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영업맨은 태훈과 작별하기 전 그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태훈 님의 환생 절차는 저승의 법으로 위법이니 만약 발설하여 정보가 새어 나간다면 큰일입니다.”
“어떻게 되길래 그러죠?”
“지옥에 떨어지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죠. 총괄자라 부르는 인물이 찾아가서 태훈 님의 모든 것을 빼앗을 겁니다.”
신신당부와 함께 경고를 하던 그를 떠올린 태훈은 좌절했다.
상황을 종합해 본다면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가면의 거구가 가진 금속 팔도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저건 여기 물건이 아니구나. 어쩐지 최상급 원석 이상의 기운이라니…….’
자신이 불법 환생을 했다는 것을 들켰다고 생각하자 그는 허탈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거지? 난 말하고 다닌 적이 없는데…….’
그의 망설임을 본 가면의 인물은 따지듯 말했다.
“뭐 하는 거지? 더 안 덤비는 거냐?”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는 바보는 아니야.”
“흥, 싱겁긴. 실력 차이를 인정한 것은 높게 사주지. 그래서 서명할 생각이 든 거냐?”
“서명을 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용건은 그게 다다. 다만 기억은 지워야겠지.”
기억을 지운다는 말에 태훈은 덜컥 겁이 났다.
“기억? 무슨 기억?”
“나를 만났던 기억.”
“그게 다야?”
“그게 다다.”
가면의 대답에 의문이 들었지만 태훈은 안도할 수 있었다.
‘포인트만 회수한다는 건가? 하지만 영업맨 말로는 그걸로는 안 끝날 것 같았는데.’
태후은 재차 되물었다.
“정말 그게 다냐? 서명만 하면 끝이라고?”
“그렇다니까. 목숨이라도 내놓으라고 할 줄 알았나?”
거짓말은 아니라고 판단한 태훈은 검끝을 내렸다.
그러곤 바닥에 던졌던 문서를 주워 들었다.
다시 봐도 포인트의 회수에 대한 내용 말고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얼른 설명해. 여기 덤도 준비해놨으니.”
“덤?”
태훈은 그제야 누워 있는 다른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전형적인 암살자 복장을 한 여성이 누워 있었다.
날렵한 몸매를 가진 붉은 머리 2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같은 편이 아니었나?”
“난 혼자 일한다. 그런 떨거지는 알지 못해. 그 녀석을 데려다 뒤를 캐면 네 목숨을 노린 녀석을 알 수 있지 않겠나?”
“짐작 가는 곳은 있어.”
“그럼 물증이 되겠군. 어서 서명이나 해.”
힘없이 단검을 들어 자신의 손가락에 가져다 댄 태훈은 손을 멈추었다.
‘젠장, 남아 있는 포인트도 꽤 되는데 이렇게 날려야 하는 건가?’
태훈이 다시 한번 망설이자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는 거야? 얼른 서명하라고!”
“서명은 좀 그렇군. 돈으로 해결해 보지 않겠어?”
“하아…….”
가면 너머로 깊은 탄식이 들려왔다.
그러곤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신사적으로 대하려고 했지만 거부한 것은 너다.”
가면은 작심한 듯 금속 팔을 걷어 올리며 다가왔다.
손끝에 달린 시퍼런 날들이 달빛에 반짝였다.
“필요한 건 네 피뿐이다. 힘은 쓰지 않으려 했지만 안 되겠군.”
태훈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의 살의가 단순한 폭력이 아님을 단번에 알아차린 그가 뒤로 물러섰다.
‘저건 농담이 아니야.’
태훈은 발치에 있던 가방의 덮개를 발로 슬쩍 열었다.
동시에 자신의 정령을 불렀다.
‘내가 신호하면 전부 저 녀석에게 달려들어.’
그의 부탁에 두 정령은 알겠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상급 정령. 이번엔 좀 도와줘야겠어.’
‘흠, 계약한 자가 아닌 자의 부탁은 들어줄 수가 없다.’
‘신세 갚는다고 생각해. 평생 폐광에 처박혀 있을 뻔한 걸 꺼내줬잖아.’
‘……이번만큼은 도와주지. 하지만 그 대가는 받겠다.’
상대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태훈은 손에 든 단검을 날렸다.
그가 단검을 쳐내자 중급 정령들이 그의 팔과 다리를 공격했다.
작은 상처를 입으며 가면의 사나이가 팔을 휘두르자 정령들이 물러섰다.
스윽-
그 순간 거구의 사나이 뒤로 또 다른 거구가 나타났다.
갑자기 나타난 거구는 검은 갑옷으로 둘러진 흑기사였다.
흑기사가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깡-
“큭!”
흑기사의 거대한 검을 금속 팔로 막아낸 가면이 탄식음과 함께 휘청거렸다.
“흐압!”
그때를 놓치지 않은 태훈이 검기를 두른 검으로 그의 왼쪽 어깨를 종으로 그었다.
살기 위한 그의 검은 어느 때보다도 빨랐다.
서겅-
푸슛-
팔이 잘려 나가며 선홍빛 피가 달빛에 흩날렸다.
“크아아악! 이놈들이!”
괴로움과 분노가 담긴 외침과 함께 거구가 무릎을 꿇었다.
태훈은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지만 거구의 오른손이 더 빨랐다.
“큭!”
태훈은 자신의 덜미를 잡은 남자의 팔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뿌리박힌 나무 기둥을 잡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무슨 괴력이……!’
남자의 오른손에 덜미가 잡힌 태훈은 엄청난 풍압을 맞으며 왼쪽으로 날려졌다.
흑기사는 오라가 둘러진 남자의 발차기를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
‘신체에 오러를? 웨폰 마스터의 상급 경지인가?!’
상대의 전력이 괴력이나 금속 팔 만이 아니란 것을 안 태훈의 마음이 급해졌다.
태훈은 끝까지 놓고 있지 않던 검에 자신의 모든 오리진 기운을 다해 오러를 둘렀다.
동시에 다른 손에는 남은 마나를 사용해 화구를 만들어냈다.
“오러에 마법, 정령까지 쓰는 놈이었나!?”
이번엔 거구가 놀라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화구가 가면의 몸에 적중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그사이 흑기사의 검이 그의 왼쪽 무릎 아래를 베었다.
“크아아아!”
눈이 다시 한번 선홍빛으로 물들며 가면의 몸이 기울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며 태훈의 검이 그의 목을 쳤다.
툭-
푸슉-
가면이 옆으로 기울어지며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허무하게 목이 잘려 나간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뿜어져 나온 피가 새하얀 눈을 녹이며 핏물을 만들었다.
“허억…… 허억……. 이겼나?”
처음 해보는 살인에 태훈의 심장이 요동쳤다.
“이걸로 2천점 차감인가. 아니지, 저승의 관리자를 죽인 건 어떻게 되는 거지?”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태훈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흑기사였다.
흑기사를 처음 봤을 때 놀라움도 있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익숙했기에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네가 그 늑대야?’
‘그렇다.’
‘어째서 그런 모습이지? 늑대의 형상은 어디가고?’
그러자 흑기사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에는 만월이 떠 있었다.
‘만월이 있는 밤에는 어둠의 정령들이 각성을 할 수 있다. 상급 정령 이상만이 가능하지.’
‘그래서 그런 모습인가?’
흑기사에게서 풍겨져 오는 위압감은 늑대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원석의 기운을 아껴야겠군. 이만 돌아가마.’
그 말을 끝으로 흑기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잠시 멍하니 시체를 바라보던 태훈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저승 사람들도 피가 흐른다고?”
아무리 보아도 평범한 인간의 시체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자 태훈은 조용히 시체를 살폈다.
그리고 검으로 떨어져 나간 머리의 가면을 벗기자 4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턱 밑에 흉터가 있는 각진 턱을 가진 남자였다.
“아무리 봐도 인간인데…… 어쨌든 이걸 처리해야지.”
태훈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2미터가 넘는 거구를 묻을 구덩이는 엄청나게 컸다.
얼어붙은 땅을 간신히 파내어 거구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가면과 함께 머리도 넣은 태훈은 마지막으로 멀리 떨어진 팔로 다가갔다.
금속 팔을 집어 들자 맨살의 팔이 떨어져 나왔다.
“흐익!”
깜짝 놀라며 자신이 들고 있는 금속 팔과 바닥의 팔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가 보았던 금속 팔은 일종의 장갑이었던 것.
자신이 들고 있는 금속 팔을 자세히 살펴본 태훈은 그것이 원석이 아님을 알았다.
‘이게 대체 뭐지……. 뭔진 몰라도 평범한 물건은 아닌데.’
곰곰이 생각하던 태훈은 땅에 떨어진 팔만을 구덩이에 넣고 금속 팔은 자신의 배낭에 쑤셔 넣었다.
마지막으로 구덩이를 덮으려는 찰나 시체의 품 안에서 삐져 나온 종이를 보고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종이에는 공용어로 자신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또 하나의 종이가 더 있었는데 그것은 누군가로부터 온 편지였다.
편지는 베닝스라는 이름의 발신인이 적혀 있었고 내용은 포인트를 회수하여 가져오라는 내용이었다.
“뭐야, 저승에서 온 녀석이 아니었나?”
그나마 저승과는 관련이 없다는 점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인간 중에서도 포인트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다.
찜찜한 기분을 뒤로하며 편지까지 챙긴 태훈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는 여성을 본 태훈은 그녀를 깨우기 위해 다가갔다.
심각한 부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태훈은 배낭 안에 있던 옷을 찢었다.
“괜히 난리를 피우면 골치 아프니까.”
찢은 천으로 여자를 묶은 태훈은 여자를 흔들었다.
그래도 깨어나지 않자 약한 전격 마법으로 그녀를 깨웠다.
“허억!”
“정신이 들어?”
“여긴…….”
여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태훈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이내 표정을 구겼다.
“흐읍!”
“역시……”
퍽-
태훈은 여자가 혀를 깨물려 하자 급하게 그녀의 급소를 쳤다.
“큭.”
외마디 신음소리와 함께 다시 정신을 잃은 여자를 보고, 태훈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곤 천으로 재갈을 만들어 씌웠다.
“젠장, 이러면 뭘 물어볼 수가 없잖아.”
태훈은 고민에 빠졌다.
살아 있는 용의자를 포획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뒤처리가 문제였다.
그대로 데리고 가자니 피나 왕비가 걸렸다.
‘분명 심문을 핑계 삼아 죽이겠지. 아니면 애꿎은 사람한테 누명을 씌우든 할 게 분명해.’
태훈은 그녀를 추궁할 방법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황제 직속인 중앙군에게 신병을 인계하는 것.
국경에서 가까운 황제파 귀족에게 넘기는 것.
두 가지 중에 가장 마음에 내키는 것은 첫 번째 방법이었다.
‘아마 나를 찾으러 온 병력이 있을 거야. 날이 밝는 대로 그들에게 넘기는 것이 났겠지.’
태훈은 혹시 모를 습격자에 대비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은 뒤 태훈은 여자를 들쳐 메고 산을 타기 시작했다.
온몸이 땀으로 젖고 김이 나기 시작할 무렵 구조대를 발견했지만 이내 발걸음이 얼어붙었다.
“왜 여기에 형님이…….”
무리 속에 로텐바르가 있는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지 태훈은 그들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충격을 받은 것은 태훈만이 아니었다.
공작의 기사들은 멀쩡히 서 있는 태훈과 암살자로 보이는 인물을 발견하고서는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무사했구나.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아, 네…….”
아무런 감정 없는 안부 인사가 건네져 오자 태훈은 잠시 당황했다.
그것은 옆에서 보고 있던 사령관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감정이라곤 느껴볼 수 없군. 냉혈한 왕세자란 말이 정말이었어.’
사령관은 로텐바르의 처세에 감탄하며 태훈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3왕자 전하. 눈사태가 일어났다고 해서 바로 달려왔습니다.”
“괜찮네.”
“등에 그자는 누굽니까?”
태훈은 잠시 망설였지만 업고 있던 여자를 내려놓았다.
“나를 공격했던 자들 중 하나요.”
“공격을 받았다는 말씀입니까?”
“북부군의 군복을 입고 있던 자들이 우리를 공격했소.”
“그렇다면 저희가 보낸 자들은 보지 못하셨습니까?”
“보지 못했소.”
사령관은 그제야 로텐바르와 공작의 기사단이 나타난 이유를 알아챘다.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검집으로 향했다.
당장이라도 로텐바르의 기사들과 공작의 기사가 달려든다면 수적으로 불리했다.
상황을 인지한 듯한 공작가 기사들의 손도 검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