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눈사태의 여파는 상당히 컸다.
멀지 않은 산에 있던 국경 수비대가 눈사태를 목격하고 병력을 급파했다.
피해를 입은 주민이 있는지 살피기 위한 조치였다.
국경 수비대의 보고는 상부인 북부군에도 들어갔다.
눈사태가 일어난 곳이 3왕자와 접견하기로 했던 지역인 것을 확인한 사령관의 안색이 변했다.
“그럼 3왕자는? 파견했던 병력은 어떻게 됐어?”
“모르겠습니다. 왕자님을 마중하러 갔던 병력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당장 구조대를 파견해! 왕자님의 신병을 확보해야만 한다!”
북부군의 사령관은 기겁하며 부대를 꾸렸다.
사령관이 직접 구조대를 데리고 출발했다.
주둔지를 벗어나 한 시간 정도 행군했을 때 한 무리와 마주했다.
희미하게 날리는 눈발 사이로 무장한 병력들이 나타난 것.
그들이 북부군의 군복이 아닌 자국의 기사 복장을 하고 있자 사령관이 말을 멈추었다.
“누구냐? 어디서 오는 길이냐?”
“그러는 너희들은 누구냐?”
상대는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며 사령관을 압박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사령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북부군 소속의 기사들이다. 나는 사령관 올디누스. 소속을 밝혀라.”
“우리는 헤카르 기사단이다.”
“헤카르 기사단?”
사령관은 놀라며 되물었다.
헤카르 기사단은 궁정 기사단 중에서도 두 번째로 서열이 높기로 소문난 마법기사단.
그리고 그들의 소속은 바로 왕세자의 수호기사였다.
“왕세자님의 기사단이란 말인가?”
“그렇다. 왕세자님도 함께 계신다. 예의를 갖추어라.”
대답을 하는 기사 뒤로 흑마가 보였다.
왕세자가 시찰을 나왔을 때 보았던 눈에 익은 흑마였다.
안장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을 확인한 사령관이 급히 말에서 내렸다.
그의 뒤를 따르던 기사들도 말에서 내렸다.
“로텐바르 왕세자님을 뵙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어딜 가는 길인가?”
“아, 그것이……”
사령관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갑자기 왕세자란 인물이 나타난 것도 당황스러웠는데 사정을 말하기가 껄끄러웠다.
‘왕세자는 3왕자와 대립하는 인물이 아닌가. 어찌 이런 곳에…….’
사령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눈사태가 일어났다는 보고가 있었기에 알아보러 가려는 중이었습니다.”
“사령관이 직접?”
“그렇습니다. 현지에 파견 나가 있던 부대가 있었기에…….”
“혹시 그 부대가 내 동생과 관련이 있나?”
3왕자 이야기는 빼놓았던 사령관은 입술을 깨물었다.
태훈의 귀환은 북부군과 국왕만이 주고받았던 내용.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자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왕궁에 보고는 했나?”
“아직 보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기에…….”
사령관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왕세자의 흔들림 없는 갈색 눈동자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동생의 안부는 안중에도 없는 듯 동요하는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앞장서게. 나도 같이 가지.”
“직접 가신다고요? 아직 눈사태의 위험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상관없네. 안내하게.”
사령관은 찜찜한 기분을 감추어가며 마지못해 앞장서기 시작했다.
주둔지가 있는 곳에서 현장까지 가는 길에는 갈림길이 있는 길목이 하나 있었다.
잠시 후 사령관은 길목에서 또 다른 무리와 맞닥뜨렸다.
“누구냐? 우리는 북부군이다. 왕세자 전하와 같이 있으니 소속을 밝혀라.”
“왕세자?”
상대는 놀란 눈으로 자기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중 한 명이 왕세자의 존재를 확인하자 말에서 내려 다가오더니 고개를 숙였다.
“왕세자님, 저는 로베르토라고 합니다. 2년 전에 한번 뵌 적이 있습니다.”
“아, 기억나는군. 외조부의 기사로군.”
로텐바르는 기억이 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외조부? 그럼 데스티노 공작의?’
사령관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사고가 나자마자 3왕자의 천적들이 줄줄이 나타난 것이다.
공작의 기사와 왕세자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사령관은 자신의 수하를 불러 조용히 말했다.
“당장 왕궁으로 가라. 상황을 폐하께 설명해라.”
“알겠습니다.”
수하는 조용히 대열에서 이탈했다.
그러곤 공작의 기사들이 왔던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로베르토 경은 이곳엔 무슨 일이십니까?”
사령관이 묻자 그제야 로베르토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저희는 공작님의 명령으로 국경을 정찰 중이었습니다.”
“국경 정찰은 중앙군의 역할입니다. 어찌 공작님의 사병들이 보고도 없이 정찰을 한단 말입니까?”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중앙군의 노고를 모르는 것이 아니고 그저 공작님이 노파심에 지시한 일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국경은 아무 문제 없으니 돌아들 가십시오.”
“왕세자님에게 듣자하니 눈사태가 일어났다고요? 국민이 위험에 처해 있을 수도 있는데 기사 된 도리로 어찌 그냥 가겠습니까.”
기사가 물러설 기색이 보이지 않자 사령관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좋습니다. 단 비상 상황이니 지휘권은 중앙군인 저희에게 있습니다. 제 지시를 따르십시오.”
“그것 또한 잘못되었군요. 분명 사령관보단 왕세자님이 더 권한이 있으실…….”
“상관없네. 사령관이 지휘를 맡게.”
로텐바르가 의외의 대답을 내놓자 공작의 기사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사령관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하오나…….”
로베르토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했지만 왕세자가 단숨에 말을 잘랐다.
“국경 지리는 사령관이 잘 알 것 아닌가.”
“그렇긴 하죠…….”
“어서 움직이지. 지체할 시간은 없는 것 같은데.”
로텐바르가 턱짓을 하자 사령관이 선두에 섰다.
그 뒤를 이어 로텐바르. 이어 공작의 기사단이 뒤를 이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사령관이 두 무리에게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있을 때 다른 사람도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후방에 있던 공작의 기사들이 기수를 붙여 밀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왜 왕세자님이 여기 계시는 겁니까?”
“나야 모르지. 나도 들은 게 없어. 하지만 잘됐다. 아군이 늘어서 나쁠 건 없잖아.”
“그렇죠. 그런데 왕세자님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는데요.”
“왕세자님도 3왕자가 눈에 거슬렸던 게지. 우리는 왕세자 전하만 믿고 가면 되겠어.”
공작의 기사들이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반나절이 지나서야 현장에 도착한 사람들은 처참한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산 중턱에 이르자 쓸려 내려온 눈과 부러진 나무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구조 작업이 늦어질 것을 예감한 사령관은 캠프를 설치하고 수색에 나섰다.
* * *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오르는 곳에 세 사람이 있었다.
가면을 쓴 거구의 인물.
그리고 눈의 냉기를 막아주는 듯한 가죽 담요 위에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가면의 인물은 금속으로 된 자신의 왼팔을 만지작거렸다.
유리 같은 그의 가면에 모닥불이 비추어졌다.
“허억!”
누워 있던 사람 중 하나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군데군데 상처가 난 태훈이었다.
“뭐야, 여긴…….”
태훈은 주위를 둘러보다 거구의 인물을 확인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태훈은 손 끝으로 주위를 더듬거렸다.
“이걸 찾는 건가?”
가면의 인물은 검과 배낭을 그의 발치에 던졌다.
그가 던진 검을 조심스럽게 쥔 태훈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지? 난 왜 여기 있고?”
“기억이 나지 않는 건가?”
“눈사태에 휩쓸린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럼 뭐겠어. 내가 널 구한 생명의 은인이지.”
“한 가지 질문이 남았잖아. 당신은 누구지?”
“어린놈이 건방지군. 왕자라 이건가?”
가면 너머로 그의 비웃음이 느껴졌다.
그자에게서 느껴지는 방대한 마나의 양에 태훈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이 마나는 저기서 나오는 건가?’
금속으로 된 팔에서 나오는 막대한 마나의 양에 태훈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최상급 원석을 깎아 만든 국왕의 인장에서 느낄 수 있는 마나의 양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독특한 팔을 갖고 있네. 그건 원석으로 만든 것인가?”
“그런 하등한 물건과 비교하지 마라. 그것보다 내 볼일부터 해결하지.”
“볼일? 나에게 볼일이 있나?”
“안 그럼 생판 모르는 너를 살려 줄 일은 없지.”
그러면서 태훈에게 뭔가를 던졌다.
그것을 펴보니 양피지에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알아보진 못할 거다. 그건 이곳의 언어가 아니거든.”
하지만 태훈은 금방 그 문자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저승에서 봤던 문자잖아.’
잊고 있었던 지식이 되살아나며 태훈은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본인에게 있는 모든 포인트의 권리를 포기한다. 동시에 포기한 포인트를 이 문서를 가지고 있는 자에게 양도한다.’
태훈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가면의 인물은 그에게 단검을 던졌다.
“그 문서의 아래에 네 녀석의 혈흔으로 서명해라.”
“이게 뭔 줄 알고 사인을 하란 거야?”
‘정체가 대체 뭐지? 이놈은 왕비가 보낸 놈이 아닌 것 같은데.’ 태훈은 일단 상대가 생각하는 대로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죽어가던 너를 살려줬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네놈도 왕비가 보낸 놈이냐? 설마 왕위 포기 각서냐?”
“뭔지도 모를 소리는 집어치워. 얼른 서명이나 해.”
“웃기는 소리. 이게 뭔지 제대로 설명하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지.”
“그래? 나는 비폭력 주의자인데, 어쩔 수 없군.”
거구의 덩치가 일어나자 태훈의 시선이 올라갔다.
‘뭐가 저렇게 무식하게 커? 2미터? 그 이상 되는 것 같은데.’
기세에 눌린 태훈이 자신도 모르게 검을 움켜쥐었다.
“그러고 보니 네놈은 듀얼 적성이라고 소문이 나 있던데. 한번 붙어 볼 만하겠어.”
“오냐, 호락호락하게 당하진 않는다.”
태훈이 검을 뽑고 쇄도해 들어갔다.
쨍-
검과 금속 팔이 부딪히며 맑은 소리가 들려왔다.
제노비아의 왕비에게 선물받은 검을 통해 묵직함이 그의 손목을 통에 전해져 왔다.
“윽!”
“겨우 이 정도냐?”
상대는 가소롭다는 듯한 말과 함께 힘을 썼다.
태훈의 몸이 가랑비처럼 나가떨어지며 눈 위를 굴렀다.
“큭, 상처가……”
그제야 온몸에서 전해져 오는 눈사태의 후유증이 그를 엄습했다.
재빨리 신력을 사용하여 상처를 치유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호오, 마법과 신력인가? 그래서 듀얼 적성이라 부르는가?”
‘뭐야, 이놈.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건가?’ 세간에는 검술과 마법의 적성으로 알려진 그였다.
하지만 가면의 사내는 그를 마법과 신력의 적성으로 착각했다.
‘대체 정체가 뭐지? 저승의 문자도 그렇고 어설픈 정보라니. 저놈 설마 저승에서 온 놈인가?’
태훈은 혼란스러웠다.
포인트 양도도 그렇고 상대는 저승에서 온 인물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군. 저놈이 영업맨이 말하던 그놈인가?’
영업맨은 태훈이 환생 직전 기억의 보존을 비롯해 블랙 마켓의 물건 구입에 대해선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경고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