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날이 밝았을 때 신전은 중앙군에 의해 완전히 제압되어 있었다.
일반인들은 신전을 점거하고 있는 군대를 보며 대비되는 반응을 보였다.
이미 왕족과 마찰을 빚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거기다 총국이 빚을 빌미로 국왕을 압박하고 있었다는 것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이에 서민들은 대체로 꼴좋다며 총국을 조롱했고 부유층과 귀족들은 국왕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민심도 그렇고 대세가 국왕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로텐바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압 작전이 끝난 신전에 머물면서 태훈과 상의 중이었다.
작전의 성과가 좋았지만 가장 거대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집정관을 건드린 이상 중앙 총국과의 전면전은 불가피했다.
거기다 만약 배후에 제국이 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총국에서 간섭하기 전에 재판부터 열죠. 집정관이 가지고 있던 서류들이라면 그의 죄를 입증하기엔 충분합니다.”
집정관이 가지고 있던 서류는 부정부패의 증거들이었다.
공작과 밀거래를 한 정황은 물론 귀족이나 부유층으로부터 받은 부동산과 어음 등이 총 망라된 장부였다.
“하지만 공작이 죽었어. 서류들만으론 공작과 집정관이 모반을 획책했다는 증거가 될 순 없다.”
서류의 내용은 뇌물을 주고받았던 것만 증명할 뿐.
그것의 대가가 공작을 도와 모반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을 증명할 순 없었다.
로텐바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빈에게서 신전 아래에 수로와 이어진 비밀 통로를 알아낸 것은 제압 작전 직전.
말빈은 자신이 비밀 통로를 이용해 공작을 잡게 해달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제자를 죽인 자를 알아내 이미 살해한 뒤라 왕세자는 그의 증오심을 믿었다.
하지만 공작을 사로잡은 것이 아니라 살해하고 그대로 종적을 감추었다.
“내가 경솔했군. 그 녀석이 공작을 죽일 거라는 것을 간과했어.”
“저희에겐 공작 대신 증언을 할 사람이 하나 더 있잖습니까.”
“음, 그렇긴 하지…….”
로텐바르는 말끝을 흐렸다.
“내가 설득해 보겠다.”
“아니요, 형님은 여기 계십시오. 뒷정리도 하고 백성들에게 상황을 제대로 알려줄 고위 인사가 필요합니다.”
“……부탁하마.”
태훈은 왕궁으로 향했다.
그가 향한 곳은 왕궁 한쪽에 있던 별채.
누이인 아넬리아의 건강이 악화될 때마다 별도로 요양했던 곳이었다.
별채 주위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피나 왕비가 창가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풍만함을 넘어 비만이 미의 기준인 이곳에서 그녀는 처음보다 많이 야위어 있었다.
피나 왕비는 문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태훈을 보고는 다시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태훈은 의자를 하나 들어 그녀의 맞은편에 가져다 놓고는 그곳에 앉았다.
“소식 들으셨습니까?”
“…….”
“상황은 아시리라 믿고 말씀드리죠. 오후에 재판이 시작될 겁니다. 거기에 출석해 증인을 해주십시오.”
“할 말이 없으니 가시게.”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서 해달란 말이 아닙니다. 있었던 것을 그대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게 형님을 위한 길입니다.”
그 말에 피나 왕비는 고개를 돌려 태훈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로텐바르를 위한 거라고? 내 아비를 죽이고 그 협력자들을 제거하고서는 뭐라 지껄이는 것이냐.”
“신전의 제압은 로텐바르 형님이 꺼낸 제안입니다. 제가 주도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네가 로텐바르를 꼬드겨 할아버지를 제거하게 하고 주위에 네 평판을 올리려 한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왕비의 독설 섞인 이야기를 경청했다.
“계속하시죠.”
“어미를 가두게 하고. 자신의 할아버지를 죽이게 만들어 나라 안에서의 평판을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추후 네가 정권을 잡으려는 사전 준비가 아닌가. 난 거기에 협조할 생각은 없네.”
그녀의 말투는 예전과는 다르게 전혀 상관없는 자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흥분까지 했는지 얼굴도 상기되어 있는 그녀는 분노로 가득했다.
그는 왕비와의 골이 단순히 대화로는 풀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역시 거래를 해야겠군.’
태훈은 그녀의 화가 누그러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숨이 차분해지자 태훈은 입을 열었다.
피나 왕비의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놀람에서 의심으로.
그다음에는 태훈의 이야기에 신경을 쓰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그녀는 창가로 향했던 몸을 돌려 태훈과 마주 앉아 있었다.
“어떻습니까? 충분히 거래할 만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지?”
“어떻게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태훈은 되레 역설적으로 물었다.
“각서를 쓰라면 쓰고 혈서를 쓰라면 쓰겠습니다.”
“그런 종이는 찢어버리면 그만 아닌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태훈의 한마디가 다시 그녀를 돌아보게 했다.
“제가 형님을 설득하여 재판이 끝남과 동시에 대관식을 거행하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버님도 제가 설득하죠.”
“오늘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대관식 이후에 제가 말한 것을 바로 이행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하지만 그것도 말뿐이라면…….”
“저는 지금 어머님께 선택권을 드리는 겁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고르실지. 모두가 불행해 지는 방법을 고르실지는 어머님 몫이죠.”
“…….”
“어머님이 재판의 증인을 거부할 경우 제국이나 총국의 개입이 불가피해집니다. 그게 과연 형님이나 왕국을 위해 좋은 일일까요?”
“…….”
“어차피 어머님의 선택지는 제한적입니다. 이 거래를 받아들이시지 않는다면 모두가 불행해집니다. 그렇게 된다면 형님은 절망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겠죠.”
그 말을 끝으로 태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문에 다다랐을 때 그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매우 떨리고 있었다.
“정말……. 약속을 지킬 것인가?”
태훈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약속은 지킵니다. 어머님의 처우도 약속드리죠. 다시 예전의 지위로 돌아가실 겁니다.”
“그게 가능한가?”
“신관의 거짓 증언 탐지에 걸리지 않게 각본을 짜겠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제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
왕비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에게 태훈은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승낙하신 걸로 알죠.”
“…….”
“오후에 재판이 열릴 겁니다. 그 전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녀를 뒤로하고 태훈은 방을 나섰다.
별채를 나오고 나서야 태훈은 큰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그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따듯한 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고 저 멀리 아넬리아가 말 타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내 목적은 정해져 있었잖아. 오히려 내 결심을 실행하기에 좋은 기회다.’
그렇게 생각한 태훈은 이번에는 국왕의 방으로 향했다.
태훈은 왕비에게 했던 말 중 일부만을 국왕에게 전달했다.
국왕은 당연하다는 듯 거절했다.
“아직 내가 정정한데 대관식이라니! 무엇보다 후계자에 대해선 아직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
“지금은 국가의 안정이 우선입니다. 거리에선 백성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태훈은 국왕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다음 왕권에 대한 다툼이라는 것을 백성도 알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으음…….”
국왕은 신음을 흘렸다.
태훈이 태어난 뒤 왕세자의 교체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이 지금 상황의 발화점이 되었다.
하지만 로텐바르가 대관식을 올리게 되면 되돌리기가 힘들어 지는 것이 사실.
국왕이 선뜻 결정을 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자 그는 답답해했다.
“지금은 국난입니다. 귀족들이 갈라지고 민심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그 틈을 노리고 외적들이 이 나라를 넘보고 있고요.”
“로텐바르는 좋은 아이다. 하지만 그 아이가 다음 국왕이 된다 한들 이 사태가 쉽게 진정이 될 것 같지도 않다만.”
국왕을 비롯한 일부 세력이나 백성들이 전통성을 따지고 있었다.
그가 가진 마안.
그리고 쉽게 볼 수 없는 듀얼 적성.
국력이 쇠퇴한 만큼 옛 영광을 기억하는 백성이나 귀족들에게 그는 ‘정통성’을 갖춘 인물이었다.
“제가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형님의 대관식을 진행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태훈은 모든 것을 백지로 돌리겠다고 말했다.
제노비아와의 정략결혼은 물론 연합군의 창설 조약.
그리고 국가의 빚을 갚는 프로젝트와 약에 대한 개발을 모두 그만두겠다고 한 것.
협박에 가까운 발언이었지만 국왕은 별다른 반응 없이 듣고만 있었다.
국왕도 지금 상황에 지칠 대로 지쳐 버린 것이다.
“피나 왕비는 뭐라더냐.”
“제 조건에 승낙하셨습니다. 이제 아버님의 허락만이 남았습니다.”
“대관식을 올린다는 조건만으로는 왕비가 거래하지 않았을 텐데.”
“그건 걱정 마십시오.”
국왕은 태훈을 잠시 빤히 바라보았다.
“로텐바르는?”
“일전에 형님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형님도 동의하실 겁니다.”
“으음…….”
국왕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힘없이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모든 것을 진행하겠습니다.”
태훈은 큰 숙제를 풀어냈다는 느낌으로 방을 나왔다.
바로 로텐바르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협상이 예상보다 쉽게 끝났구나. 설득에는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는데.”
“모두가 지금 상황에 지친 듯했습니다. 그리고 대관식 말인데요. 총국도 참여를 시키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유는?”
“재판을 통해 총국 전체에게 책임을 씌울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 명분만으로 그 거대 세력을 누를 수는 없을 듯합니다.”
“집정관을 처단하는 선에서 끝내자?”
“일종의 거래죠.”
“그렇게 한들 제국과 아무드가 우리를 노리지 않을 보장이 없는데?”
그 말에 태훈은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자신이 카나리스에 귀환하자마자 바로 다음 날이 되어 도착한 글렌의 전갈이었다.
그것을 읽어 내려가던 로텐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그 주식회사인지 뭔지에 흥미가 있는 모양이구나.”
“공국으로서도 제국의 그늘 아래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는 없겠죠.”
“공국에서 자금의 흐름을 건드려 제국과 총국으로 향하는 자금줄을 흔든다는 거군.”
“그 상황에 아무드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는 전개는 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우리와 중립 노선을 펼치려 하겠죠.”
“타협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금 우리에겐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겠군.”
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탁탁-
로텐바르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치며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 이내 일어서며 말했다.
“네 말대로 가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테니 너도 움직여라.”
“알겠습니다.”
“메드니안.”
태훈이 만족해하며 등을 돌렸을 때 왕세자가 그를 불러 세웠다.
“하실 말씀이라도?”
“힘든 결정을 해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국왕의 자리를 포기한 것 말이다.”
그 말에 태훈은 피식 웃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국왕의 자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네 진심을 알았다. 너는 이 나라에 꼭 필요한 인재다.”
“전 제 위치에서 제 목적을 위해 일할 뿐입니다.”
“알겠다. 가보거라.”
태훈이 방을 나가자 로텐바르는 그가 나간 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곤 자신의 품 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그것을 잠시 만지작거리던 왕세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말해줘도 되는 것인가.”
그는 종이를 꽉 쥐더니 다시 품 안에 넣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집정관 다음으로 총국의 제 2인자가 참석한 재판이 열렸다.
피나 왕비는 그 자리에서 집정관과 공작이 메드니안의 암살 계획을 세웠다고 증언했다.
이단 심문관까지 동원되어 피나 왕비가 한 증언의 진실 여부를 판독했다.
실제로 집정관과 공작이 모략을 꾸민 사실이 있었기에 판독은 진실로 나왔다.
재판이 있기전, 로텐바르는 총국의 2인자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집정관과 공작의 선에서 끝내자는 제안에 총국은 응해왔다.
끄덕-
인단심문관은 로텐바르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공표되었다.
집정관과 공작.
그리고 일부 귀족들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이 났다는 소식에 백성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피나 왕비는 5년간의 유배 생활형을 받았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판결이었기에 왕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수도를 떠나기 전 태훈과 눈을 마주쳤다.
태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왕비는 말없이 왕성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