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달칵-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데스티노 공작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며칠째 이어진 협상을 이제 막 마친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수척해져 있었다.
선반에 있던 술병의 마개를 따 잔에 따른 공작은 몸을 돌렸다.
“헉! 하…….”
방 안에는 어느새 노인이 들어와 있었다.
“말빈, 기척 좀 내면서 다니면 어디가 덧나나?”
“크크, 많이 놀라셨습니까?”
“놀라다 못해 수명이 십 년은 줄어든 것 같군.”
“준비가 끝나서 뵈러 왔습니다.”
“쓸 만한 놈으로 준비했나? 다시 말하지만 왕자는 듀얼 적성을 가지고 있어.”
공작은 쇼파에 몸을 뉘였다.
“걱정 마십시오. 제자 중 가장 뛰어난 놈들로 셋을 뽑았습니다. 그 중 하나는 아주 대단한 놈이죠.”
“얼마나 대단하길래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지?”
“듀얼 적성을 가진 놈입니다.”
“호오…….”
3클래스 마스터와 암기를 다룬다는 말에 공작은 실망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왕자는 4클래스 마스터에 기사 서품을 받은 일반 기사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론 왕자를 상대하기 부족한 듯싶네만.”
“왕자야 대륙을 통틀어 수재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른 두 놈도 특별한 놈으로 준비했습니다.”
말빈이 다른 두 사람의 실력을 설명하자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 정도면 무리는 없겠지.”
“이번엔 공작님 차례입니다.”
공작은 말빈에게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그 서류에는 사절단의 명단과 소속 같은 프로필이 적혀 있었다.
“전력으로 중급 신관 하나에 견습 마법사 둘. 병사 여섯이 전부입니까?”
“알이라는 수호기사 하나가 붙어 있다. 듣자하니 아직 웨폰 마스터의 경지는 아니라는 듯하더군.”
“그럼 일반 기사군요. 다른 자들은요?”
“그냥 문관들이야. 전력 밖이네.”
“그렇군요. 그렇다면 따로 고용한 용병들로도 충분할 겁니다.”
“누굴 고용했지?”
“2급과 3급 용병 12명입니다. 모두 수배범으로 고용했으니 설사 일이 틀어져도 괜찮을 겁니다.”
“일이 끝나면 그놈들도 같이 없애 버려.”
“2왕비나 3왕비 때처럼 말입니까?”
“어허! 그 이야기는 다시는 꺼내지 말라 했거늘!”
“크크, 알겠습니다. 그럼 뒤처리는 공작님만 믿겠습니다.”
노인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사라졌다.
공작은 창가로 걸어가 술잔의 술을 단숨에 비웠다.
“젠장, 이번에 3왕자만 처리하면 저놈하고도 인연을 끊어야겠군.”
창밖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 * *
그 시각, 태훈이 이끄는 사절단은 국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심한 눈발이 그들의 시야를 막고 있었다.
짐이 많아 끌고 온 말들도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어하고 있었다.
“아니, 이제 곧 봄인데 무슨 눈보라가 이렇게 몰아쳐?”
“그러게 말입니다. 마중 나오는 자들이 제대로 올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없으면 어때. 우리끼리 가면 되지.”
“그냥 그들 말처럼 며칠 더 있다가 갈걸 그랬습니다. 이러다 옷이 다 젖어버리겠어요.”
알은 뒤에서 따라오는 제노비아의 기사를 보며 말했다.
제노비아의 왕성을 떠나오고 바로 다음 날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눈보라는 쉬이 그칠 기세가 아니었다.
경호를 맡았던 제노비아의 기사는 왕성으로 돌아가거나 근처 영지에서 눈보라가 그칠 때까지 기다릴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일정이 이미 많이 늦어버린 태훈은 권유를 거절하고 길을 서둘렀던 것이다.
알이 투덜거리자 태훈은 그에게 눈덩이를 던졌다.
“이제 젖을 걱정 없지? 자, 다들 힘내자!”
태훈은 그들을 격려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눈보라가 며칠째 휘몰아쳤는지 눈은 허벅지까지 쌓여 있었다.
“오, 눈이 그칩니다!”
눈발이 약해지자 저 멀리 산의 정상이 보였다.
* * *
스윽-
새하얀 눈이 깔린 산길에 목이 반쯤 잘린 시체가 끌리자 자국이 남았다.
시체는 구덩이에 던져졌고 구덩이엔 이미 여러 구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지워.”
한 사람이 지시하자 다른 자가 핏자국 위에 눈을 덮었다.
그 위에 다시 눈이 쌓이기 시작하자 흔적은 말끔히 사라졌다.
복면을 쓴 세 사람이 시체들을 치우고 있었다.
시체들은 전원 카르나스 국적의 병사 복장을 하고 있었다.
주륵-
검은 타이즈에 몸의 윤곽이 여성인 자가 팔에서 피를 흘렸다.
“지혈부터 해.”
“괜찮아, 별거 아니야.”
“멍청하긴, 피 냄새를 지우란 말이다.”
남자의 충고에 여성 복면은 가방에서 포션을 꺼내 상처에 뿌렸다.
상처는 금세 아물었다.
“고작 일반 기사 따위에 상처를 입다니.”
“이따가 잘할 수 있겠어?”
“물론, 문제없어. 조금 전에는 방심한 것뿐이야.”
눈 때문에 휘청거리는 틈에 상처를 입은 기억에 여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작은 방심이라도 이 일에 있어선 치명적이다.”
“너도 처음이잖아. 그렇게 불만이면 내가 빠지도록 하겠어.”
남자의 말에 발끈한 여성이 포션의 병을 집어 던지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녀석은 네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신경 쓰지 마.”
“누가 누굴 걱정해. 내 목숨 지키기도 바쁜데.”
말다툼하는 사이 현장은 말끔히 정리가 되었다.
여러 명의 사람이 처참하게 죽어간 현장은 소복이 쌓인 눈으로 말끔해졌다.
“언제쯤 도착한다고 했지?”
“연락대로라면 이제 곧 올 거야.”
“그럼 준비하자. 도엔, 너는 계획대로 숨어 있어라.”
“알겠어.”
복면 여성은 순식간에 현장에서 사라졌다.
“너와 나는 옷을 갈아입자.”
“아직 시간이 남았잖아. 이 옷은 보온 기능이 있단 말이야. 좀 더 기다려.”
“불평은…….”
두 남자가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 사이 멀리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쉬고 있던 두 남자는 재빨리 자루에서 옷을 꺼내 바꾸어 입었다.
그리고 잠시 후.
왕자를 앞세운 사절단이 산등성이에 도착했다.
모두가 눈길을 헤쳐 오느라 지친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일이 더 수월하게 풀릴 것 같은 생각에 둘에게서 미소가 절로 나왔다.
“너희가 마중 나온 자들이냐?”
“그렇습니다. 북부군에서 파견 나왔습니다.”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제노비아의 기사는 태훈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돌아갔다.
태훈은 자신을 마중 나온 자들을 보며 말했다.
“이것뿐이야? 둘이서 마중 나온 거야?”
“눈이 많이 와서 발이 묶였습니다. 저희가 먼저 왕자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나머지는?”
“산 아래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올라온 험난한 과정을 아는 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추운데 고생 많았네. 오래 기다렸어?”
“저희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사방이 눈이 꽤나 쌓였기 때문에 태훈은 그러려니 싶었다.
하지만 몇 발자국도 가지 않아 태훈은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잠깐 생각 좀…….”
태훈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다시 말을 몰았다.
그러고는 눈짓으로 조용히 알을 불렀다.
“병사들한테 혹시 모를 싸움에 준비하라 해.”
태훈이 조용히 속삭이듯 말하자 알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었다.
“네? 왜요?”
“이상하지 않아?”
“뭐가요?”
“젠장, 넌 눈이 옹이구멍이냐? 생각 좀 해봐라. 눈이 많이 와서 둘만 올라왔다고 했지. 꽤나 힘들었을 텐데 쟤들 옷이 너무 깨끗하잖아.”
태훈의 말에 알은 앞장서서 걷는 둘을 바라보았다.
눈이 쌓인 산길을 올라왔음에도 바지는 젖지 않았고 상의는 땀에 젖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수상함을 느낀 알이 말을 늦추며 뒤따라오는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병사들은 알의 말을 듣고는 검을 움켜쥐었다.
‘근데 두 명뿐인가? 아니면 일행이 있는 건가?’
매복이라면 큰일이었기에 태훈은 정령들을 불렀다.
‘주위에 다른 인기척이 있는지 봐줘. 있다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확인해 줘.’
두 정령은 기운의 형태로 태훈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흩어졌다.
태훈은 상황이 어이없음에 웃어버렸다.
물론 자신이 놓인 상황이 달갑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독살 미수라는 경험이 있었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선수를 칠까 하고 있던 차에 먼저 움직인 것은 상대였다.
재빠른 몸놀림으로 휘둘러지는 롱소드에 태훈이 타고 있던 말의 머리가 단숨에 잘려 나갔다.
그 기세로 검이 자신에게 날아들자 태훈은 가볍게 뒤로 젖히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챙-
칼 소리가 뒤에서 들리자 돌아보니 어디선가 나타난 병력이 사절단을 공격하고 있었다.
‘일행이 더 있었군.’
태훈이 상황을 판단하는 사이 다음 검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두 번째 공격은 알이 막아서며 막혔다.
“웬 놈들이냐! 감히 왕자 전하에게 검을 들이밀다니!”
안내하던 두 사람은 말없이 검을 휘둘렀다.
알이 동시에 두 명은 무리였기에 태훈도 검을 뽑아 들었다.
“파이어볼!”
“마법사?! 베리어!”
다른 한 사람이 마법을 사용하자 태훈이 다급히 방어 마법을 시전했다.
베리어에 부딪친 불덩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펑-!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터진 마법 덕에 후폭풍에 눈이 날려 시야를 가로막았다.
“3클래스 유저인가!”
검과 마법의 조합에 태훈은 당황했지만 이내 검을 고쳐 잡았다.
먼저 마법사를 처리할 요량으로 가볍게 검을 휘둘렀지만 적 마법사는 단검을 꺼내 들며 태훈의 검을 막았다.
‘요것 봐라?”
상대가 마법사이면서 검술도 할 줄 안다는 생각에 태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법이라면 내가 한 수 위다. 하지만 나처럼 검까지 능숙하다면 피곤해져. 이놈들, 단순한 놈들이 아니군.’
본 실력을 내기로 마음먹은 태훈의 검에서 오러가 치솟았다.
“오러!?”
오러를 본 마법사는 당혹해했다.
목표가 웨폰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고는 듣지 못했던 것.
오러가 둘러진 검은 여느 검과는 달랐다.
“어디 한번 해보자!”
“큭!”
태훈이 전력으로 부딪혀 오자 마법사는 다급해졌다.
마법으로 태훈의 검을 막았지만 오러의 검은 마법을 분쇄하며 마법사에게 날아들었다.
“이봐! 도와줘!”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느낀 마법사는 자신의 동료를 불렀다.
태훈은 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마법사를 마구 몰아붙였다.
방어에 급급해 자신의 마나를 모두 써버리자 마법사는 마나 고갈 증상을 겪는 듯 휘청거렸다.
“파이어 볼!”
마법사는 있는 마나를 모두 쥐어짜 마법을 날렸다.
하지만 마법은 태훈을 크게 벗어나 멀리 사라졌다.
마법은 산의 정상 쪽으로 날아가 폭발했다.
‘마나 고갈인가? 하긴 저때는 앞도 제대로 안 보이긴 하지.’
태훈은 그의 마나가 느껴지지 않자 성큼성큼 그에게 걸어갔다.
“넌 누구냐? 어떤 놈의 사주를 받은…….”
“크크크크크…….”
“훗, 웃어? 말해, 어떤 놈이 시켰어? 피나 왕비냐?”
상대가 웃자 태훈은 검으로 상대의 어깨를 쿡쿡 찌르며 다그쳤다.
쿠르르르르르-
뒤에서 들려오는 육중한 소리.
짐승의 소리나 사람의 목소리와는 다른 소리에 태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산의 정상부터 엄청난 흰 구름이 모든 걸 휩쓸며 내려오고 있었다.
다른 자들도 산울림에 놀라 동작을 멈추고 정상 쪽을 바라보았다.
“누…… 눈사태다!”
“모두 피해! 나무나 바위 뒤로 숨어!”
사람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살기 위해 사방으로 뛰었다.
태훈도 움직이려 했지만 마법사가 자신의 허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크크크크. 여기서 아무도 살아나갈 수 없다. 모두 여기서 죽어라!”
“이런 미친놈! 이거 안 놔!”
태훈은 온 힘을 다해 마법사를 떨어뜨리고 발로 밀어버렸다.
그 순간 태훈의 몸이 하얀 파도에 집어 삼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