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계약이 진행되는 동안 태훈의 심장은 쿵쿵거렸다.
선금으로 받은 500닢을 제외하고 나머지 개발비 명목의 대금 2,500닢.
그리고 기구 50대 분의 대금 1,500닢.
도합 대금화 4,000닢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굴러 들어오는 계약이었다.
그중 기구의 원가는 600닢이 채 되지 않는 금액.
‘이걸로 내 힘으로 나만의 연구소를 만들 수 있어!’
자신의 몫으로 떨어지는 금화를 생각하자 웃음이 절로 났다.
“왕자님, 이걸로 계약은 끝났습니다.”
데로이 남작이 마무리된 계약서를 넘겨주자 태훈은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다.
계약서를 나누어 가진 뒤 악수를 하는 것으로 계약은 끝이 났다.
“왕자님, 잠시 괜찮으십니까?”
계약을 끝낸 뒤 방을 나올 때 한 시녀가 그를 불러 세웠다.
다른 시녀들에 비해 좋은 옷을 입은 중후한 시녀였다.
“저는 라플레르 왕비님을 모시고 있는 시녀장입니다. 왕비님께서 왕자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라플레르 왕비님이시라면 제1왕비이신?”
“그렇습니다.”
남작에게 계약서를 넘기고 시녀장을 따라간 곳은 왕궁의 정원이었다.
그곳에는 펑퍼짐한 아주머니 한 명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왕비라 하여 피나 왕비와 겹쳐 생각하던 그의 예상과는 달리 라플레르 왕비는 인상이 좋아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왕비님. 처음 뵙습니다.”
“오, 어서 와요. 이쪽으로 앉아요.”
왕비의 맞은편에 앉자 시녀장이 다가와 물었다.
“차는 뭐로 준비해 드릴까요?”
“홍차 괜찮으세요?”
“아무거나 좋습니다.”
시녀장이 사라지자 왕비는 태훈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색함도 풀 겸 먼저 입을 연 것은 태훈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왕비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호호, 걱정해 줘서 고맙군요. 몸은 보다시피 좋아졌습니다.”
태훈은 제노비아의 제1왕비를 본 것이 오늘이 처음이었다.
처음 왔을 땐 병으로 인해 왕비는 몸조리 중이었다.
“딸이 시집을 간다는 말에 사위될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럼 어찌, 마음에 드십니까?”
“호호, 아주 마음에 들어요. 듣자하니 검도 쓸 줄 안다면서요?”
“아직 보잘것없습니다. 제 한 몸 지키기 위한 호신용이지요.”
“겸손하군요. 여봐라, 가지고 오너라.”
잠시 뒤 한 기사가 긴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상자는 태훈의 앞에 놓여졌고 그것을 열자 한눈에 보기에도 훌륭한 롱소드가 들어 있었다.
“좋은 검이로군요.”
“왕실과 인맥 있는 곳에서 만든 검입니다. 드워프가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드워프요?”
태훈의 눈이 빛났다.
이쪽 세상으로 와서 아직까지 이종족을 보지 못한 그였다.
“드워프라면 그 대장장이로 유명한 종족 말입니까?”
“모두가 대장장이는 아닙니다. 대부분 광산에서 노역으로 일하고 소수의 드워프만이 대장장이로 일하죠.”
“귀한 물건을 다 주시고. 감사합니다.”
한번 쥐어보고 싶었지만 왕비의 앞이라 상자를 갈무리하여 자신의 옆에 내려놓았다.
“그건 그렇고 내 여식은 어떻습니까?”
“도리아 공주님 말씀입니까?”
“솔직히 말해봐요. 내 여식이지만 가끔 나도 놀랄 정도로 쌀쌀맞을 때가 있답니다.”
“음…….”
비록 마음에 없는 혼인이긴 하나 장래 장모가 될 사람 앞에서 솔직히 털어도 될까 싶어 뜸을 들였다.
“당돌하신 공주님입니다. 마치 제 누이를 보는 것 같습니다.”
“왕자님의 누이라 하면? 어떤 분을 말씀하시는지?”
“아넬리아라고 합니다.”
“아, 들은 적 있어요. 몸이 많이 좋지 않으시다고.”
“네, 그렇습니다. 지금은 약을 복용하고 많이 좋아졌습니다.”
“약?”
태훈은 슬슬 영업을 해보기로 생각했다.
아직 생산 설비는 없지만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약이라면 약초로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겁니까?”
“약초뿐만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식재료도 가공해서 만들죠.”
“그걸 직접 만드신 겁니까? 왕자는 마법사라고 들었는데요?”
“사실 마법은 약을 위한 보조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약은 효과가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지금은 다른 사람들처럼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합니다.”
태훈의 말에 왕비는 큰 관심을 보였다.
왕비가 관심을 보이자 태훈은 작은 약병이 담긴 가방을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왕비님께서 몸살에 자주 걸리신다고 들었습니다.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이것도 직접 만든 건가요?”
“그렇습니다. 약재인 하슬(생강)을 주재료로 만든 간단한 약입니다.”
하슬은 실제로 사냥꾼들이 겨울에 많이 사용하는 약초였다.
추운 겨울 사냥꾼들이 힘들게 사냥을 한 뒤 돌아오면 피로회복용으로 끓여 먹던 약초.
거기에 태훈은 마늘과 양파를 같이 달였다.
“이게 효과가 있나요? 사실 약초보단 신관의 신력이나 포션이 더 효과가 좋을 텐데.”
왕비의 말에 태훈은 국왕에게 설명했던 것을 다시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왕비는 약병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병에는 신력이나 포션보다 약이 더 좋다라.”
“실제로 제 누이의 병은 차도가 없다가 제 약으로 호전되었습니다.”
“흠, 그래요?”
왕비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애니 약병의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그러자 작은 불빛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방금 그 빛은 뭐죠?”
“약이란 것이 워낙 쉽게 상하기 때문에 마법으로 최상의 상태를 보존하기 위해서 마법회로를 새겨두었습니다.”
“이 조그만 것에 마법회로가?”
“약병 자체가 원석을 조각해서 만든 것입니다. 최하급 원석이긴 하지만요.”
“그 비싼 원석을?”
“제 장모가 되실 분 아니십니까. 작은 선물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왕비는 흡족해하며 병을 들이키려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기사가 다급하게 그녀를 저지했다.
“왜 그러느냐?”
“왕비님. 약을 함부로 드시면 안됩니다.”
“설마 사위가 독이라도 탔을까 그러느냐.”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메드니안 왕자, 미안해요. 내 기사도 악의는 없었어요.”
기사는 당황해하며 왕비와 태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기사가 아주 믿음직스럽네요. 제 기사는 지금쯤 퍼질러 자고 있을 텐데 말이죠.”
태훈은 쿨하게 넘겼다.
“그럼 어디…….”
왕비는 병을 입가로 가져갔다.
왕비는 뭔가에 놀란 듯 움찔했다.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생기는 것을 보며 태훈이 설명했다.
“냄새는 좋지 않습니다. 덧붙이자면 맛도 그렇게 좋지는 않으실 겁니다.”
왕비는 병을 들이키며 얼굴이 씰룩였다.
그래도 끝까지 약병을 비우고는 입을 가렸다.
“냄새가 상당히 강렬하군요. 이래서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긴 힘들겠어요.”
자신의 입에서 나는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진 듯한 왕비의 말에 태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왕비의 안색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왕비님, 혹시 투자해 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투자요? 어디에 말인가요?”
“저는 약을 대중적으로 유통해 볼 생각입니다. 포션은 서민들이 손을 대기에 어렵고, 말씀드렸다시피 병에는 포션보다는 약이 더 유용합니다.”
“흠…….”
왕비는 손에 든 약병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약병을 내려놓은 왕비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약도 포션에 못지않게 비쌀 것 같은데요. 원석을 깎아 만든 병이라니요.”
“물론 대중에게 선보일 약에는 이만큼의 공이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단가를 최대한 낮추어 팔 생각입니다.”
“한 가지 더 있어요. 왜 투자를 받으려 하시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카나리스의 제정이 그만큼 힘든가요?”
대답이야 어떻든 왕비가 관심을 보이자 태훈은 투자에 대한 설명을 했다.
그는 자신의 회사를 주식회사의 개념으로 세우려고 하고 있었다.
100퍼센트 자신이 주주를 가지고 있으면 좋겠지만 시대상 그렇게 될 경우 국가 간의 분쟁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생의 경우 정치와 경제는 대부분 별개의 문제.
영향을 받더라도 글로벌 기업일 경우 그 영향이 적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상 국가 간의 트러블이 생길 경우 경제까지 영향을 받기 쉬운 편이다.
태훈은 국가 간의 문제에도 판매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면 다국적 지분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판매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면 여러 국가의 지분 참여가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하루아침에 정세가 바뀌는 것이 세상사 아닙니까. 제노비아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의 국가에도 지분 참여를 요청해 볼 생각입니다.”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걸 왜 우리 폐하께 말씀하시지 않고 저에게?”
“공공연하게 진행할 경우 다국적 지분 참여가 어렵게 될 수 있습니다. 남의 행복에 배 아파하는 경우가 생기니까요.”
“아녀자에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왕비님의 친정이 히스렐다 공국이시죠?”
“아하…….”
왕비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히스렐다 공국은 도시가 단 하나뿐인 작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지리적 입지상 제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교역로 중간에 버티고 있는 국가.
여러 왕국의 입지가 얽힌 곳이다 보니 중립적인 곳이었다.
태훈은 자신의 회사도 그곳에 설립하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중립적인 입지에 여러 국가의 지분이 들어간 중립적 회사.
그것이 태훈이 바라는 이상적인 형태였다.
“왕자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시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왕자가 만드는 약이 그렇게까지 획기적인 것이라면 공유할 필요가 있습니까?”
막대한 이익을 낼 수 있다는 물건을 왜 독차지하려 하지 않냐는 질문이었다.
“제가 바라는 건 이익이 아닙니다. 적자를 보지 않는 선에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게 되는 것을 바랄 뿐입니다.”
자신감 있게 말하는 태훈의 말에 왕비는 감탄한 듯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을 해보겠다는 왕비를 뒤로하고 방으로 돌아온 태훈은 바로 상자에서 검을 꺼냈다.
손잡이는 황금으로 만들었고 푸른 보석이 박혀 있었다.
검신은 1미터가 조금 넘는 것으로 평범한 검이었다.
그때 알이 방으로 들어오며 태훈의 손에 들린 검을 보고 반색했다.
“오, 무슨 검인가요?”
“왕비가 선물로 줬어. 멋있긴 한데 실전용치고는 너무 무겁군. 장식으로만 써야겠어.”
“왕자님이 검을 드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너는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내 옆에 항상 붙어 있어야 하는 것 아냐?”
“흠흠, 죄송합니다.”
알이 슬그머니 손을 뒤로 숨겼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손수건들이었다.
“적당히 하고 다녀라. 나라 망신 시키지 말고.”
“하하, 알겠습니다.”
태훈이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립튼 공작의 저택이었다.
국왕이 아닌 자신을 찾아온 태훈을 보고 공작은 깜짝 놀랐다.
“왕자님께서 저를 찾아오시다니 놀랐습니다.”
“공작님과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태훈은 나라의 실세가 누구인지 물색했다.
국왕파와 귀족파로 나눠지지 않고 한 목소리를 내는 제노비아.
그런 나라에서 가장 실세는 누구인가를 유심히 살펴본 결과 립튼 공작이 그 인물이었다.
‘국방대신이자 국왕의 먼 친척. 배경으로도 확실해.’
도리아 공주나 국왕과의 면담 때는 항상 립튼 공작이 함께하고 있었다.
담소 자리가 마련되자 태훈은 조용히 몇 개의 양피지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