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하란 말이야! 이 빌어먹을 자식아! 엥?”
여성은 자신이 있던 장소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뮤즈?”
“헉!”
등 뒤에서 들려오는 주인의 목소리에 뮤즈는 뜨끔했다.
방금 전 자신이 했던 상스러운 말을 주인이 들었을까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갑자기 어딜 갔다 온 거야?”
‘좋아, 못 들었다!’ 안심을 한 뮤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면 근육을 풀고는 뒤로 돌았다.
“어머, 죄송해요, 주인님. 갑자기 사라져서 놀라셨죠?”
“어딜 갔다 온 거야?”
“아니, 누가 좀 부르더라구요. 그래서 정령계란 곳에 갔다 왔어요.”
“누가 불렀는데?”
“음…….”
뮤즈는 이야기를 할까 말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넘어가자니 물의 정령왕이란 자가 계속 귀찮게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너더러 혼종이라고?”
“기분 나쁘더라니까요. 태훈 님은 저더러 이쁘다고 해주셨는데!”
뮤즈는 자신의 주인을 태훈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태훈 본인도 놀라워하지 않고 있었다.
“물의 정령왕이라. 나를 보고 싶대?”
“대화를 하고 싶다고는 하더라고요. 그냥 무시하세요. 지가 뭔데 주인님하고 대화를 해요? 건방지게.”
“정령왕이면 너보다 높은 존재 아니야? 그렇게 대해도 돼? 나중에 불이익 받는 거 아니야?”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해용, 저보다 아주 쪼오오오오금 강하긴 하지만 주인님이 신경 쓸 것까지는 없어용.”
“알겠으니까 좀 떨어져 줄래? 덥거든?”
태훈은 물의 정령왕이 자신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에 내심 기뻤다.
자신도 뮤즈의 존재에 대해 궁금증한 것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방에 감금당하여 자유를 속박당한 뒤 꾀병을 앓는 중이었다.
건강을 이유 삼아 재판을 미루고 있던 것.
그사이 태훈은 금속 팔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자신이 직접 그 팔을 착용해 보고 안 사실이 있었다.
원석처럼 오리진의 기운과 푸른 마나, 붉은 마나의 기운이 섞여 있는 것도 있었지만 다른 하나의 기운이 더 있었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그 기운을 받아들이는 도중 알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
정체불명의 기운을 받아들이자 그 기운은 강렬하게 그의 몸을 구석구석 돌기 시작한 것.
현기증이 날 정도로 날뛰는 기운을 태훈은 자신이 가진 기운들로 그것을 제어하려 했다.
하지만 도리어 그 기운은 태훈의 기운들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위기를 느낀 태훈은 자신의 정령들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태훈의 중급 정령들은 그 기운을 나누어 감당하기 시작했지만 이내 그 기운은 두 정령마저 잠식하기 시작했다.
뭔가 단단히 틀어졌음을 느낀 태훈은 팔을 빼내려 했지만 빠지자 않았다.
그 순간 두 정령이 정체불명의 기운에게 잠식당했고 그 순간 금속 팔은 빛을 내며 가루로 사라졌다.
동시에 두 정령이 사라지고 눈 앞에는 뮤즈가 나타난 것.
그리고 뮤즈는 자신을 주인이라 부르는 것과 동시에 태훈이라는 이름을 불렀다.
대화를 하고 나서는 그가 자신의 기억을 일부 공유하고 있음을 알았다.
뮤즈를 살펴보면서 그녀가 금속 팔에게서 느껴지던 모든 힘을 흡수한 것을 안 태훈은 놀랐다.
그리고 자신을 뛰어넘는 그녀를 통해 말빈을 잡을 수 있었다.
“물의 정령왕과 대화하고 싶어.”
“네에? 왜요오~?”
“너에 대해 묻고 싶은 것도 있어. 어떻게 하면 되지?”
“제가 정령계로 가서 불러올까요?”
“그래주겠어? 난 여길 비울 수가 없어. 비웠다간 적들에게 빌미를 줄 거야.”
“알겠어요.”
뾰루퉁한 채로 사라진 뮤즈는 잠시 후 익숙한 얼굴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당신은 물의 지니?”
“당신이 이 혼종의 주인입니까?”
물의 지니는 놀라며 뮤즈와 태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당신? 내 주인한테 당신? 존칭 쓰지 못해?”
“이름이 메드니안이었나요? 이런 식으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저는 물의 정령왕과 대화하는 줄 알았는데요.”
“정령왕들은 중간계에 현신할 수 없어요. 저를 통해 대화하면 됩니다.”
“그렇군요. 내가 먼저 질문을 할까요? 아니면 그쪽이 먼저 질문을 하시겠어요?”
“정령왕께서 먼저 묻고 싶어 하십니다. 이 혼종을 어떻게 만드시게 된 거죠?”
“한 번만 더 나더러 혼종이라고 하면 네 녀석의 목을 몸뚱어리와 분리시켜 줄 테다.”
뮤즈는 어느새 거대한 낫을 소환해 물의 지니의 목에 들이밀었다.
그녀에게서 살기가 느껴지자 물의 지니는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이…… 이름이 뭔데요?”
“뮤즈다. 존경과 경외심을 담아 불러라.”
“메드니안? 이 뮤즈…….”
“이름에 님자를 붙여! 이 퍼런 계집애야!”
“이봐요, 우린 같은 지니급이라고요!”
“나 말고 주인님 이름에 붙여! 감히 주인님보다 나를 높여 부르는 게 말이 돼?”
“뭐가 이렇게 주문이 많아요! 메드니안 님? 뮤즈를 어떻게 만드셨는지 과정을 좀 설명해 주시겠어요?”
태훈은 뮤즈의 탄생 비화를 말해주었다.
모든 것을 듣고 난 물의 지니는 잠시 자신의 정령왕과 소통하는 듯 보였다.
“그 금속 팔이란 건 완전히 사라졌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금속 팔은 어떻게 얻게 되셨죠?”
“그건…….”
태훈은 뜸을 들였다.
‘정령에게 말하는 건 괜찮은 건가?’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포인트에 대한 걸 제외하고 말하기로 한 태훈이 입을 열었다.
“저를 습격한 자가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았습니다.”
“다른 정보는 더 없습니까?”
“없습니다. 저도 그 인물에 대해서 조사하는 중이지만 소득이 없습니다. 이제 질문은 끝난 겁니까?”
“잠시만요.”
태훈은 물의 지니가 자신의 정령왕과 대화하는 것을 기다렸다.
그리고 질문은 더 이상 없다고 하자 이번엔 태훈이 물었다.
“뮤즈에게 혼종이라고 하던데 설마 사라진 제 중급 정령들이 섞인 건가요?”
“섞이다뇨. 그런 저급한 단어 말고 고오급진 표현을 써주세요.”
“뮤즈, 좀 조용히 있어봐. 지금 대화하잖아.”
“네에…….”
“어떻습니까, 맞습니까?”
태훈의 질문에 물의 지니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정령왕께서는 그게 맞는 것 같다고 하십니다. 무에서 유가 창조될 수는 없으니 그 매개체가 두 정령인 것은 확실하겠죠.”
“그럼 앞으로 뮤즈는 어떻게 합니까? 따로 종속 계약은 맺지 않았습니다. 제가 데리고 있어도 됩니까?”
태훈은 뮤즈를 계속 데리고 있고 싶었다.
압도적인 실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을 전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의 질문에 물의 지니는 뮤즈의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어딜 만져, 이 계집애야!”
“기다려 봐요. 당신 주인이 묻잖아요!”
“잠자코 기다려, 뮤즈.”
뮤즈가 얌전해지자 물의 지니가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가 땠다.
“종속 계약은 유지되고 있어요. 뮤즈는 틀림없이 당신의 정령이에요.”
“뮤즈의 힘은 저보다 강대합니다. 상식적으로 그런 종속 계약이 유지되는 것은 비상식적 아닙니까?”
“그건 저도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이미 세계의 상식을 깨고 있어요. 그러니 비상식적인 종속 계약 또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문제는 없겠습니까?”
태훈은 핵심을 물었다.
세계의 상식을 깨는 존재.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존재라는 어휘는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물의 지니는 그의 질문을 자신의 정령왕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보류라고 답했다.
“정령왕께서는 아직 확답을 줄 수 없다고 합니다. 추후에 다시 연락을 드린다고 하는군요. 더 질문하실 것이 있나요?”
“없습니다. 아, 혹시 상급 정령을 데려가실 수 있나요?”
태훈은 배낭 안의 상급 정령을 지니에게 부탁했다.
흑기사로의 변신이 후 원석이 많이 소진되어 새로운 원석의 수급이 필요한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안 됐지만 종속의 계약은 정령왕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정령의 주인인 드래곤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얼른 가버려!”
뮤즈가 눈을 흘기며 말하자 물의 지니도 볼일은 끝났다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왜 이렇게 성질을 내는 거야?”
“저도 몰라요. 왠지 그냥 보고만 있는 걸로도 짜증이 나는걸요.”
궁금증이 풀리자 태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친화력이 건재하고 막강한 전력을 얻었다는 점에서 전보다는 좋은 상황에 놓이게 된 것에 안심했다.
거기다 공작가의 암살 기도를 증명할 범인도 잡혔기에 상황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 * *
로텐바르는 붙잡혀 온 말빈을 심문했다.
하지만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죽는 건 매한가지라며 말빈은 입을 열지 않았다.
총국이 공작가와 손을 잡은 이상 이단 심문관을 통한 자백을 받기도 힘든 상황.
이에 로텐바르는 말빈에게 협상안을 제시했다.
“협상안이요?”
“네가 재판에서 증언해라. 공작이 시켜 메드니안의 암살을 기도했다고.”
“그러면 나에게 뭘 해주겠다는 겁니까?”
“국외 추방으로 끝내주지.”
“나를 살려준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하지만 증언만으로는 부족해. 공작이 사주했다는 증거가 있나?”
“…….”
말빈은 생각에 잠겼다.
공작의 손자가 어째서 메드니안의 편을 드는지가 의심스러웠다.
자신이 했던 모든 일의 대부분은 왕세자를 다음 국왕으로 앉히기 위한 작업이었다.
혹시 공작이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말빈은 뜸을 들였다.
“왕세자님은 공작의 손자 아닙니까. 왜 공작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십니까?”
“공작은 내가 세울 나라에 필요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게 뭡니까. 미리 적을 제거하겠다는 겁니까?”
“그렇게 들렸나? 정정하지. 이 나라에, 이 나라의 백성들에게 해가 될 존재다. 이제 됐나?”
“부족합니다. 저도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제가 왕세자님을 도와서 득이 될 일이 있겠습니까?”
“득이 될 일이라, 좋아. 원하는 걸 말해봐라.”
“내 제자를 고문하다 죽인 놈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놈이 누군지 알아봐 주십시오.”
“고문? 그건 모르겠지만 암살자를 죽인 범인은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요?”
말빈은 이발을 갈며 증오심을 드러냈다.
자신이 아끼던 세 명의 수제자 중 하나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땐 바로 구하러 가려 했다.
은퇴 후 자식 없이 아낌없이 가르치던 수제자들에게 애착이 생긴 것은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세월과 은퇴 후의 적적함은 그를 바꾸어놓았던 것이다.
“어떤 놈입니까. 그놈의 이름을 말해주십시오.”
“왜 그렇게 집착하지? 애당초 네가 찾는 그 범인도 결국 공작이 사주한 놈인데?”
“뭐라고요?”
“몰랐나?”
말빈은 털썩 주저앉았다.
왕자의 암살이 실패하고 자신의 수제자 중 하나가 생포됐다고 알려준 것은 다름 아닌 공작이었다.
그리고 고문을 지나치게 받다가 결국 죽었다는 소식도 공작이 알려준 것.
소식을 듣는 순간 공작이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란 걸 알고 바로 도망친 것이었다.
“이제 공동의 적이 생긴 것 같군.”
“증거도 알려 드리고 증언도 하겠습니다. 그러니 내 제자가 죽은 과정을 알려주십시오.”
로텐바르는 태훈이 추리한 것을 그대로 말빈에게 알려주었다.
모든 것을 듣고 난 말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신관 이름은 뭡니까.”
“그 이름은 네가 증거를 가져오고 증언을 한 뒤에 알려주지.”
“공작에게서 받은 돈의 일부를 다시 돌려주고 공작이 소유한 상단의 어음으로 받은 것이 있습니다.”
“좋아. 위치를 말해.”
말빈에게서 위치를 들은 로텐바르는 직접 그 장소로 찾아가 증거를 손에 넣었다.
‘이걸로 이 나라를 좀먹는 무리 하나가 사라진다. 남은 것은 하나.’
어음을 쥔 로텐바르의 손이 부들거리며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