일어난 난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전생의 기억만 있을 뿐 저승에서의 기억은 없는 듯했다.
홀든으로의 인생도 자신의 것이라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태훈이 자신을 존경하는 후손이라 밝혔음에도 그를 왕자의 신분으로 대하고 있었다.
태훈이 자신과 같이 가자고 했을 때 홀든은 거리낌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조용히 듣고 있던 알이 넌지시 물었다.
“그 가면의 존재들은 대체 뭐 하는 놈들입니까? 지하실에 있는 놈도 그렇고.”
“자세히는 모르지만 전생자들을 노리고 있어. 나한테도 접촉했고 장군님한테도 접촉했으니 그건 분명해.”
“저도 전생이란 게 있었을까요?”
“아마도?”
“흠…….”
알이 팔짱을 끼고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왜? 뭐가 신경 쓰여?”
“전생에 제가 나쁜 놈이었을까 좋은 놈이었을까 궁금해서요.”
“인간으로 태어난 걸 보면 분명 나쁜 놈은 아니었을 거야.”
“왕자님은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태훈은 그저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포인트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었고 홀든도 자신이 무엇을 거래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저승에서의 기억이 없어 계약서의 내용을 모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장군님 정도면 포인트가 어마어마했을 텐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순신으로서의 삶 다음이 바로 홀든의 인생이었다.
그렇다는 말인즉슨 그간 환생을 하지 않았으며 포인트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리란 뜻이다.
‘장군님은 이번 생에 포인트를 많이 투자하지 않은 건가?’
백인대장은 귀족이라고 할 수 없었다.
평민 신분이었기에 신분 선택에 들어간 포인트는 얼마 되지 않는 것.
거기다 홀든은 오리진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뿐이었다.
그러한 점들을 미루어볼 때 홀든이 갈취당한 포인트는 수천만 이상으로 보고 있었다.
스윽-
태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내가 그놈이랑 이야기를 나누어봐야겠어.”
그러자 두 명 모두 따라가려 했지만 태훈은 됐다며 혼자 나섰다.
건물에는 지하실이 있었다.
지하실로 들어가자 방 안 가득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소리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마법진부터 알람 마법까지.
완벽하게 죄수를 가둬둘 수 있는 준비를 해둔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노인이 의자에 묶여 있었다.
태훈과 일전을 벌인 흑마법사였다.
많이 수척해져 있었지만 눈빛은 살아 있었다.
“대단하네. 반년이나 버틸 줄은 몰랐어. 물 좀 줄까?”
태훈은 탁자에 있던 물병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노인은 원한에 찬 눈빛으로 말없이 태훈을 노려보았다.
물병을 도로 내려놓은 태훈은 의자를 끌어와 노인 앞에 마주 앉았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어. 우리 장군님이 험하게 다루었나 봐?”
“뭘 물어본들 대답할 건 없다.”
“아니야, 말 안 해도 돼. 그냥 이렇게 있어도 될 거 같아.”
“뭐?”
태훈은 가지고 온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냈다.
노인이 가지고 있던 수정구.
그것을 본 노인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 신기라는 거. 보아하니 이 세상 물건은 아닌 듯싶은데. 귀한 거겠지?”
“…….”
“날 찾아왔던 놈 거하고 당신 거. 그 귀중한 걸 두 개나 분실했으니 당신들 쪽에서도 반응이 있지 않을까?”
“우리가 움직이면 네놈 따윈 아무것도 아니야. 그걸 넘겨주고 날 풀어주면 네놈은 못 본 척해주지.”
“그거 다 허세잖아. 보아하니 당신들은 대놓고 움직이는 부류는 아닌 듯한데?”
노인이 반년간 입을 열지 않자 태훈은 나름 정보를 모아봤다.
하지만 제국의 가장 큰 정보 길드에서도 신기라는 이름의 물건이나 가면의 인물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결국 당신네들은 드러내 놓고 움직이지는 못해. 그리고 네놈도 날 몰랐으니 가면들 사이에서는 정보 교환도 안 되는 듯하군.”
태훈은 포인트에 대해선 그 누구와도 공유하고 있지 않았다.
하물며 자신의 기억을 일부 공유하고 있는 뮤즈조차도 포인트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그런 포인트를 강탈하는 조직도 대놓고 돌아다니진 못하는 상황.
그리고 그 하수인으로 보이는 신기 보유자들도 포인트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흥, 우리는 네놈이 상상도 못 할 조직이야. 그런 어쭙잖은 협박은 그만두는 게 좋아. 지금이라도 날 풀어주고 충성을 맹세해라. 그렇다면 널 우리 조직에 추천해 주지.”
“푸하하하하.”
태훈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던 태훈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나보다 약한 놈들 조직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는데?”
“후훗, 그럼 할 말은 없겠군.”
“그래, 피차 힘을 뺄 필요 없지. 지금까진 신사답게 행동하라고 했는데 이제부터 제대로 된 고문을 당해봐.”
태훈은 지하실을 나왔다.
홀든에게 더 이상은 봐줄 필요 없을 것 같다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태훈은 뮤즈를 불렀다.
홀연히 나타난 뮤즈는 항상 그렇듯 태훈에게 달라붙었다.
“왜 부르셨어용? 헉, 설마. 이제부터 밤시중을?”
“아니, 그건 아니고. 이거. 네 힘으로 만들 수 있으려나?”
태훈은 뮤즈에게 신기를 내밀었다.
“이건 그 영감탱이가 갖고 있던 건가요?”
“응, 네 몸의 일부에 신기가 있잖아. 혹시 이 힘을 흡수할 수 있겠어? 흡수한다면 더 강해질 수 있잖아.”
“전 지금도 강하다구요. 이제 무기화도 할 수 있고.”
“더 강해져서 나쁠 건 없잖아.”
태훈은 그녀의 손에 신기를 쥐여주었다.
잠시 수정구를 살펴보던 뮤즈는 집중을 하는 듯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뜬 그녀는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할까요?”
“아니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장소를 옮기자.”
뮤즈를 처음 봤을 당시 일어났던 강렬한 빛을 떠올린 그는 밖으로 나섰다.
태훈은 뮤즈를 무기화시켰다.
그녀를 통해 흘러들어 오는 막대한 힘을 느끼며 단숨에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지붕들 사이로 뛰어다니던 그는 순식간에 수도의 외곽까지 이동했다.
벽을 뛰어넘은 그는 외진 숲 한가운데서 멈춰 섰다.
“자, 여기라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괜찮겠지.”
“그럼 시작할게요.”
그녀의 말과 함께 수정구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잠시 후 무지갯빛을 발하던 수정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녀가 수정구를 흡수한 것이다.
신기를 흡수한 뮤즈의 머리색은 이번엔 보랏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뭐지? 왜 머리색이 바뀐 거지?”
“글쎄요?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몸 상태는?”
“최상이죠. 더 강해진 것 같은 기분인데요?”
태훈은 그녀를 무기화시켜 다시 한번 힘을 가늠해 보았다.
전과는 달라진 파워에 그도 흡족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