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크아아악!”
말빈은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입가를 손으로 감쌌다.
여성은 어느새 그를 지나쳐 있었고 손에는 커다랗고 검은 낫을 들고 있었다.
“찢어진 입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네. 주인님은 나더러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했어.”
“이런 정신 나간 것이!”
여자를 향해 단검을 날린 말빈은 뒤를 이어 여자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하지만 여자는 다시 한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디로!?’
그가 주춤하는 사이 여성은 그자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등 뒤에 섰다.
‘그림자 숨기라고!? 그건 나도 하지 못하는데!?’
“칫!”
입가의 아픔은 잊은 듯 말빈은 재빨리 떨어지려 했다.
다시 한번 여자의 낫이 휘둘러지며 그의 반대쪽 입가가 찢어졌다.
“크으윽!”
“예쁘네. 좀 더 웃어봐.”
“네…… 네 녀석은 누구냐. 어째서 그림자 숨기를 할 수 있는 거지? 얼굴을 밝혀라!”
말빈은 얼굴 전면을 뒤덮고 있는 가면을 치우라는 듯 말했다.
“네 얼굴을 보면 넌 죽어야 돼. 주인님이 넌 살리라 했으니 그건 안 돼.”
“대체 정체가 뭐냐! 그 어떤 어쌔신도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거늘!”
“인간이라면 그렇겠지.”
그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말빈은 그녀의 발치를 바라보았다.
“그림자가 없다?!”
그제야 상대가 인간이 아님을 안 말빈은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설마 마족이냐?”
“마족? 그런 천한 것과 비교하면 섭섭하지. 자꾸 날 실망시키면 좀 더 아픈 맛을 보게 될 거야.”
여자의 조롱기 섞인 말투를 들으며 말빈은 자신이 상대가 되지 않음을 직감했다.
그런 판단을 내린 말빈은 부리나케 뛰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광적인 웃음기가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그래. 이번엔 술래잡기하는 거야?”
‘정신 나간 년이다. 상종해서 좋을 것이 없어. 마족도 아니라면 대체 뭐지?’ 자신을 쫓아오는 추격자에게 말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용했다.
암기를 날리고, 독이 든 주머니도 터뜨려 보았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추격전이 한참 이루어지자 여자는 따분해졌다는 듯 하품을 했다.
‘이 상황에서 하품을 한다고? 난 전력을 다해 뛰고 있는데?’
현업에 있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두 다리가 멀쩡한 말빈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마냥 달려서는 따돌릴 수 없다고 생각한 마빈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뭐야, 끝이야? 늙어서 더 이상 못 뛰어?”
“헉헉, 혀…… 협상하자. 네 주인을 만나게 해다오. 내가 네 주인을 만나 이야기를 하겠다.”
“이야기?”
여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네 주인의 가족을 건드렸나? 아니면 친구? 어쨌든 간에 네 주인이 원하는 정보를 주지. 이름을 말해주면 날 고용했던 자의 이름을 대주겠어.”
“우리 주인은 이미 알고 있던데?”
“뭐? 그럼 날 왜 쫓아오는 거야!”
“그냥 널 살려서 넘겨주라고 하더라고.”
“넘겨? 누구에게?”
“아마 지금 널 쫓아오는 사람들일걸?”
말빈은 당황스러웠다.
자신에게서 캐낼 정보가 없다면서 굳이 자신을 원하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주인이란 자가 대체 누구지? 공작? 왕세자?’
지금 자신을 원하는 것은 공작과 왕세자였다.
“넌 누구의 편이냐? 공작이냐? 왕세자냐?”
“둘 다 아닌데?”
“이이이익!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말빈은 발을 동동 굴렀다.
마음 같아선 사활을 걸고 싸우고 싶었지만 이미 실력의 차이를 느끼고 말았다.
이해타산을 따지는 그에게 있어 무의미한 싸움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힌 말빈이 그녀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그럼 네 주인과 협상을 하자. 날 그냥 보내주면 네 주인에게 엄청난 것을 주지.”
“엄청난 것?”
여자가 호기심이 동하는 듯하자 말빈은 너덜너덜해진 입으로 미소를 지었다.
“대금화로 2천 닢! 세레니스 제국 금화로 대금화 2천 닢이다!”
“그거 많은 거야?”
“많다마다! 그 정도면 평생을 놀고먹을 수 있어!”
“음, 그 정도로는 좀 부족한데. 암만 봐도 내 주인이 너보단 돈이 많아 보여.”
“그럼 2천 5백…… 아니, 3천 닢을 주마! 내 전 재산이다!”
“흠, 이야기는 해볼게.”
여자는 한쪽 손을 귀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곤 잠시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 조용히 멈춰서 있었다.
‘마법사인가? 마법사들은 근거리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하던데. 마법사가 피조물을 소환할 수 있었나?’
자신의 지식수준에서 모든 정보를 끄집어내던 찰나 여자의 손이 내려갔다.
“주인님이 대답했어.”
“오오, 그러냐. 뭐라 하던가.”
“돈을 받겠대.”
“그렇지! 좋다. 돈은 샤플론 다리 아래에 있는 돌무더기 아래에 있다.”
“오케이, 접수.”
“이걸로 거래는 끝이다. 난 가보마.”
말빈은 다시 허겁지겁 달리기 시작했다.
노후를 위해 평생을 모은 돈이었지만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살았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가지 못해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여성과 마주해야 했다.
“또 뭐냐! 무슨 볼일이 남았어?!”
“남았지. 널 넘겨줘야 한다니까?”
“이런 미친!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방금 네 주인과 거래를 했잖아!”
“한 적 없는데?”
“무슨 소리야! 나를 놔주기로 하고 금화를 받기로 한 것 아니냐!”
“놔주겠다고 한 적이 있었나?”
“뭐라고?”
“애당초 난 주인님과 대화한 적이 없어.”
“이 망할 자식이!”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것을 안 말빈은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여자는 그걸 손쉽게 받아넘기며 말빈을 땅에 내다꽂았다.
둔부에 큰 충격을 받은 말빈은 흰자를 드러내며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은 말빈을 근처 기둥에 묶은 여자는 매달린 그를 보며 시큰둥했다.
“이러면 된 건가? 아, 돈 가지러 가야지.”
말빈이 말한 곳에서 금화들을 발견한 여자는 기쁜 듯이 춤까지 추었다.
“주인님이 기뻐해 주시려나~?”
금화 자루들을 근처 그림자에 쑤셔 넣은 여자는 자신도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현장에 도착한 기동대들은 부상당한 채 처참한 모습으로 묶여 있는 말빈을 발견했다.
***
“느꼈나?”
“느꼈다. 그대들은?”
“나도 느꼈다.”
“나 역시.”
“끔찍할 정도의 기분 나쁨이로군. 정령계에서 이런 기분이 든 것은 처음이다.”
“모두 모이도록.”
그 말을 끝으로 정령계의 한쪽 끝에는 구체 6개가 한자리에 모였다.
각각의 속성을 뜻하는 색을 가진 구체들은 어수선했다.
“대체 이게 무슨 느낌인가? 아는 정령왕은 있나?”
“물의 정령왕. 그대는 가장 오랜 세월을 왕으로 보냈지. 이런 기운을 느낀 적이 있나?”
“없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대충 짐작은 간다.”
“그게 뭔가?”
불의 정령왕이 물었다.
“두 기운이 동시에 느껴지는 기운이다. 아무래도 끔찍한 혼종이 생긴 것 같군.”
“혼종? 그게 가당키나 하는가? 세계에 새로운 질서가 생겼다는 말이잖는가.”
이에 물의 정령왕은 빛과 어둠의 정령왕을 지목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혼종이 생겨났다. 이것은 틀림이 없다.”
“나 역시 동의한다. 나의 미약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이하 동문이다. 설마 했는데 사실일 줄이야.”
“물의 정령왕이 그렇게 말한다면 사실이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것은 가벼이 끝날 문제가 아니다. 신께서 정해주신 새로운 질서인가?”
“신께서는 아무런 언질이 없으셨다. 아무래도 예의 그 예언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군.”
“그게 사실이라면 수습해야 한다. 지니들을 비롯해 모든 정령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불의 정령왕이 말한 대로 정령계는 환경이 바뀌고 있었다.
이에 따른 정령들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만물의 변화가 시작될 수 있어. 누가 대표로 그 혼종을 만나겠는가.”
“내가 가지.”
“오오, 물의 정령왕이 해주겠는가? 하긴 그대 말고는 적임자가 없지.”
“맞아. 그대가 적임자일세. 허면 지금 바로 갈 텐가?”
“하지만 무슨 수로? 우리는 지상계에 현신할 수가 없어.”
“걱정할 것 없네. 그 혼종을 이리로 부르면 되니. 다른 곳에서 그것과 만나겠네.”
“결과를 기다리겠네.”
그 말을 끝으로 푸른색 구체가 사라졌다.
남은 다섯 개의 구체는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보게 땅의 정령왕. 예의 그 예언이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 건가?”
“그렇군, 바람의 정령왕은 그 당시에 정령왕이 아니었지.”
“그렇네. 설명을 해주게.”
“약 3만 년 전쯤, 신께서 마지막으로 이곳을 방문하셨을 때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는 날 두 가지를 선택하라고 하셨네.”
“그게 뭔가?”
“공존과 멸.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제거를 할지 선택하라 하셨네. 동시에 그 두 차이는 명확할 것이라 말씀하셨네.”
“어떤 것이 나은 선택인가?”
“그것까지는 말씀하지 않으셨네. 우리에게 맡기겠다고 하셨지. 그분이야 워낙 자유분방한 분이셔서 말이야.”
“음…….”
다섯 정령왕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일단 자신들의 정령들을 진정시키게. 정령계부터 안정화시키는 것이 우리 임무일세.”
“그러지. 지금은 물의 정령왕의 보고를 기다리는 것이 전부군.”
그 말을 끝으로 다섯 구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무렵 물의 정령왕은 정령왕들이 모여 있던 정 반대편에서 소환의식을 거행했다.
잠시 후 자신의 앞에 나타난 형상을 보고 정령왕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혼종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을 줄이야.”
“뭐야, 여긴? 넌 뭐고?”
시커먼 갑주과 엘름을 쓰고 있는 인간을 보며 물의 정령왕은 적잖이 놀랐다.
분명 실체가 없을 줄 알았지만 상대는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넌 누구인가?”
“남에게 이름을 묻기 전에 자기 이름부터 대답해. 무례한 놈.”
“……난 물의 정령왕이다. 그러는 너는?”
“내 이름을 들을 수 있는 것은 내 주인뿐이다. 생판 처음 보는 놈에게 이름을 알려줄 순 없지.”
“주인? 설마 그사이에 주인과 계약을 맺었다는 건가?”
“뭐라는 거야. 날 만든 게 내 주인이야.”
“뭣이!?”
물의 정령왕은 큰 충격을 받았다.
만물에 영향을 끼치는 존재를 만든 것이 지상계의 생명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누구인가! 그대를 만든 자가!”
“내 주인 이름은 알아서 뭐 하게? 네놈도 해코지를 하려고?”
흑기사는 거대한 낫을 정령왕에게 겨누며 적개심을 드러냈다.
“이놈, 아직 지니급밖에 안 되는 네놈이 나에게 덤비려는 것이냐!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웃긴 놈이네. 주인님하고 이야기 도중에 끌려와서 짜증 나는 건 난데 누구한테 큰 소리야!”
거대한 낫이 정령왕에게 날아들었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막과 부딪히며 사방으로 물이 흩날렸다.
“네 녀석을 교육부터 시켜야겠구나.”
커다란 물줄기가 사방에서 흑기사를 덮쳤다.
흑시가는 낫으로 그 물줄기들을 쳐냈지만 쉬지 않고 달려드는 통에 그중 하나가 엘름에 맞았다.
텅-!
엘름이 벗겨지며 흑기사의 얼굴이 드러났다.
긴 금발이 흩날리며 여성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것을 본 물의 정령왕은 물줄기를 멈추었다.
‘이래서 혼종인가! 겉으로는 어둠의 기운이 풍겨지더니 얼굴에서는 빛의 기운이 느껴지는군.’
“쳇!”
그녀는 한차례 공격을 주고받은 것으로 자신의 힘보다는 강한 상대라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주눅이 들진 않았다.
“제법 센데? 정말 정령왕인가?”
“말하라. 누가 그댈 만들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널 소멸시키겠다.”
“한번 해봐. 죽어도 내 주인의 이름은 말하지 않는다.”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군. 지니급이면서 성숙함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구나.”
물의 정령왕은 고민했다.
그도 공존과 멸의 선택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혼종이 중간계에서 생겨난 것에 대한 궁금증이 너무도 컸다.
‘소멸시켜 버린다면 알 길이 없어진다. 저 망아지를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정령왕은 노선을 바꾸어보기로 했다.
“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아는가?”
“정령이겠지. 주인님도 나더러 정령이라 했으니까.”
“너는 혼종이다. 지금껏 없었던 새로운 혼종. 너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만 이 세계가 나아갈 길을 알 수 있다.”
“부탁을 하는 것치곤 인사가 거친데? 난데없이 부른 것 자체가 예의가 없어.”
“네 주인이 너더러 정령이라고 한 것이 사실이라면 너의 주인은 정령과의 친화력이 있는 사람일터. 가서 전하라. 정령왕들이 대화를 하고 싶다고.”
“부탁을 하려면 제대로…….”
말을 미처 끝내지도 못한 채 여성은 나타났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령왕이 다시 중간계로 돌려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