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어허, 이 야심한 시각에 건장한 놈들이 아녀자를 핍박하다니!”
목소리의 진원지는 로우의 뒤쪽이었다.
로우가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글렌 의원이 있었다.
“글렌?”
“글렌 의원님이라고 불러라. 이망나니 같은 녀석아.”
“흥, 거렁뱅이 시절은 다 잊었나보지?”
그러자 글렌은 쯧쯧거리며 혀를 찼다.
“그게 너와 나의 차이점이다. 네가 아직까지 밑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뭔 줄 알아?”
“그딴 건 관심없어. 너나 나나 더럽게 돈을 버는 건 마찬가지잖아.”
둘은 꽤 오랜 안면이 있는 듯한 말투로 대화했다.
글렌 의원이라는 말을 들은 크리스는 귀가 움찔거렸다.
‘글렌?’
크리스의 눈이 밤하늘의 별만큼 초롱초롱해지며 로우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았다.
‘틀림없어, 글렌 의원이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의 말투는 점점 험악해지고 있었다.
“그 아이는 내가 찾고 있는 녀석이다. 너는 이만 물러가.”
“지금이 벌건 대낮인 줄 알아? 여기가 어딘지 알고 까부는 거냐?”
그 말에 크리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부신 무역 도시였지만 그늘은 존재했다.
밤이되면 순찰조차 돌지 않는 뒷골목.
하루도 빠짐없이 빚쟁이들이 시체로 발견되는 그런 곳이었다.
자신도 발을 들여놓지 않던 곳이었다.
“이곳 출신인 내가 혼자 왔다고 생각하나?”
글렌이 손짓하자 건장한 청년들이 나타났다.
글렌의 저택에서 일하고 있는 하인들이었다.
숫자는 로우 일당보다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어르신, 어쩔까요?”
수적 열세에 놓이게 되자 로우의 부하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셈에 밝은 그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글렌, 조만간 두고보자고.”
“멀리 안 가네.”
로우가 부하들을 이끌고 사라지자 크리스는 글렌에게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글렌 위원님! 존경하는 분에게 도움을 받다니!”
“날 아는가?”
“그럼요, 맨손으로 시작해서 공국 재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든 분이시잖아요! 그리고 최연소 의원까지!”
“흠흠, 나에 대해 잘 아는구만?”
글렌은 멋쩍은지 수염을 만지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요, 의원님은 제 롤모델인걸요!”
“롤모델?”
“저도 부자가 될 거예요!”
크리스의 말에 글렌은 수염을 만지던 손을 멈추었다.
“부자? 아가씨는 왜 돈을 벌려고 하는 거지?”
“제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어서요. 그러려면 돈이 엄청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도박판에 뛰어든 것인가?”
“네, 그렇습니다.”
자신에 찬 그녀의 대답에 글렌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곤 이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도 돈을 벌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네. 노역은 물론이고 손을 대지 않은 장사판도 없었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도박에는 손을 대지 않았네. 자네도 성공을 위해서라면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거야. 이건 충고네.”
“…….”
“그보다 혼자인가?”
글렌은 젊은 남자를 보지 못했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들은 크리스는 조금 전 자신이 따돌린 남자를 떠올렸다.
“젊은 남자? 혹시 양쪽 눈 색이 다른 남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네. 내 손녀사위인데. 혹시 보았는가?”
“소…… 손녀사위요?”
크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낭심을 걷어찬 뒤 버리고 왔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 그게…….”
그때 글렌의 뒤로 태훈이 나타났다.
“엇, 의원님께서 붙잡으셨군요.”
“자넨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나는 건가?”
“저 녀석이 절 걷…….”
그녀는 재빨리 태훈에게 달려가서 그에게 달라붙으며 말했다.
“아하! 이분이 손녀사위셨구나! 길에서 마주쳤는데 나쁜 사람인 줄 알고 도망쳤어요!”
태훈은 그녀의 눈에서 무언의 협박을 느꼈다.
글렌은 저택으로 돌아가자며 주위를 물렸다.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는 크리스는 자신도 같이 가냐며 물었다.
“그럼 같이 가야지. 널 찾으러 멀리서 왔는데.”
“아까 카나리스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어? 설마 아버지가 보내서 온거야?”
“널 데려오라는 말은 없었다. 내가 널 필요로 하니까 데리러 온 것뿐이야.”
“나를?”
“우선 따라와. 난 여기서 눈에 띄면 안 돼.”
저택으로 돌아오자 글렌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단둘이 남게 된 태훈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가 제 3왕자라는 것을 안 크리스는 입을 벌렸다.
“3왕자가 왜 나…… 아니, 저를?”
“연금술에 관한 책들. 지금 어딨어?”
“그건 왜 찾으시죠?”
“그것 때문에 온 거야. 자료만 찾으면 볼일 없어.”
“그건 없어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의 대답에 태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없어?! 설마 팔았나?!”
“아뇨, 땔감으로 썼는데요.”
“뭐?!”
이번엔 태훈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땔감? 태웠단 말이야?”
“네, 여기 겨울은 카나리스보다 춥더라고요.”
“제정신이야?! 국가 예산으로 만든 책을 태웠다고?”
“이미 버린 학문이잖아요. 뭘 그렇게 정색을…….”
“하아?!”
털썩-
태훈은 놀라 일어났다가 주저앉았다.
먼 길을 달려온 결과가 허탕이라는 충격이 컸다.
“나…… 남은 건? 남은 건 있겠지?”
“아마도 없을걸요?”
그녀의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태훈은 하마터면 그녀를 때릴 뻔했다.
‘이렇게 되면 시간이 지체될 수 밖에 없는데.’
머리를 쥐어싸며 실의에 빠진 태훈을 본 크리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게 왜 필요한데요?”
“말 걸지 마. 너 때문에 내 계획이 늦어지게 생겼어.”
“책에 대한 내용이라면 남겨뒀어요.”
“뭐야?! 그게 정말이냐?!”
그는 벌떡 일어서며 크리스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따로 적어둔 거냐?”
“책도 땔감으로 썼는데 적어둘 양피지나 책이 있었겠어요?”
“그럼 어디에 있다는 거야? 벽에 새겨두기라도 한 거야?”
“새기긴 했죠. 여기에.”
크리스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기억한다고? 그 전부를?”
“못할 건 뭐예요? 어릴 때부터 봤던 건데.”
“자료의 양이 상당했을 텐데?”
“책으로 11권. 56만 자 조금 넘고요. 양피지로는 일곱 개. 3만자 조금 안되죠.”
“그걸 빠짐없이 기억한다고?”
끄덕끄덕.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안은 천재 집안인가?’
그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서 내용을 다시 받아내기만 하면 되었다.
‘아니야,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않나?’
그는 다시 머리를 굴렸다.
애당초 계획은 은을 마련한 다음 그것을 이용해 제국의 은화를 만들 생각이었다.
쉽게 말해 위조화폐를 만들어 낸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주화 제조 기술은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주화의 성분은 국가 기밀.
당사국이 아닌 이상 세밀한 성분들을 정확하게 맞출 만한 기술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라면 가능했다.
‘카나리스에서 위조에서 유통까지 하면 제국의 의심을 살 수도 있어. 하지만 여기서라면?’
그는 대륙의 모든 자금 흐름이 거쳐 지나가는 곳에 있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이 좋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거기다 이 녀석도 보통 녀석이 아니야.’
굳이 자료를 만들어 정보 유출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눈앞에 적임자가 있었다.
“너, 나랑 일해보지 않을래?”
“무슨 일이요?”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전적으로 지원해 주지. 원한다면 내 권한으로 남작 정도의 직위도 약속할 수 있다.”
태훈의 말에 그녀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저는 하고 싶은 일이…….”
“백작에게서 들었다. 연금술을 이용해 총국이나 상아탑 정도의 권위를 가지고 싶다며?”
“할아버지가 그런 것도 말하던가요?”
“그 소원 내가 이뤄주마. 보아하니 도박판에 뛰어든 것도 자본금을 만들려고 한 것 아니야?”
“…….”
핵심을 짚는 말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도박에서 번 돈을 통해 자신만의 연구실을 지을 생각이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야. 내 일에 협력한다면 내가 나중에 네 시설을 세울 때 자본금을 내어주지.”
“음…….”
갑작스러운 제안에 크리스는 망설였다.
공국에서 몇 달을 굴러먹으며 돈은 제법 벌었지만 자신이 목표로 세운 금액에는 한참 모자랐다.
그녀의 동공이 빠르게 움직였다.
크리스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안 태훈은 쐐기를 박았다.
태훈에게는 뮤즈가 가져온 대금화 3천 닢이라는 자본이 있었다.
“내 프로젝트를 완성시키면 사례금으로 대금화 천 닢을 주겠다!”
“처…… 천 닢!?”
“물론 세레니스 제국의 대금화다. 하늘에 걸고 맹세하지.”
금액을 듣고 난 크리스의 눈이 커졌다.
“무엇부터 하면 됩니까, 형님!”
“혀…… 형님?”
“아, 도박판에선 자주 쓰는 용어라 그만, 죄송합니다. 왕자님.”
크리스의 말투는 달라져 있었다.
‘돈이면 성격도 바뀌는 건가.’
태훈은 결과에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그녀에게 연은분리법의 골자를 설명하면 충분히 일을 해낼 수 있어 보였다.
거기에 그녀가 이곳에서 자리잡으면 약을 제조할 수 있는 공방도 충분히 마련할 수 있었다.
크리스에게 비밀 엄수를 당부한 태훈은 글렌를 찾아갔다.
그러곤 그에게 대출을 부탁했다.
“대출? 왕자가 나에게 부탁을 할 정도로 카나리스의 사정이 그리 심각한 건가?”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지금 당장 들고 온 것이 없기에 부탁드리는 겁니다. 물론 이자는 후하게 쳐드리지요.”
동시에 태훈은 비밀리에 활용할 만한 공방의 유무를 물었다.
“공방이라. 무슨 공방을 원하는 거지?”
“유리 공방은 있습니까?”
“유리 공방이라.”
연은분리법은 녹는점을 이용한 은의 추출법.
먼저 불을 이용할 수 있어야 했다.
거기에 약 제조에 필요한 도구나 약을 담을 용기까지 만들 필요가 있었다.
“아마 쉽게 찾을 수 있을걸세. 대출은 그걸 구입하기 위함인가?”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초기 투자 자금입니다.”
“뭘 하려는 건지 말해줄 수 있는가?”
“일단 약을 만드는 기반 시설을 만들려고 합니다.”
“거기에 방금 데리고 온 처자가 필요한 건가?”
“아주 상관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글렌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태훈에게 액수를 물었다.
“우선 제국 대금화로 2천 닢입니다.”
“단순한 공방에 들어가는 액수는 아닌 것 같은데. 약 말고 다른 뭔가가 있군?”
“그것은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흠, 뭐 좋네. 빌려주지. 다만 이자는 좀 높을 걸세.”
“두어달 내로 바로 갚겠습니다. 이율은 1할이면 어떻습니까?”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에 글렌은 만족한 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밑자본까지 해결한 태훈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닫자 부르지도 않았는데 뮤즈가 나타났다.
“뭐야? 부르지 않았는데?”
“주인님하고 저 사이에 그런 건 상관없잖아요.”
그는 다가오는 그녀의 머리를 지그시 누르며 밀쳤다.
‘그래도 이번에 큰 걸 해결했어. 그것만은 희소식인가?’
그리고 지친 몸을 뉘었을 때 그녀가 따라 누웠다.
“우리 소중이는 괜찮아요?”
“어허! 어딜 만져! 그리고 소중이라니,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주인님 기억 중에 있던데요?”
태훈은 급히 그녀를 발로 밀어냈다.
사실 뮤즈는 자신이 환생한 후 만난 여성 중에 가장 지구의 미형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에게는 벽이 생겼다.
‘뮤즈가 매력적인 건 맞는데 뭔가 조금 꺼려지네.’
“아까 그 계집애가 주인님의 소중이를 걷어찼을 때 진짜 간신히 참았다고요.”
“내 소중이랑 너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리고 그 녀석은 건들지마.”
“뭐예요? 저보다 그 녀석을 아끼시는 거예요? 오늘 처음 봤는데?”
“그 녀석은 나 대신 해야 할 일이 많아. 앞으로의 계획에 핵심적인 인물이야.”
“그래도 그렇지 우리 소중이를 어떻게…….”
“어허! 자꾸 어딜 만져! 그리고 소중이란 말 좀 쓰지 마! 닭살 돋아!”
뮤즈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뮤즈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이 시간에 누구지?’
태훈이 문을 열자 도리아 공주의 얼굴이 보였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일은 잘 풀리셨는지 궁금해서…….”
그녀는 태훈을 보자 머뭇거렸다.
잠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본 태훈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을 위해 단신으로 이곳까지 달려와 준 것.
크리스를 찾게 사람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자 그녀도 같이 글렌에게 부탁을 청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깐 잊고 있었네. 너무 소홀했어.’
태훈은 그녀를 향해 싱긋 웃고는 손을 내밀었다.
“늦었지만 차라도 한잔하실래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