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이거 생각보다 귀찮군.”
가면의 사나이는 머리를 긁적였다.
무리가 늘어남에 따라 그의 부담도 늘어나고 있었다.
피 냄새에 취해 생각 없이 무리를 늘리다 보니 일어난 일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히려 언데드를 줄여주는 군대에게 별 다른 반발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늦어지는 건 참을 수가 없군.”
100여 명 남짓 되는 인간들이 언데드들의 발을 붙잡자 그가 직접 나섰다.
그가 손짓하자 리치가 된 남자가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리치의 손에는 엄청나게 큰 투박한 검이 들려 있었다.
훙-!
공기를 가르는 두꺼운 소리와 함께 병사 세 명의 몸이 분리되었다.
급이 다른 적이 나타나자 병사들의 이목은 그쪽으로 쏠렸다.
“리치다!”
“방패병! 앞으로!”
병사들이 자신의 키만 한 방패들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급조한 나무 방패라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돌격!”
“우아아아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달려들었다.
그 뒤로는 창을 든 병사들이 뒤따랐다.
방패에 밀려진 리치의 몸 위로 여러 개의 창이 꽂혔다.
“돼…… 됐다!”
“놈은 언데드다! 걸레로 만들어라!”
창들이 리치의 몸을 계속해서 찔러 들어갔다.
리치의 몸이 뒤로 넘어가자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리치의 몸이 땅에 닿기 전 멈추었다.
그러곤 상체를 일으켜 다시 우뚝 서자 병사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수천의 언데드가 백여 명의 병사들을 먹어 치우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다시 남하를 시작한 그들 앞에 새로운 무리가 나타났다.
“호오? 여기가 최후의 보루라 이건가?”
상당히 큰 방어 진지를 본 가면은 감탄했다.
천 명은 넘을 듯한 숫자의 병사들을 보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가면의 손 수정구가 빛나자 모든 언데드들이 진지 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놈들이 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 한다! 여기가 무너지면 수도까지 위험해진다!”
목책과 목재로 만든 벽 뒤에 선 병사들의 입이 타들어갔다.
“찔러 넣어!”
창과 검들이 언데드들의 머리를 관통하기 시작했다.
1천 대 2천 5백.
방어를 하고 있는 병사들이 느릿느릿한 언데드들을 상대하기엔 충분해 보였다.
“큭! 빠지지 않아!”
하지만 머리를 관통당하지 않은 언데드들은 자신을 찌른 검과 창을 움켜쥐었다.
그사이 밀려드는 언데드들 때문에 목책에 무리가 가기 시작했다.
끼익-끼익-
우지끈-
목책들이 속속히 무너지자 병사들은 나무 벽이 있는 진지 안쪽으로 숨어들었다.
“홀리 웨폰!”
“리커버리!”
근처 신전에 있던 신관들도 혼신의 힘을 다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무기에 신력을 걸어주고 물린 병사들에게는 치료를 시전했다.
하지만 중급 신관들은 도망치고 남은 하급 신관들의 마나는 금세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너…… 넘어온다!”
“막아! 막으란 말이다!”
벽 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언데드들이 쌓이기 시작하며 2미터 높이의 나무 벽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으으윽!”
“라이!”
한 병사가 언데드에게 팔이 붙잡혀 끌려가자 다른 병사가 그를 붙잡았다.
“으아아악!”
팔이 물어뜯기며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팔을 잘라!”
그를 붙잡던 병사가 라이라는 병사의 팔을 쳐내자 간신히 벽 안쪽으로 피할 수 있었다.
“리…… 리커버리!”
신관 하나가 급히 치료를 하자 다른 병사가 그의 절단 부위를 감쌌다.
“영주님! 곧 무너질 것 같습니다!”
“으음!”
영지군 병사가 달려와 고하자 영주는 옆에 있던 횃불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북부군 장교가 가로막았다.
“불을 놓기엔 아직 이릅니다. 그리고 내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말아주시죠.”
장교의 눈에는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살릴 수 있는 병사들은 살리는 게 어떠한가.”
“이미 포위되었습니다. 어디로 피한단 말입니까? 나와 내 병사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그러더니 장교는 옆에 있던 활을 들어 시위를 겨누었다.
그가 쏜 화살은 모조리 언데드들의 머리를 관통했다.
“아직 젊은데 활을 잘 쏘는군.”
영주가 감탄하자 장교가 중얼거렸다.
“아주 먼 옛날 배웠습니다.”
“마치 수백 년 전에라도 배웠던 것처럼 말하는군.”
“그럴 수도.”
“음?”
“아닙니다. 혼잣말입니다.”
연달아 쏘는 화살은 백발백중이었다.
그러던 중 그의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재빨리 영주를 데리고 옆으로 피했다.
쿵-
진지 한복판에 떨어진 것은 가면의 인물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원군은 아닌 듯하고. 적인가?”
질문하는 장교의 눈은 매섭다 못해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상황을 눈치챈 병사 몇 명이 무기를 들고 와 가면의 인물을 포위했다.
가면의 인물은 자신에게만 보이는 표식이 장교의 이마에서 보이자 물었다.
“보아하니 이미 계약을 한 거 같은데 넌 왜 여기 있지?”
“계약? 아, 너도 그 가면이랑 같은 놈이로구나.”
“지금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가?”
장교와 가면의 인물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영주가 물었다.
이미 둘이 안면이 있는 듯하자 이번엔 영주가 검을 빼 들어 장교를 겨누었다.
“설마 내통한 건가!”
“이놈의 동료를 패준 기억은 있지만 손을 잡은 기억은 없습니다.”
장교의 말을 들은 가면이 아는 척했다.
“아, 설마 네가 로젠이랑 계약했던 녀석인가?”
“로젠? 내 화살에 손가락을 잃은 녀석이라면 그놈이 맞겠군.”
“맞아 맞아. 기억을 되찾고는 돌변해서 공격했다는 녀석이 있다던데 그게 바로 너로구나. 크크큭.”
점점 영문 모를 대화 내용에 영주는 혼란스러워했다.
“기억? 이봐, 대체 저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몇 달 전에 척후를 나갔다가 몬스터에게 죽을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장교는 자신의 경험을 늘어놓았다.
죽어가던 찰나 가면을 쓴 자가 찾아와 거래를 했다는 것.
자신과 계약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한 것.
그는 계약을 했고 그 과정에서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다고 했다.
“전생의 기억? 그런 게 있을 리가.”
“있습니다. 놈은 저를 살린 후에 누군가를 찾아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당시 자신과 마주했던 가면은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며 그에게 찾아간다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장교는 거절했다.
자신의 전생에 비추어봤을 때 부귀영화라는 것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해 보겠다며 즉답을 피하자 가면은 그를 제거하려 했다.
이에 장교는 급습하여 내쫓았다고 했다.
“로젠 녀석이 분통해 하더라고. 당황해서 도망쳤다면서 말이야. 처음 보는 기술을 썼다지?”
“…….”
“나도 궁금해졌어. 한번 보여주겠어? 로젠을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그 기술을.”
장교는 가면에게 활을 겨누었다.
“빈 활로 뭘 하겠다는 건가?”
당황한 영주의 말대로 그의 활시위에는 화살이 없었다.
그때 하나의 형상이 그의 활시위에 만들어졌다.
“설마, 오리진으로 화살을 만든 건가?”
영주가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가면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도 잠시 눈을 돌려 자신의 상관을 주시했다.
“필살(必殺), 주작(朱雀).”
화아악-!
오리진으로 만든 화살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장교의 몸에서부터 뿜어진 화염은 소용돌이치더니 이내 만들어진 화살의 끝에 집중됐다.
그 순간 화살의 형상은 가면에게 쏘아졌다.
쐐애액!
파공음과 함께 날아간 화살은 근거리에 있던 가면에게 금방 도달했다.
그러자 가면은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어느새 가면은 푸르스름한 정령을 소환하여 밟고 있었다.
“오리진을 화살 대용으로 쏠 줄이야. 확실히 당황할 만하군. 하지만 맞지 않으면 그만…… 음?”
가면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허공으로 날아갔던 화살이 방향을 틀어 자신에게 날아오고 있던 것이다.
퍼엉-!
허공에서 화살이 폭발하며 뜨거운 열기가 지상을 덮쳤다.
“해치운 건가?!”
영주의 물음에 장교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허공의 불길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수발의 붉은 화살이 연이어 덮쳤다.
콰콰쾅-!
터져 나가는 불길을 헤치며 가면의 사나이가 더 높이 솟구쳤다.
“제법이군. 오리진을 마법처럼 쏘아내다니. 과연 당황할 만해.”
지상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병사들을 보며 가면이 웃었다.
“하지만 그건 풋내기인 로젠이나 그렇고 난 다르다. 격이 다른 걸 보여주지.”
가면이 수정구를 내밀며 중얼거리자 지상에 있던 리치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몇 마리의 언데드가 리치에게 엉겨 붙더니 이내 흡수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덩치와 키가 두 배로 커진 리치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투캉-!
“크헉!”
리치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과 기사들이 볼링 핀처럼 떨어져 나갔다.
후웅-!
거구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장교에게 다가갔다.
쾅-!
투박한 검이 땅에 박히며 박살이 났다.
간신히 검을 피한 장교는 이번에는 리치에게 화살을 날렸다.
그러자 리치는 옆에 있던 언데드 몇 마리를 화살을 향해 집어던졌다.
퍼엉-!
화살이 폭발하는 순간 화염을 뚫고 거구의 손이 장교를 움켜쥐었다.
“크윽!”
“크크크크, 네놈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흑마법으로 강화한 리치를 이길 순 없지.”
우드드득-!
리치가 힘을 주자 장교의 뼈에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장교는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허공의 가면을 노려보았다.
“네놈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 어차피 계약에 따르지 않는 놈은 불순분자. 그냥 여기서 죽…….”
휘익-!
바람이 잠깐 일며 가면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새하얀 빛에 위기감을 느낀 가면은 모든 힘을 모아 방어막을 펼쳤다.
콰앙-!
“크흡!”
검과 부딪히는 순간 밀려오는 반동에 가면은 목에서 올라오는 시큼함을 느꼈다.
“백마법?!”
“그러는 넌 흑마법이 분명하군. 처음 느끼는 마나다.”
“이 애송이가!”
가면은 수정구를 들지 않은 손을 남자에게 뻗었다.
손에서 검은 기운이 응축될 때 어디선가 날아온 섬광이 그의 등을 때렸다.
펑!
“크윽!”
가면의 몸이 휘청이며 고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사방에서 빛의 화살들이 그에게로 날아들었다.
콰콰콰쾅-!
수많은 폭염은 허공을 수놓았고 지상에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워…… 원군이다!”
한 병사가 외치며 가리킨 곳에서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면이 급습을 받으며 통솔이 안 되는 틈을 타 태훈이 이끌고 온 원군이 기지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오오오오!”
원군을 확인한 진지 안의 병사들의 사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문을 열어라! 우리도 가세한다!”
“나가서 동료들의 등을 지켜라!”
낙담하려던 병사들의 생기가 돌아오며 함성을 질렀다.
‘이게 흑마법인가?’
태훈은 낙하하면서도 자신에게 탁한 마나 응축체를 날리는 가면을 보며 생각했다.
처음 진지가 보이는 언덕에 도달했을 때 허공에 있는 인물을 보고 그는 역시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적의 흑마법사의 정체는 가면의 인물이었다.
가면이 상당한 실력자와 다투는 것을 본 태훈은 신관과 마법사들에게 온갖 주문을 받았다.
온몸에 신력과 백마법을 부여받은 그는 상아탑의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공중으로 도약했다.
공중에서 검을 부딪칠 때 그는 처음으로 흑마법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놈들의 원군인가?”
“그래, 원군이시다.”
태훈은 쉴 새 없이 검기를 날렸다.
고위 신관과 고등 마법사들의 힘을 두른 그는 온몸에 힘이 넘치고 있었다.
단 3초 만에 9개의 백색 검기가 가면을 덮쳐다.
쿠쿠쿠쿵=!
검기를 막아낸 듯 가면은 타격을 입지 않았지만 그대로 지면에 처박혔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태훈이 지면에 검을 꽂는 형세로 지면에 격돌했다.
하지만 검끝에 있어야 할 가면의 몸뚱어리가 보이지 않았다.
“쳇! 잽싸구만.”
“네놈도 보통 놈은 아니구나. 검기 속에 세 속성이 전부 섞여 있었어.”
“호, 대단한데? 리치가 된 놈은 두 속성 밖에 눈치채지 못하던데.”
“음? 설마 네놈이 저 녀석을 죽인 놈인가?”
“그렇다면?”
그러자 가면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크크크크, 이거 이거. 제 발로 나타날 줄이야. 내가 찾아가는 수고가 덜었구만.”
“뭐야? 너 날 노리고 온 거 아니었어?”
태훈은 흑마법사인 가면이 자신을 노리고 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죽였던 가면을 리치로 만든 인물.
거기다 가면까지 쓰고 있으니 영락없이 전의 가면과 같은 목적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널 노린 건 맞지. 하지만 널 찾느라 고생 좀 할 줄 알았는데 잘됐군. 자, 어서 신기를 내놔.”
“신기? 그게 뭔데?”
“모른 척할 셈인가? 하긴 그 정도의 힘을 가진 물건을 쉽게 내놓을 리는 없겠지.”
“아, 설마 네가 들고 있는 그 수정구랑 같은 걸로 만들어진 걸 말하는 건가? 저놈이 하고 있던 금속 팔?”
태훈은 리치가 된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리치는 통제가 풀렸는지 멍하니 서성이고 있었다.
“그래, 그거다. 그건 원래 이쪽 물건이니 내놓아라.”
“미안한데 그건 나한테 없어.”
“뭐?”
가면은 태훈을 살폈다.
실제로 그에게서 신기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어디에 숨겨놓았나?”
“그건 사라졌어. 아니, 형태를 잃었다고 해야 하나?”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신기는 부술 수도, 태울 수도 없는 물건인 것을.”
“나는 잘 몰라. 그러니 네 뒤에 있는 녀석한테 물어봐.”
가면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