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서류를 살펴본 공작은 놀란 눈으로 말했다.
“평화각서와 상호 군사 조약? 이게 뭡니까?”
“양국이 좀 더 확실한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굳이 이런 것을 준비하신 이유가 궁금하군요.”
“나랏일이란 것이 언제 급변할지 모르는 일 아닌가요. 저와 도리아 공주의 혼약만으론 약하고, 제노비아도 확실한 보증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태훈의 말에 공작은 잠시 뜸을 들였다.
뜬금없는 군사 조약의 전의를 살피는 듯했다.
그러곤 이내 뭔가를 알아챘다는 듯이 조용히 말했다.
“그럼 저희는 메드니안 왕자님의 거사를 대비해 군대를 준비하면 되는 겁니까?”
그는 태훈이 왕위 다툼을 대비해 구실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경위야 어떻든 현 국왕이 3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이 분명했다.
그럴 경우 지금의 왕세자가 그에 반발해 군사를 일으키게 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제노비아는 공식적으로 반란에 대한 원군이라는 대의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할 수 있었다.
공작의 말에 태훈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런 의미로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양국의 화평을 위해 준비한 문서입니다.”
“굳이 이런 게 필요가 있습니까?”
이제 곧 가족이 될 사이인데 구태여 문서가 필요하냐는 공작의 말이었다.
“저는 혼약이란 것보다 문서상으로 된 제대로 된 협정을 원합니다. 좀 더 자세히 읽어보시죠.”
공작은 다시 한번 꼼꼼히 문서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 읽고 난 공작은 큰 숨을 몰아쉬었다.
“일반적인 내용이군요. 연합군 이야기만 빼면요.”
태훈은 지구의 EU 같은 조합을 생각하고 있었다.
대륙에는 가장 군세가 강한 3개의 제국이 있었고 그중 세레니스 제국은 가장 강대한 국가.
나머지는 카나리스와 제노비아를 비롯한 중소국가 9개국이 존재했다.
이중 9개국 연합군의 창설을 희망하고 있었고 이것은 그의 목표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두 국가의 연합은 시작일 뿐입니다. 저는 9개국의 연합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게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해봐야지요. 솔직히 9개 국가를 통틀어도 세레니스 제국 하나를 견제하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굳이 힘을 뺄 필요가 없죠.”
“당장 우리나라와 아무드 국가는 대립 중입니다.”
“아무드는 나중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먼저 다른 나라들과 연합하여 몸집을 불리면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됩니다.”
태훈은 공작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9개국이 연합하게 되면 전쟁의 위협이 사라진다. 그러면 소규모 국지전도 사라지고 포인트도 적당히 쌓이겠지.’
거기다 더 큰 목적은 FTA에 있었다.
자신이 만드는 약은 몇 가지에 국한되지 않았다.
다양한 약을 만들려면 다양한 재료가 필요했다.
하지만 몇몇 재료는 관세가 너무도 컸고 수입 양도 극히 적었다.
또 대용량으로 만들어 단가를 낮추고 유통 인프라를 확실하게 하려면 EU 같은 체계가 필요했다.
“음, 조금 외람되지만 현실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죠. 당장 두 국가의 연합군은 문제가 없다 치더라도 앞으로 다른 국가들이 참여하게 되면 그 주둔지와 비용은 만만치 않을 겁니다.”
“모두가 공평하게 분담합니다. 그 이상 필요하게 되는 비용은 전부 제가 낼 겁니다.”
왕자의 말에 공작은 멍하니 있다가 잠시 후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굉장히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괜찮습니다. 아마 실정을 모르는 왕자라고 생각하셨을 테지요.”
“그런 것까지는 아닙니다만 왕자님이 아직 국정을 다루어보지 못하셔서 그런 걸로 사료됩니다. 그 돈이라는 것이 한두 푼이 아닙니다. 왕자님 혼자서 어떻게 해볼 만한 수준이 아닌 거지요. 9개국 연합군이라면 한 국가의 예산 정도는 우습게 들어가는 돈입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만한 재원은 충분히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시는 겁니까? 설사 왕자님이 카니리스의 국왕이 되신다 하더라도 그 돈을 감당하려 하면 당장 귀국의 귀족들이 반발할 겁니다. 외람되지만 카나리스의 국력이 그 정도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하나하나 뼈를 때리는 말에 태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물론 지금까지 무엇 하나 이루어놓은 것은 없었으나 최근 들어 성공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꿈을 꾸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당장 제노비아와 카나리스의 연합군 창설은 국왕의 허락을 받은 단계.
거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9개국 연합군은 최종 목 당장 이루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이제 겨우 첫 단계입니다. 단지 공작님께 말씀드리는 이유는 앞으로 있을 다른 나라와의 교섭에서도 든든한 아군이 되어달라는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상론 주의자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공작은 손안의 서류를 잠시 만지작거렸다.
‘왕자의 이상론이야 어찌 됐든 당장 카나리스와의 연합군은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다.’
“저희야 당장 아무드만 해결하면 되니까요. 헌데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위임을 받고 오신 겁니까?”
지금 왕자가 던지는 말들은 단순하게 볼 사항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국가와 국가가 맺는 조약에는 최고 권위자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그렇습니다. 제 아버님도 조약에 관한 모든 내용에 동의하셨습니다.”
태훈은 국왕의 위임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위임장에는 국왕의 날인과 함께 외무대신의 서명도 함께 적혀 있었다.
위임장을 확인한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귀국과 우리나라의 연합군 창설은 어떻게 구상하십니까?”
“저희는 병사 1천과 기사 30명, 주둔지는 제노비아의 영토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합군의 방위비 분담은 어떻게 됩니까?”
“병력을 파견하는 저희가 4. 제노비아가 6입니다.”
“음, 그건 좀 힘들 것 같군요.”
문제없이 협상이 진행될 것처럼 보였지만 공작은 제동을 걸었다.
‘역시 쉽게는 안 되는군.’
태훈은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됨을 느낄 수 있었다.
“비용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연합군 자체는 분명히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도움이 됩니다. 그건 귀국에게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돈 문제는 조금 다릅니다.”
“그럼 공작님이 생각하시는 비율은 어느 정도 입니까?”
“반반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공작은 태훈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도 제노비아와 카나리스의 연합군은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다만 그건 공주와 왕자가 결혼을 올리고 난 조금 더 훗날의 이야기였다.
카니리스와 제노비아의 공식 적인 연합 사실만 알려도 본래의 목적은 달성하는 상황.
생각지도 못하게 왕자가 먼저 연합군 이야기를 꺼낼지는 몰랐지만 그만큼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에 흥정에 들어간 것이다.
“반반이라……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가장 큰 혜택을 보는 것은 제노비아 아닙니까? 조금 양보해 주시죠.”
“카나리스는 국경이 맞닿은 곳이 저희뿐이지 않습니까. 공평하다고 보이는데요.”
태훈도, 공작도 물러섬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도 이야기가 평행선을 달리는 듯할 때 태훈이 패를 꺼내 들었다.
“좋습니다. 대신 마장기 1대와 전담 마법사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마장기와 마법사를요?”
공작은 머뭇거렸다.
마장기와 마법사는 국가 최대의 전략 자산.
아직 정식 혼약도 안한 상태에서 그런 자산을 내어주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던 것이다.
“마장기를 보내주시겠단 말입니까?”
“저희 카나리스는 마장기를 두 대밖에 운용하지 않습니다. 그중 하나를 보내 드리겠다는 겁니다.”
“으음…….”
공작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마장기 하나가 가지는 전력은 상대적으로 컸다.
병사 천 명 이상의 값어치가 있는 전력.
아니, 단순히 병력의 숫자로 비교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공작이 고민하는 사이 태훈은 바로 연타를 날렸다.
“대신 비용은 제노비아가 7. 저희가 3입니다.”
“7 대 3…… 그건 좀 무리가…….”
“저희 중요 전략 자산 절반을 믿고 내어드리는 겁니다. 그 정도는 해주셔야 제가 저희 귀족들을 설득하겠죠.”
태훈의 공세에 공작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래, 마장기 한 대의 건조에 들어가는 자금과 비교하면 그게 싸게 먹힐 수 있겠어.’
잠시 머뭇거리던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태훈이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으며 대화는 끝이 났다.
훗날 8개국이 참여하는 ‘남부 연합’이 창설되는 순간이었다.
* * *
제노비아에서는 연일 행사가 펼쳐졌다.
열기구의 도입과 카나리스, 제노비아 연합군의 창설 등 경사가 겹겹이 이루어진 결과였다.
태훈은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었으나 자신이 벌여놓은 잔치에 빠질 수는 없는 노릇.
더불어 태훈과 도리아 공주의 공식적인 결혼 날짜도 잡혔다.
“결혼이라…….”
제노비아의 왕궁을 떠날 준비를 마친 태훈은 착잡한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전혀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결혼하려니 마음이 복잡했다.
단순히 외모만을 보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쉽지 않았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런 데서 괴로울 줄이야.’
미의 기준이 전생과는 정반대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태훈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내심 왕족이란 환생에 기대를 품은 것 중 한 가지가 바로 혼인이었다.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아리따운 여인과 할 줄 알았던 백년가약이 무너져 내린 여파는 상당히 컸다.
태훈이 말없이 한숨만 푹푹 내쉬자 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냥. 착잡해서.”
“뭐가 착잡하신 거죠? 일도 잘 풀리셨잖아요.”
“결혼이.”
“네?”
“결혼이 하기 싫어.”
“무슨 농담을 그리하십니까. 설마 제노비아 3대 미녀라는 도리아 공주님이 성에 안 차시는 겁니까?”
“그러는 너는 소득 좀 있었냐?”
자신이 공사에 치이고 있을 때 수호기사란 녀석이 귀족 영애들을 만나고 다녔다는 것을 안 태훈이 물었다.
“네? 저요? 아휴, 제가 왕자님을 두고 노닥거리겠습니까.”
“그래서 누구야?”
“그런 일 없습니다.”
“그래? 다음에 너 말고 다른 기사 데리고 오면 되겠네.”
“오렌 남작가 영애와 편지를 주고받기로 했습니다, 각하.”
“에라이, 이 자식아!”
태훈은 알에게 로우킥을 날리며 분을 풀었다.
“왕자님도 공주님이랑 알콩달콩하셨잖아요!”
“알콩달콩은 무슨. 일이 바빠 죽겠는데.”
“그걸 왜 저한테 화풀이하십니까! 그리고 뭐 앞으로 평생 보실 사이이신데!”
“결혼이 하기 싫다니까!”
“아니, 대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
“안 들기보단 그냥 정 이상의 감정이 안 생겨. 내 이상형하고는 거리가 멀어.”
“거참 혼담이 오가실 때부터 안 내켜하시니. 대체 왕자님 이상형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 글쎄, 엘프 정도?”
“에에에엑!”
알은 마치 더러운 것을 피하듯 화급히 태훈으로부터 멀어졌다.
“그치?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혹시나 해서 다시 물어보겠습니다만 설마 빼빼 말라가지고 가죽만 남은 그 엘프요?”
“뭐 그림으로 봐선 그렇던데.”
“귀가 뾰족하고 코가 뾰족한 그 엘프요?”
“그래, 그 엘프가 맞는 것 같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알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태훈의 이마를 만졌다.
“이상하네, 열은 없으신데. 설마 독!?”
태훈은 다시 한번 로우킥을 날렸고 허벅지를 움켜쥐며 알이 쓰러졌다.
“아니, 말로 하시지 왜 때리세요!”
“내 마음이지.”
투덜거리는 알을 뒤로하고 다시 창밖을 내다보던 태훈이 중얼거렸다.
“역시 그 방법밖엔 없나…….”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태훈은 이내 마음을 굳힌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