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달이 뜬 밤.
자유 무역 도시의 밤은 낮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법을 위배하기는 해도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도시의 밤은 고삐가 풀린 모습이었다.
그중 홍등가 옆에 위치한 술집 골목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모인다.
허름한 옷의 사람도 있었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사람도 모이는 경계가 없는 거리.
대부분의 술집 지하에서는 노름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중 가장 인지도 있는 노름은 야바위와 카드.
한 카드 테이블에 후드를 눌러쓴 인물이 다가갔다.
“엇? 크리스? 오랜만이야.”
“안녕. 달롯.”
후드를 눌러쓴 인물은 여성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달롯이라는 딜러와 인사를 한 후드의 여성은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린 듯 옆의 테이블에서 남자 둘이 다가왔다.
“네가 크리스냐?”
“그러는 댁은 누구신데 반말인지?”
“건방진 년이구만.”
남자들 중 하나가 후드를 벗겼다.
그러자 금발의 단발머리가 드러났다.
“호오, 반반하지는 않지만 귀여운데?”
“닥쳐. 시비 거는 이유가 뭐야?”
“우리 주인님께서 너 좀 보자신다.”
크리스는 그제야 옆 테이블에 앉은 주인이라는 자를 확인했다.
콧수염을 기른 뚱뚱한 노인이었다.
노인이 다가오며 크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네가 크리스냐?”
“그러는 댁은 누군데?”
“내 이름은 로우다. 이 바닥에서 내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텐데?”
“로우?”
크리스가 모르는 듯 달롯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달롯은 그녀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크리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 그 로우?”
“훗, 그래 내가 로우다.”
“호오, 노름판의 제왕이라는 그 로우다 이 말이지?”
크리스가 재미있어하는 눈빛을 하자 노인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감히 내 이름을 듣고도 웃어?”
“노름판의 제왕이 나를 보자고 한다는 건 한번 해보자는 거 아니야? 제왕이면 돈도 많이 있겠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크리스의 당돌함에 노인은 헛웃음을 흘렸다.
노인이 손짓하자 두 남자가 커다란 주머니 4개를 탁자 위에 올려다 놓았다.
“몇 달 전부터 노름판을 휩쓴다는 겁 없는 계집이 네가 맞구나.”
“겁이 없는 게 아니라 자신이 있는 거지. 한판 붙어보자고 찾아온 거면 앉아.”
전혀 밀리는 기색 없이 당돌하게 말하는 크리스를 보며 로우는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 젊었을 적의 나를 보는 것 같구만. 그렇지, 노름꾼이라면 자고로 기세에서 밀리면 안 되지.”
“그런 형편없는 낯짝이랑 나를 비교하면 안 되지.”
“흥, 그놈의 주둥아리가 언제까지 나불대는지 지켜봐 주지.”
노인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야야, 로우가 나타났대.”
“크리스와 한판 붙는다는데?”
“이런 빅 이벤트를 놓칠 수는 없지.”
지하에 있던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골목에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노름판의 전설과 신흥 강자가 맞붙는 말에 술집은 인산인해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래, 게임은 뭘로?”
크리스가 여유 있게 선택권을 주자 노인은 되레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선택권을 넘겨받자 크리스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하로우로 하지.”
하로우는 딜러가 카드를 늘어뜨려 놓으면 그중에서 3장의 카드를 짚는 방식이었다.
3장의 숫자 합이 높은 쪽이 이기는 간단한 게임이었다.
카드는 1에서 20까지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달롯이 카드를 늘어놓자 크리스가 선공으로 카드를 집었다.
그다음은 로우가 집는 식으로 서로 교차하면서 3장의 카드를 집는 방식이었다.
“돈은 있나?”
노인의 물음에 크리스는 품에서 자루 하나를 꺼냈다.
로우가 가져온 4개의 자루에 비해 턱없이 작은 양이었다.
“겨우 그걸로?”
“전부 제국 금화로 50닢. 이거면 충분해.”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군.”
노인은 카드를 하나 뽑았다.
이로써 서로가 하나씩을 뽑은 셈이었다.
“1닢.”
먼저 카드를 뽑았던 크리스가 금화 하나를 던졌다.
“1닢 받고 1닢 더.”
로우가 응수했다.
두 번째 카드를 뽑은 크리스가 말했다.
“3닢.”
“3닢 받고 3닢 더.”
금액이 점점 올라가자 주위의 잡음이 사라졌다.
보통 은화와 동화가 오고 가는 판에서 세레니스 제국의 금화가 나오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로우가 의미심장하게 웃자 크리스가 카드를 던졌다.
“죽어.”
“로우 승.”
금화들이 로우에게로 밀어졌다.
그 후 크리스는 연이어 7번을 패배하거나 게임을 포기했다.
“크리스가 7연패라니.”
“크윽. 크리스한테 걸었는데!”
“역시 로우야. 왕년의 실력은 여전해!”
사람들은 둘의 승부에 도박을 하고 있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금화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크리스를 보며 로우가 비웃었다.
“그 금화를 다 잃으면 뭘 걸 건가?”
“남이사 알거지가 되든 말든. 노름판의 제왕이 사람 좋은 줄은 몰랐는데?”
“마지막 판에 네년 주둥이를 걸어라.”
“기대할게.”
크리스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판부터 형세는 바뀌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베팅을 하는 모습에 로우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패가 공개되며 로우가 크게 잃자 주위에서 수군거렸다.
“이번엔 운이 좋았군.”
“고마워. 져준 건가?”
“애송이 주제에.”
자신을 비웃는 말에도 로우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이어 이어지는 판들에서도 로우는 패배했다.
단 세 판 만에 가지고 있던 금화 이상을 번 크리스의 표정은 밝아졌다.
‘괜찮아, 아직 판돈은 많아. 노름은 기세와 판돈이야.’
하지만 연이어 공개되는 판에서 공개되는 크리스의 패는 로우를 웃돌았다.
거기에 점점 크리스의 패가 점점 높아지면서 로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16, 18, 19. 크리스 승.”
쾅!
13번째 판에서 크리스의 패가 공개되자 로우가 노름판을 내려쳤다.
“이건 사기다!”
“어머, 노름판의 제왕께서 많이 놀라셨나 봐요?”
“이런 사기꾼 녀석이!”
“증거 있어?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
“어떻게 네 판 연속 같은 숫자만 나올 수 있는 거냐?”
“내가 카드에 이상한 짓이라도 했을까봐? 억울하면 살펴보던가.”
로우는 카드를 살폈다.
표식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접히거나 문양 패턴이 다른 것도 아니었다.
“크윽!”
“어떻게. 더하실래요? 전설 나으리?”
“이년이…….”
“저…… 나리. 더 이상…….”
따라온 두 남성이 조심스럽게 로우를 말렸다.
이미 4개의 자루는 텅텅 비어 있었고 크리스 앞에는 금화와 은화가 쌓여 있었다.
씩씩거리던 로우는 두고 보자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오예! 크리스가 이겼다!”
“로우한테 걸었던 놈들 돈 가져와! 내빼면 죽는다!”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동안 크리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돈을 자루에 담았다.
혼자 들기도 버거워 보이는 돈 자루를 들고는 달롯에게 팁을 쥐어주고 노름판을 나왔다.
“흐흐, 오늘도 한 건 했구나. 이거면 내 목표에도 한걸음 가까워졌어.”
콧노래를 부르며 걷던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크리스는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뭐야? 네 놈은?”
짝짝짝-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손뼉을 쳤다.
“대단해, 그걸 도박판에서 쓸 줄이야.”
“뭐, 뭐야. 네놈은? 로우의 부하냐?”
“아까 너랑 도박한 사람? 아니야, 난 그저 네 행동을 감명 깊게 본 관객이지.”
“그, 그래? 너도 나한테 걸었나보지?”
“아쉽지만 돈을 걸진 않았어. 돈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런 푼돈은 도움이 되지 않거든.”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하자 크리스는 한 발짝 물러섰다.
그녀의 본능이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었다.
“볼일 없으면 꺼져.”
“아, 볼일은 있어. 나랑도 한판 하지 않을래?”
“뭐? 오늘은 충분히 벌었어. 다른 날 찾아와.”
그러자 남자는 대답 대신 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크리스에게 던졌다.
떨어진 봉투를 집어 안의 내용물을 본 크리스는 깜짝 놀랐다.
안에는 유명 상회의 어음이 들어있었다.
“100닢짜리 어음이야. 날 이기면 그걸 주지.”
“한판에 100닢이라고?”
크리스의 동공이 흔들렸다.
지금 자신이 가진 돈도 충분히 그만한 액수였고 그녀의 전 재산이었다.
‘두 배로 불릴 수 있어.’
욕심이 그녀의 경계심을 느슨하게 했다.
“넌 뭐 하는 놈인데?”
“신흥 강자한테 도전하는 사람? 정도로 봐주면 좋겠는데.”
“흥, 두말하기 없기다.”
크리스는 발로 근처의 상자를 자신의 앞으로 끌었다.
그리곤 그 앞에 주저앉았고 남자도 상자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카드는 내 걸 써도 되겠어?”
“물론.”
크리스는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카드를 꺼냈다.
“종목은?”
“하로우.”
남자의 대답에 크리스는 카드를 깔았다.
그리곤 남자에게 선수를 양보했다.
한판에 모든 걸 건 싸움이었기에 콜이나 레이스는 없었다.
남자가 첫 장을 고심하며 고르자 크리스의 안색이 급변했다.
‘아니야, 우연일거야. 저놈은 그것도 없잖아.’
크리스는 숨을 가다듬고 자신의 패를 골랐다.
두 번째 순서에서 남자의 선택에 크리스의 안색은 흙빛이 되었다.
그리곤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너, 뭐...뭐하는 놈이야!”
“역시 그랬구나. 이걸 여기다 써먹을 줄은 몰랐는데?”
남자는 카드를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카드마다 은의 함유량을 달리 넣었구나.”
“뭐 하는 놈이냐니까!”
남자는 대답 대신 순식간에 크리스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등불 아래 남자의 얼굴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반지. 원석을 가공해서 만든 거지?”
“이거 놔!”
크리스는 손을 빼려고 했지만 남자의 악력이 워낙 강해 도리어 끌려갔다.
“맞네, 원석.”
크리스가 카드를 집었던 오른손의 엄지와 중지에는 원석으로 만든 반지가 있었다.
남자는 노름판에서 높은 숫자를 뽑는 그녀가 신기했다.
분명 속임수라고 생각하고 그 원리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다 그녀의 손가락에 있는 두 개의 반지에서 미약한 마나의 반응을 느꼈다.
그 성질을 파악한 남자는 단번에 원리를 알아챘다.
“높은 카드일수록 은이 더 많이 함유된 잉크를 썼어. 20은 문양 자체를 은으로 했네? 상당한 투자야.”
“…….”
“그리고 엄지와 중지로 카드의 위와 아래를 잡고 전격 마법을 흘린다. 은의 함유랑이 높을수록 손가락에 전달되는 느낌이 다르지. 하지만 미세할 텐데 아주 훈련을 많이 했어.”
“네, 네놈은 누구야.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설마 마법사냐?”
“그러는 넌 마법사도 아닌데 어떻게 원석과 마나를 다루는 거지?”
퍼억-!
“허억!”
크리스는 남자의 급소를 걷어차며 떨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급소 공격에 방심한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쳇!”
자신의 모든 것이 탄로 나자 크리스는 급히 등을 돌렸다.
그러다 뭔가가 생각난 듯 뒤로 돌아서더니 카드와 어음을 챙겼다.
“기…… 기다려…….”
낭심을 붙잡고 고개를 숙인 남자는 그녀의 옷자락을 잡았다.
“이거 놔!”
“놓을 거면 불러 세우지도 않았지!”
“한 대 더 차줄까? 엉? 앞으로 앉아서 오줌 싸게 해줘?!”
“이, 이 자식이…….”
거침없는 말빨에 남자가 당황했지만 옷자락을 놓지는 않았다.
“난 너를 만나려고 카나리스에서 왔다고!”
“카나리스? 설마 아버지가?”
“그래, 백작이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알려줘서 왔다. 나는 카나리스의 제삼…….”
퍼억!
돈이 든 주머니에 얼굴을 정면으로 맞은 남자는 코뼈가 주저앉으며 뒤로 넘어갔다.
남자가 넘어가는 것을 본 크리스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젠장, 벌써 찾으러 올 줄은 몰랐는데! 아직 돌아갈 순 없어!’
크리스는 골목골목을 돌아 남자를 따돌리려 애를 썼다.
한참 후 숨을 돌리던 크리스는 더 이상 남자가 보이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
“따돌렸나? 끈질긴 녀석이네.”
자신이 달려온 길을 보며 숨을 몰아쉬던 크리스는 후드의 모자를 눌러썼다.
“조심해야겠어. 벌써 사람을 보낼 줄이야.”
“그래, 조심해야지, 아가씨.”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번개같이 뒤를 돌아본 크리스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조금 전 노름으로 이겼던 로우와 그의 부하였다.
“아가씨, 밤길은 조심해야지.”
“뭐야, 오늘은 볼일 없어.”
“난 있어. 그냥 가면 섭섭하지.”
크리스는 도망치려 했지만 반대편에도 어느새 남자 둘이 서 있었다.
“뭐야, 남자가 돈 잃고 쩨쩨하게 구는 거야?”
“돈? 돈은 아무래도 좋아.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어디 가서 떠드는 취미는 없어. 그러니 보내줘.”
“얘들아, 숙녀분 안 다치게 조심조심 만져 드려라.”
다가오는 남자들을 보며 크리스는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