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잠시 정적이 흐르며 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왕세자의 병력을 중심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긴장감.
침묵을 깬 것은 왕세자였다.
“그 말이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아군이 접선 지역에서 공격을 받았습니다. 적은 마법을 썼고 그로 인해 눈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그 여자가 한패고?”
“네, 같이 휩쓸려 온 것을 포박했습니다.”
태훈은 가면의 인물에 대해선 함구했다.
로텐바르는 말에서 내려 여자를 살펴보더니 사령관을 향해 물었다.
“이 여자의 신병은 그대에게 맡기지. 어떻게든 배후를 캐내게.”
“네?”
“감히 왕족을 건드린 놈들이다. 어떻게든 그 배후를 캐내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저하.”
공작의 기사들은 당황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앞으로 나섰다.
“이자를 북부군에서 담당하는 것보다는 수도로 데려가 심문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그렇습니다. 반역죄에 해당하는 자는 수도로 압송하여야 합니다.”
“아직 이자의 무리들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한시라도 빨리 심문하여 배후를 캐낸다. 내 결정에 불만이 있는가?”
“아,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공작의 기사들은 로텐바르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말을 흐렸다.
북부군 사령관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리둥절했지만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움직였다.
자신의 부하에게 여자를 넘기고는 말에 실었다.
“그럼 돌아가도록 한다.”
“잠시만요, 저 말고도 다른 생존자를 찾으셨습니까?”
태훈은 알과 다른 사람들의 안부를 물었다.
“아직 너 말곤 보지 못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있을지 모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저라도 남아서 찾겠습니다.”
“흠…….”
태훈이 완강하게 나오자 왕세자는 잠시 고민했다.
“사령관, 그대들의 부하 절반을 시켜 계속 수색을 이어가게. 나도 내 부하 절반을 참여시키지.”
그러곤 공작가의 기사들을 향해서도 절반의 병력을 내놓으라고 했다.
공작의 기사들이 뜸을 들이자 왕세자가 호통을 쳤다.
그러자 그들도 마지못해 절반의 병력을 남겨두기로 했다.
그렇게 북부군의 주둔지로 이동할 때 사령관이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네. 그보다 왜 형님이 여기에 계신 건가? 공작가의 기사들까지 대동하고.”
“공작가의 기사들과는 연관이 없어 보입니다. 따로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속내를 모르겠군.”
“저도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올 때도 지휘권은 저에게 있었습니다. 저 여자를 저에게 맡기신 것도 의중을 모르겠군요.”
“책임을 모두 자네에게 씌우려 하는 것일 수도 있어. 조심하도록.”
“알겠습니다. 무기는 있으십니까?”
사령관은 주둔지에 도착할 때까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물었다.
태훈은 자신의 허리에 찬 검을 보여주었다.
“반드시 주둔지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왕궁에도 사람을 보내놨으니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네만 믿겠네.”
정말로 태훈은 사령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었다.
간밤에 있었던 사투에 사력을 다한 것.
그리고 여자를 등에 메고 눈 덮인 비탈길을 내려오는 것으로 사실 온몸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왕세자나 공작가의 병력만 없었다면 구조대를 본 순간 기절했을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주둔지로 오는 길 동안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태훈이 도착 직후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이틀 후였다.
그사이 구조대는 생존자 셋을 더 구출했고 그중에는 수호기사인 알도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태훈은 북부군 주둔지에 머무르고 있던 로텐바르에게 불려갔다.
“몸은 회복이 되었느냐?”
“네, 많이 좋아졌습니다.”
“일국의 왕자라는 녀석이 고작 그 정도 상처로 이틀이나 누워 있다니.”
눈사태로 인한 상처는 자신이 신력을 사용해 회복되었기에 로텐바르의 눈에는 자신의 동생이 한심하게 보였다.
로텐바르의 말에 태훈은 울컥했다.
‘잘도 지껄이는군. 암살자를 보낸 것이 네놈 족속들이란 것을 모를 줄 아나.’
태훈은 왕세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암살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직 심문 중이다. 틈나는 대로 자결을 하려 해서 재갈을 물리고 심문관을 불렀다.”
“심문관이라면 교황 총국의 이단 심문관 말씀입니까?”
“그렇다.”
이단 심문관은 신력을 이용해 진실을 말하게 하는 능력을 가진 고위 신관이었다.
“암살자를 어찌 이단 심문관에게 맡긴단 말입니까?”
“사안이 사안인 만큼 확실하게 조사를 하기 위해서 내린 결정이다. 그것이라면 너나 아버님도 납득할 것이라 생각했다.”
“…….”
왕세자는 태훈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국왕파라고 생각되는 교황 총국을 끌어들인 것이다.
태훈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그랬다고 생각하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허심탄회하게 말해봐라.”
가슴을 펴며 말하는 로텐바르에게서는 허심탄회하게 말해보자라는 뉘앙스가 풍겨져 나왔다.
‘이 인간이 대체 무슨 꿍꿍이지?’
잠시 생각하던 태훈이 입을 열었다.
“이단 심문관이 외가 쪽에 대해 불리한 증언을 하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외가라면 어머니나 공작가를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이단 심문관의 말이 그렇다 하면 공작을 불러다 놓고 책임을 추궁해야겠지.”
확고한 동맹 관계를 넘어 혈맹 관계인 공작가와 등을 지겠다는 발언에 태훈은 적잖이 놀랐다.
“지금 공작가랑 등을 지겠다는 겁니까?”
“너는 지금 왕국 사정이 어떻다고 보느냐?”
뜬금없는 질문에 태훈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런 걸 묻는 형님의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그런 걸 판단해도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왜 관계가 없지? 너도 이 나라의 왕족이다. 이 나라를 걱정해야 할 신분이 아니더냐.”
태훈의 답변을 들은 왕세자의 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태훈도 할 말은 충분히 있었다.
태훈은 제노비아와 맺은 협정 문서들을 내놓았고 그것을 본 왕세자는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제 위치를 충분히 각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님의 허락이 있었던 것이냐?”
“아버님의 윤허가 있지 않았다면 저 혼자 이런 협약을 체결했을까요?”
“음…….”
태훈이 내놓은 문서가 다소 충격이었는지 로텐바르는 신음을 흘렸다.
다음 왕위 계승자인 자신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이런 협정문서가 체결되었다는 것에 대한 충격인 듯하였다.
“네가 점점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것 같구나.”
“뭐라고요?”
“네가 이런 행동을 할수록 나라가 더 어지러워질 것이란 것을 모르느냐?”
태훈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칭찬을 해도 모자랄 판에 자신의 행동을 질책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군다나 좀 전에는 왕자면서 나라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아니냐며 나무라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나라에 이익을 가져다주고 안보를 강화하는 것이 잘못된 행동입니까?”
“멍청한 것. 네가 이런 일을 벌일수록 네 목숨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라가 분열하고 있다!”
그의 말에 태훈이 벌떡 일어섰다.
“그럼 대체 저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조금 전에는 왕자라는 신분을 들먹이더니 이젠 그 결과물을 가지고 저를 나무라는 겁니까?”
울분을 토해낸 태훈은 그래도 분했는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아버님의 기대를 받는 것이 싫습니다! 형님이 다 하겠다고 하십시오. 제노비아의 공주와도 형님이 결혼하겠다고 하세요! 첩으로 받아들이시면 되잖습니까!”
한껏 할 말을 토해낸 태훈의 어깨가 들숨과 날숨으로 들썩였다.
그러곤 아차 싶었는지 머쓱하게 옷매무새를 다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말을 다 했느냐?”
“반도 못 했으나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태훈이 흥분을 가라앉힌 듯하자 다시 로텐바르가 입을 열었다.
“나머지도 해봐라.”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면 날이 새도 모자랄 겁니다.”
“시간은 많다. 해봐라. 다 털어놓지 않는다면 이 방에선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
왕세자가 작정한 듯이 팔짱을 끼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하지만 태훈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다 하래도. 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느냐.”
“됐습니다. 형님과 제 사이가 그럴 사이도 아니잖습니까.”
실상 자신이 왕자로 환생하여 로텐바르와 두 마디 이상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서로가 말이 없자 짜증이 솟구친 태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한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하셨죠? 뭐가 잘못되어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있다고 하셨습니까?”
“네가 일을 벌일수록 이 나라 내부의 적들이 활개 친다.”
‘그게 원흉의 중심에 서 있는 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냐.’ 태훈이 비웃음을 지었다.
“그 내부의 적이 누군지는 아십니까?”
“공작가와 어머니다. 그리고 교황총국도 있지.”
로텐바르의 대답에 태훈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잠시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아 당황스러웠으나 재차 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내 어머니는 너를 두려워하여 공작가와 손을 잡고 있고 집정관은 이 나라를 돈으로 흔들고 있다.”
“……그 두 세력 중 하나는 형님의 세력입니다.”
“나는 세력을 만든 적이 없다.”
“피나 어머니와 공작가가 귀족파를 이끌고 형님을 중심으로 뭉쳐 있다는 것을 모른다고 할 작정입니까?”
“이 나라가 곧 나다. 자신의 세력을 만든다면 그들은 혼란을 야기하는 분자들일 뿐이다.”
왕세자의 대답을 잠자코 듣고 있던 태훈은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자신의 뒤를 봐주는 사람들을 적이라고 단정 짓는다고?’
하지만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 남자가 굳이 그들을 적으로 돌릴 이유가 없어.’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다는 생각에 태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형님을 왕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까지 부정할 셈입니까?”
“부정하지 않는다. 너는 그들을 경계하고 있어. 그 이유는 네가 왕위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저는 왕위에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먼저 싸움을 걸어온 것은 그쪽이잖습니까!”
독살 사건을 떠올린 태훈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무렵.
기미 역할을 하던 시녀가 피를 토하며 죽은 사건이 떠올랐다.
그것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죄를 뒤집어쓰고 죽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 됐군.”
“뭐가 말입니까?”
“너와 나는 적이 아니다.”
“……제가 멍청한 건지 형님이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건지 도통 모르겠군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태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고리에 손을 대려는 순간 로텐바르가 입을 열었다.
“나는 확신이 필요했다.”
“……무슨 확신 말입니까?”
“네가 정녕 왕위에 뜻이 있는지 없는지 말이다.”
“저는 관심이 없다 말했습니다. 둘째 형님에게나 물어보십시오.”
둘째 왕자는 정실부인인 피나 왕비의 둘째 아들로 로텐바르의 친동생이었다.
“그 녀석은 있다 해도 왕이 될 능력이 없어. 있다고 한다면 녀석을 전력으로 저지할 뿐이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편히 왕이 되실 일만 남았군요. 아버님만 잘 설득하십시오.”
“할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선 네 협조가 필요하다.”
태훈은 문고리로 가져갔던 손을 내렸다.
‘녀석은 왕이 될 생각이 확고하다. 그래, 국왕을 설득하기 힘들다면 녀석에게 힘을 실어주면 될 것이 아닌가!’
로텐바르와 나누었던 말들이 전부 진심이라면 상황을 바꾸어 볼 만했다.
왕세자를 전력으로 밀어주고 왕세자에게 힘을 실어준다.
그렇게 하면 피나 왕비나 공작가를 조심할 필요도 없었고 차기 국왕의 자리에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도 없었다.
“그렇군요. 제가 협조하면 이 모든 게 불필요한 일이 되겠군요.”
“이제야 내 말을 이해했느냐?”
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적 독살 사건으로 인해 거리를 두고 있던 것은 자신이었다.
그때부터 이미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적’으로 인식했던 것.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안을 가졌다는 이유로 국왕이 밀어주려 했던 것들이 맞물리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생성된 것들이었다.
그렇게 정리가 되자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하…….”
“왜 웃는 거냐?”
“그냥 상황이 좀 웃겨서 그럽니다. 그럼 어머님더러 제 목숨 좀 그만 노리라고 해주시겠습니까? 그러면 이번 일도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없던 일? 그렇게는 안 되지. 이번 일은 엄연히 해결을 해야 할 사항이다.”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사람이 좋게 넘어가겠다는데 이건 또 뭔 소리야?’
“어머니는 철두철미한 분이다. 동시에 의심과 걱정도 많지. 네가 협조하기로 했다고 해도 쉽게 멈출 분이 아니야.”
“그럼 대체 하고 싶으신 말이 뭡니까? 그냥 저더러 곱게 칼을 맞으라 하는 겁니까? 역시 자기편이라 이겁니까?”
태훈은 다시 미간을 좁혔다.
‘지금 나를 가지고 논 것인가?’
여지껏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기분이 들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어진 로텐바르의 말에 무심코 주먹이 풀렸다.
“공작가를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