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히스렐라 공국.
100여 년 전엔 작은 왕국의 수도였던 이곳은 연금술의 흥행으로 번창했다.
하지만 연금술이 몰락으로 이어지면서 왕국이 세레니스 제국에 합병되었다.
그 후 거대 상단이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고 제국으로부터 도시를 양도 받아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지금에 와서는 히스렐라라는 이름으로 공국을 세우고 자유도시의 입지를 얻게 되었다.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귀족이나 왕족이 없고 오로지 공국을 유지하는 77인의 의회가 존재했다.
일반적인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곳으로 법이나 체계가 지구의 자유 무역 도시와 비슷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도리아 공주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예정보다 늦어진 후였다.
외할아버지가 77의회 소속이었기에 그는 도시에서 가장 큰 저택으로 향했다.
“오오오, 도리아!”
글렌 의원은 자신의 손녀를 보자 기쁜 얼굴로 달려왔다.
키가 작고 산타처럼 흰 수염이 부채 같이 자라 있는 노인이었다.
자신의 손녀를 와락 껴안고는 볼에 입맞춤을 해댔다.
“할아버님! 체통 좀 지키세요!”
“여긴 그런 거 안 따진다! 어디 보자, 그간 잘 컸느냐!”
의원의 표정이 음흉하게 바뀌며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으로 향했다.
퍽!
“으헉!”
무게가 실린 그녀의 펀치에 글렌 의원의 목이 돌아갔다.
“이 호색한 노인네!”
“으허헉! 우리 손녀 손맛이 여전하구나!”
“아, 좀 떨어지세요!”
“이게 얼마 만이냐!”
5년 만에 자신의 손녀를 본 글렌 의원의 입가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글렌 의원에게는 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도리아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그는 딸바보였다.
“라플레르는 잘 있느냐?”
“아주 잘 계십니다. 지병이셨던 몸살도 나으신 것 같습니다.”
“뭐라? 그것이 정말이냐?”
글렌은 화들짝 놀랐다.
출산 후부터 잦은 몸살을 앓아왔다는 사실을 잘 알던 터였다.
“그것 참 다행이구나. 신관들도 포기하지 않았더냐.”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카나리스의 왕자 일 말이냐?”
“아니,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도리아 공주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글렌 의원은 자신의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정보는 곧 돈이다. 하물며 손녀의 혼사 이야기가 나오는 곳인데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지.”
그 말에 도리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를 것 같군요. 총국을 압박하는 데 도움을 주십시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글렌 의원은 도리아에게 양피지 하나를 내밀었다.
양피지의 글을 읽어 내려가던 도리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게 정말입니까? 왕자님의 재판이 무기한 연장되었다는 것이?”
글렌은 아무 말 없이 끝까지 더 읽어보라는 듯한 턱짓을 해보였다.
마저 읽어 내려가던 도리아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총국이 빚을 되돌려 받으려 한다고요?”
“카나리스는 600만 닢의 채무를 지고 있다. 우리가 추정하기에 카나리스 3년 치 세수야.”
“카나리스가 돈을 내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돈이 될 만한 건 전부 가져가겠지. 아마도 채굴권과 토지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채굴권…….”
도리아의 말끝이 흐려졌다.
‘채굴권이 사라진다면 혼약도 파기될 가능성이 높아.’
“혹시 공국에서 채굴권을 담보로 대출이 가능합니까?”
“대출? 카나리스에게?”
글렌 의원은 꽤나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렇습니다. 채굴권에 그만한 가치는 있지 않습니까?”
“그 이야기는 대체 누구 입에서 나온 이야기냐? 네가 3왕자와 혼약을 했다는 이야기는 진즉에 들었다. 카나리스에서 너에게 부탁을 한 것이냐?”
“아닙니다. 그것은 제 독단…….”
“어허, 이런 어리석은 것!”
탕-
조금 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진 글렌 의원은 의자의 팔걸이를 내려쳤다.
“이 문제는 제3국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야. 네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만 그 정도 사리분별은 할 줄 알았다.”
“……방금 그 이야기는 잊어주십시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당황했는지 도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자신이 가져온 가방을 글렌의 앞에 내놓았다.
“사실 오늘은 이것 때문에 온 것입니다.”
“이게 무엇이냐?”
“약입니다.”
“약?”
도리아 공주는 약에 대한 사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을 때 글렌은 약병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것에 그 정도의 효과가 있다고?”
“이미 아넬리아 공주의 병이 호전되었고 어머니의 병세도 누그러졌습니다. 틀림없이 그 정도의 가치는 있어 보입니다.”
“흠…….”
글렌 의원은 고민했다.
신빙성 있는 정보를 갖추었지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애당초 총국의 뒤에는 세레니스 제국이 있었다.
총본부가 제국에 있었고 총국은 많은 세금을 제국 황실에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
“쉬운 문제가 아니다. 네가 요구하는 건 제국과도 등을 지는 일이야. 아시다시피 우리 공국은 무역…….”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국이 총국을 대신하는 건 어떻습니까?”
“우리가 총국을 대체한다고?”
“이 약은 포션보다는 인지도가 좋을 겁니다. 박리다매로 인해 벌어들이는 금액 또한 포션에 뒤처지지 않을 것이고요.”
“우리가 총국을 대체한다? 음…….”
글렌 의원의 시선이 약병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 문제는 나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다.”
“알고 있습니다. 최고평의회에 안건으로만 올려주십시오.”
“네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 남자와는 아직 혼약 단계이지 식을 올린 것은 아닐 텐데.”
글렌의 질문에 도리아의 얼굴에 홍조기가 돌았다.
“사, 사사로운 감정은 아닙니다. 카나리스와는 군사 조약을 맺은 우방국입니다. 카나리스에 빚을 지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뭐 좋다. 일단 안건으로는 올려보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글렌 의원은 바로 다음날 최고평의회의 정기 회의에 출석했다.
최고평의회 의장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번 주에 이어서 오늘도 같은 안건으로 회의를 하겠소.”
같은 안건이라는 것은 세레니스 제국이 요구하는 상납금 인상안이었다.
세레니스 제국에게는 보호비 명목으로 상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있었다.
실제로 도시 곳곳에는 제국의 복장을 한 병사들이 순찰을 도는 실정이었다.
한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증액 요구는 들어줘야 합니다. 당장 세레니스 제국이 아니면 도시의 치안이 엉망이 됩니다.”
“맞습니다. 제국과의 신뢰 관계가 있는데 돈 때문에 사이가 틀어져서는 안 되지요.”
몇몇 의원들이 증액안을 두둔하고 나서자 중년의 부인이 거수하며 반대했다.
“지금 상납하고 있는 금액도 상당합니다. 연간 200만 닢이면 1급 용병 4천 명을 고용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제국이 보내준 치안군의 수는 고작 천 명. 이미 넘쳐나는 금액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신뢰 관계는 금액으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오. 그 금액에는 세레니스 제국의 이름값이 들어가 있소. 그 덕분에 공국이 유지된다는 것을 모르오?”
의원들의 대립이 이어졌다.
증액안에 대한 회의는 벌써 한 달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마다 의원들은 둘로 나뉘어져 대립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렌 의원은 지칠 대로 지친 표정으로 그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도 결정 나기엔 글렀구만.’
의장은 자신의 권한으로 안건을 표결에 부쳤었다.
하지만 아주 우연히도 자신을 제외한 76명의 의원이 38대 38로 갈려 있었던 것.
의장은 중립적인 위치에 있어야 하는 규정 때문에 투표 권한이 없었다.
다시 한번 표결에 붙일까 하는 생각에 들던 터에 조용히 손을 든 의원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글렌 의원? 할 말이 있는가?”
“네, 의장님. 저는 증액 요구의 원인부터 살펴야 한다고 봅니다.”
“원인? 의원은 그 원인을 알고 있다는 것이오? 그렇다면 말해보시오.”
“제국은 전쟁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
축 늘어져 있던 의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다른 의원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제 담당은 곡물입니다. 그래서 곡물의 수출입량을 조사해 봤습니다.”
글렌 의원은 제국의 곡물 수확량이 전년보다 늘었다는 것.
그리고 다른 국가들은 재작년보다 곡물 수확량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수확량이 늘었음에도 세레니스는 수출량을 줄였습니다. 이것은 군량미를 마련하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얼마나 줄었는가?”
“예년의 수출량보다 30%나 줄었습니다. 덕분에 곡물의 가격이 많이 올랐습니다.”
“단순한 곡물 저장이 아니라는 건가?”
“총국에게도 상납액을 올렸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돈과 식량. 둘 중 하나라면 단순한 축적의 의미를 둘 수 있지만 둘 다라면 이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음…….”
의장은 깊은 신음을 내쉬었다.
제국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무역을 하는 공국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전쟁의 낙수 효과를 톡톡히 보는 것은 무역도시인 공국이었다.
다만 가장 걸리는 것은 누구와 전쟁을 하냐는 것과 그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냐는 것이었다.
한쪽이 패배하여 나라가 합병되면 그 왕국과의 기존 거래가 백지화된다.
즉, 기존에 구축해 놓았던 계약과 인프라가 사라지는 것.
그러면 제국과 다시 협상을 해야 했고 특정 특산물이 있다면 독점 상황을 감당해야 했다.
그것은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전쟁은 하되 적당한 선에서 정전이 이루어지는 것이 좋았지만 여태껏 제국 역사상 그런 경우는 없었다.
“대상 국가는 파악되었는가?”
“후보를 좁혀놓았습니다. 원 제국과 제노비아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글렌 의원은 이빨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도 이 정보를 얻은 것은 회의 입실 바로 전이었다.
“원 제국은 알겠는데 제노비아?”
의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노비아는 세레니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고 제국이 원정을 가려면 최소 두 국가를 지나쳐야 했다.
거기다 제노비아는 곡창 지대라는 것 말고는 특산물도 없었다.
“세레니스가 식량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뭐 하러 제노비아를 노린단 말입니까?”
“저도 그 점이 의아했습니다. 그래서 알아본 결과 아무드와 모종의 거래가 있는 듯합니다.”
“증거가 있소?”
“아무드의 공식적인 마장기의 보유 숫자는 총 4대입니다. 하지만 정보에 의하면 6기의 기체가 목격되었답니다.”
“그중 두 기가 세레니스의 기체다? 하지만 표식으로 바로 알 수 있을 텐데?”
“아무드가 보유한 기체는 일전에 세레니스로부터 중고 기체를 구입한 것입니다. 도장만 바꾼다면 쉽게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선뜻 이해할 수 없군. 아무드를 원조해서 세레니스가 얻는 것은 무엇이요?”
모두의 눈이 다시 글렌에게로 집중되었다.
얻는 것이 없는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정설이었다.
“아무래도 카나리스로 가는 길을 열려는 것 같습니다.”
“노리는 게 오리진 원석이다?”
사람들이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세레니스가 원석을 노리는 것이라면 상아탑과의 전면전도 불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상아탑과 앙숙인 총국이 뒤에서 크게 작용했다는 이야기였다.
총국과 세레니스가 카나리스의 원석 광산을 노린다.
그를 위해 세레니스가 아무드를 지원하기 위해 물자를 마련하고 있다.
라는 가설이 나름 신빙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카나리스 왕국에서 소란이 일었다고 하던데. 맞소? 글렌 의원.”
“네, 차기 국왕의 건으로 내부에서 소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반란 세력은 현재 총국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군. 아, 글렌 의원의 손녀가 카나리스의 차기 국왕 후보와 정혼했다는 말도 들었던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손녀가 어제 저를 찾아왔습니다.”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것 입니까?”
의원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타국의 일에는 관여하는 것이 않는 것이 그들의 철칙이자 살아남는 수단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글렌 의원은 선을 그었다.
“타국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저희의 철칙. 제 손녀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사업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사업? 제노비아의 공식적인 루트요?”
“그렇게 보입니다. 손녀는 국왕과 왕비의 허락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뭐 좋소. 하지만 오늘 안건은 증액 요구에 대한 답변이오. 이야기가 잠시 딴 길로 샜지만 오늘은 결정해야 합니다.”
의장은 의장봉을 두드리며 장내를 환기시켰다.
의원들은 제국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의장에 지시에 다시 한번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한 의원들.
그리고 표결에 들어가려는 찰나 글렌이 의장을 막아섰다.
“글렌 의원, 오늘은 결정해야 하오.”
“결정을 잠시 미루어 주실 수 있습니까? 아직 시한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남아있습니다.”
“표결을 미루려는 이유가 뭐요?”
“손녀가 가져온 사업안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결코 작지 않은 사안이며 결과에 따라 이 증액안에 대한 다른 의원들의 의견도 바뀔 수 있다고 봅니다.”
글렌의 말에 생각에 잠긴 의원은 마지못해 표결을 미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