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공작의 사망 소식과 집정관의 모반 혐의 재판 결과는 즉시 공표되었다.
로텐바르의 대관식도 공표됨에 따라 수도는 한숨 돌리는 분위기였다.
이 같은 소식들은 빠르게 주변 국가에게도 전해졌다.
급작스러운 소식에 제노비아는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내심 3왕자의 즉위를 기대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이에 로텐바르는 자신의 성명으로 서신을 보냈다.
카나리스-제노비아 연합 전선 창설에 대한 구체적인 서한이었다.
서한과 함께 마장기도 같이 보내며 두 왕국 간의 협약은 살아 있음을 강하게 내비쳤다.
이에 제노비아도 안심해하며 로텐바르의 즉위를 축하한다는 서한과 선물을 답례로 보내왔다.
“대관식은 다음 달 초로 할까 합니다. 외국 사절단이 모두 도착하는 것이 그쯤일 것 같습니다.”
“제국 쪽 움직임은?”
“글렌 의원이 잘해주고 있는 것 같네요.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글렌 의원은 공국 내 상단들의 검은 돈과 탈세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자금의 흐름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거기다 제국 쪽도 공작이 죽고 집정관마저 처벌을 받았다는 것이 컸다.
내부 조력 없이는 힘들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아무드 역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일이 잘 풀린다면 대관식이 끝난 후 네 결혼식도 진행하자.”
“뭐, 그렇죠.”
미적지근한 대답에 서신을 적던 로텐바르의 손이 멈추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넌 이번 결혼에 부정적인 거냐?”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결혼이란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거기다 지금 그에겐 도리아와의 결혼에 대해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다.
“네가 자유분방한 녀석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네 결혼이 단순한 결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형님, 그…….”
태훈이 머뭇거리며 뭔가를 말하려했다.
“뭐냐? 원하는 것이 있다면 들어주지.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된다면 전적으로 다 네 공로이니.”
“아, 아닙니다.”
태훈은 말하기를 그만두었다.
‘뭐, 나중엔 다 이해해 주시겠지.’
태훈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뒤 옷을 갈아입었다.
공작 사건이 끝난 후 그는 자주 왕궁을 나가 도시를 둘러보고 있었다.
단순히 놀러가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모으기 위함이었다.
그가 직접 움직이는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납 광석을 공국에 보내기 위해 민간 상단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공국의 공방의 목적은 중 하나는 은화의 위조.
그 원료가 되는 납 광석을 카나리스 왕실의 이름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로 그는 책을 집필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건강 상식을 적은 책을 낼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서민들의 생활과 음식 등 알아야할 것들이 많았다.
‘이세계판 동의보감을 만들게 될 줄이야.’
똑똑-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알이었다.
“왕자님, 외출하시는 겁니까? 그럼 저도 같…….”
“됐어.”
“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알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 자신을 두고 뮤즈라는 호위를 붙이고 돌아다니는 것에 많은 섭섭함을 느끼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일전에 알아보라고 하신 것 기억나십니까?”
“미안, 뭐였지?”
“베닝스라는 자에 대해서 조사하라고 하셨잖습니까.”
태훈은 옷을 갈아입던 것을 멈추었다.
“알아냈어?”
“익명으로 모험가 길드에 의뢰를 넣어놨었습니다. 오늘 연락이 왔습니다.”
알의 손에 양피지 두루마리가 들려 있는 것을 본 태훈은 그것을 받아 들었다.
양피지에는 그의 신상이 적혀 있었다.
“용병?”
“네, 행방불명된 용병이라고 하더군요.”
“음…….”
태훈은 오른손으로 턱을 감쌌다.
양피지엔 약소하지만 베닝스란 자의 프로필이 적혀 있었다.
?
이름: 베닝스(28세, 남성)
직업: 2급 용병
소속: 달폰스 용병단
최종 기록: 3년 전, 에이달로스 임무 도중 실종.
?
“에이달로스?”
“베닝스란 자가 마지막으로 참여했던 의뢰 이름인 모양입니다.”
“그 임무의 내용은?”
“사무소장이 말하길, 남아 있는 내용이 별로 없다더군요. 의뢰인 불명, 의뢰 착수일도 불명입니다.”
“그럼 다른 달폰스 용병단원은 만나볼 수 있나?”
“그것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전원 실종이라고 하더군요.”
모처럼 실마리를 건졌나 싶었지만 다시 막다른 길에 막히자 태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포인트를 아는 걸로 봐선 저승과 관련된 놈이 분명한데. 무슨 목적으로 포인트를 강탈하고 다니는 거지?’
가장 큰 두 가지 근심 중 한 가지가 사라졌으니 남은 건 가면의 사나이와 베닝스라는 작자였다.
“더 조사해 보시려면 정보 길드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들은 적이 있어. 정보만 취급하는 집단이라며?”
“연줄을 알아야만 접촉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모험가 길드보다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많다고 합니다.”
“연줄을 댈 만한 자가 있을까?”
“듣기로 왕실이나 귀족가가 그쪽과 연줄이 있다고는 합니다.”
“내가 알기로 우리 왕가는 그런 쪽에 연줄이 없는 걸로 아는데.”
“제가 알기로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공작이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음,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공작이 죽었으니……. 아!”
순간 그의 머릿속에 말빈이 떠올랐다.
공작을 사로잡고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던 인물.
하지만 공작을 죽이고는 홀연히 모습을 감춘 암살자.
전에 그는 공작이 시켜 여러 인물을 암살했다고 증언했었다.
‘암살에 필요한 정보를 혼자 조사하진 않았을 터. 그럼 정보 길드와 인맥이 있겠군. 하지만 그 놈을 어디서 찾지?’
잠시 고민하던 태훈은 뮤즈를 불렀다.
방구석의 그림자에서 홀연히 나타난 뮤즈는 기쁜 듯이 웃었다.
“주인님, 부르셨어요?”
“젠장, 기척이라도 좀 하고 다녀라.”
알이 깜짝 놀라며 기분 나쁘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뮤즈의 얼굴이 험악해지며 알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불만이면 덤벼.”
“뮤즈, 지난번에 네가 잡아온 암살자 있지?”
“암살자요? 아, 제가 입 찢어놓은 노인네?”
“그래, 그 노인. 기척을 감지할 수 있겠어?”
“음, 가까운 곳에 있다면 감지할 순 있을 것 같은데요.”
“네 1순위는 그 노인네를 다시 찾는 거다. 수도를 이 잡듯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봐.”
“네!”
뮤즈가 다시 소리 없이 사라지자 알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녀석은 볼 때마다 기분이 나쁘군요.”
“친하게 지내도록 노력해 봐. 아, 그리고 너에게 할 말이 있어.”
태훈은 알을 앉혀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알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했다.
“그건 안 됩니다! 이제 겨우 수도가 잠잠해졌는데. 그랬다간 발칵 뒤집힐 겁니다.”
“내 결정에는 변함이 없어. 약속이니까.”
“유배된 인물입니다. 왕자님이 그러실 것까지는.”
“이미 약속한 일이야. 그리고 지금은 그게 맞는 것 같아.”
“어…… 어째서요?”
“형님이 국왕의 자리에 오르면 라이벌이었던 내가 이곳에 있는 걸 불편해 하는 인물들이 많겠지.”
“그런 놈은 잡아다 버릇을 고쳐놓으면 됩니다!”
알이 언성을 높였지만 태훈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를 지지하던 사람들도 이젠 형님 세력과 합쳐져야 해. 내가 있으면 그게 힘들거야.”
“그래도…… 국왕님이 분명 반대하실 겁니다.”
“그래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말하는 거야. 넌 어떻게 할래?”
“저야 여부가 있습니까! 당연히 왕자님을 따라야죠!”
“그래? 역시 넌 의리가 있어.”
태훈은 흡족한 듯 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랑 뮤즈만 있으면 어딘들 못 가겠냐.”
“지금 바로 가실 건 아니죠?”
태훈이 옷을 갈아입은 걸 본 알이 걱정스레 물었다.
“대관식에는 참석해야지.”
“아넬리아 공주님이 무척 섭섭해하겠네요.”
태훈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말이 좋다는 아넬리아는 매일 말을 타고 있었다.
아넬리아의 몸 상태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는 수준.
또래와 비교해서 조금 말랐다고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풍만함이 대우받는 이곳에서의 기준이었지 지구에서 보면 아주 건강한 여성이었다.
그런 아넬리아를 보며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더 이상 필요 없어.”
“네? 뭐라고 하셨죠?”
“으음, 아무것도 아니야. 일단 오늘은 외출할게. 좀 늦게 되면 잘 좀 둘러대 줘.”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 * *
산기슭에 나타난 그림자는 무언가를 찾는 듯 보였다.
겉보기에도 말라 보이는 듯한 체형을 가진 자는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한 곳에 멈추어 섰다.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주위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나타났다.
덩치가 오크보다도 큰 정령이었다.
정령은 땅을 파기 시작했고 이내 썩어 문드러진 시체가 나타났다.
“몰골을 보아하니 그 녀석이 맞군. 크크크크.”
남자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고는 구덩이로 내려갔다.
무언가를 찾는 듯 이리저리 시체를 뒤졌으나 원하는 것이 없는 듯 보였다.
“뭐야, 죽인 놈이 가져간 건가?”
웃음기가 사라진 말투로 말하던 남자는 따로 굴러다니는 남자의 목을 발로 건드렸다.
“흥, 인간 주제에 꼴값을 떨더니. 헌데 누가 그걸 가져간 거지? 설마 목표에게 당한 건가?”
남자는 품에서 야구공만 한 구슬을 꺼냈다.
태훈이 가져간 금속 팔과 같은 색을 내뿜는 물건이었다.
“일어나라.”
남자의 목소리에 구슬이 빛났다.
시체가 잠시 들썩였다.
그러곤 이내 잘린 목과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다시 한번 손짓을 하자 머리와 몸이 검은 불길에 휩싸였다.
시체를 집어삼킨 불길이 사라지자 새까만 해골만이 남았다.
그러곤 땅을 파던 정령을 해골과 융합시켰다.
머리와 몸이 붙더니 이내 뼈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번쩍였다.
까드드득-
이가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해골의 눈에 빛이 생겨났다.
“나쁘지 않군. 인정하긴 싫지만 오러를 다루던 놈이라 그런가.”
자신이 만든 언데드에 흡족한 남자가 물었다.
“널 죽인 놈을 기억하느냐?”
끄덕끄덕-
“그놈이 누구냐? 네 목표였던 놈에게 당한 것이냐?”
끄덕끄덕-
“흠, 그나저나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가져간 게 뭔지 알고 가져간 건가?”
남자는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놈의 임무는 둘째 치고 그건 회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잘못하면 나한테까지 불똥이 튈 거야.”
가면은 결심을 굳힌 듯 해골을 데리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는 것을 눈치챈 남자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방인의 출입이 거의 없는 한적한 산골마을에는 5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마을 밖의 밭에서 일하던 남자는 이방인을 보고 일하던 것을 멈추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이방인을 본 남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마을로 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마을 사람들 몇 명이 병장기를 들고 나타났다.
“흠? 자경단인가?”
가면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해치워.”
해골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자경단의 무기는 해골의 뼈를 자르기엔 너무도 무뎠다.
사람들의 살점을 물어뜯기 시작하자 피가 낭자하기 시작했다.
“으아악!”
“떠…… 떨어져! 우린 상대가 안 돼!”
마을 사람들의 살점을 물어뜯고 피를 뒤집어 쓸수록 해골의 푸른 기운은 강해졌다.
“오러를 다루던 놈이라 그런지 근접형 리치가 되는군. 크크큭.”
앙상한 뼈만 남아 있던 언데드는 점점 살아생전의 모습을 회복하고 있었다.
“응? 뭐야, 벌써 다 죽었어?”
이십여 구의 시체를 본 남자는 그 시체들에게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눈이 뒤집힌 채로 일어선 시체들은 리치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마을의 입구에 다다르자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언데드가 나타났다는 소리에 마을의 건장한 남자들은 무기를 들고 나왔다.
비명을 지른 건 그들의 가족이었다.
“여보!”
“아빠!”
언데드가 되어버린 자신의 가족을 본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다.
일부는 도망을 가고 일부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가족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아악!”
“아파! 아빠, 아파요!”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나마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일부 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빠져나갔다.
“크…… 큰일이다! 영주님께 알려야 해!”
“영주군은 무리다! 신관을 불러야 해!”
“중앙군 주둔지로 가자! 거긴 안전할 거야!”
사람들은 방목하고 있던 말 위에 올라탔다.
북부군 주둔지로 향하기로 한 사람들은 뒤에서 들리는 비명들을 뒤로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엇! 병사다!”
맨 앞에서 달리던 남자가 반색하며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도 먼 곳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병사들을 마주쳤다.
“천운이다! 이제 살았어!”
“엇, 잠깐만, 저건 우리 왕국군 병사가 아니야!”
그제야 사람들은 그들을 자세히 보았다.
그들은 다가오고 있던 것이 아니라 길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복장은 카나리스 왕국군 복장이 아닌 제노비아 왕국군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국경 근처에 살던 그들이었기에 한눈에 복장을 구별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말을 급히 멈추어야 했다.
그들 역시 초점 없는 눈으로 창백한 피부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