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태훈이 제노비아로 향하던 중 먼저 들른 곳이 있었다.
어둠의 정령이 있는 포드령.
환자들의 격리 조치는 풀려 있었고 집중 관리를 받고 있었다.
폐광에 도착한 태훈은 오리진 원석이 담긴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배낭의 덮개를 열자 잠시 후 검은 얼룩들이 한데 모여 다시 늑대의 형상을 이루었다.
“약한 기운이긴 하지만 상당한 원석이군.”
“어때, 이 정도면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세 달은 문제없을 것이다.”
“그럼 여기로 들어가. 더 이상 마을 사람한테 폐를 끼치지 말고.”
“좋다.”
배낭 안으로 늑대가 사라지자 태훈은 배낭의 덮개를 닫았다.
태훈이 산에서 내려오자 분주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왕자님, 오늘은 이곳에서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왕자님의 처소는 따로 마련해 두었습니다.”
처소는 비어 있는 집이었다.
정리를 마친 태훈은 커튼을 닫고 배낭을 열었다.
“배낭에서 잠시 나와주겠어?”
“내 현신에는 마나가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텐데.”
“느긋하게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
정령이 배낭에서 나오자 태훈은 묵혀두었던 질문을 던졌다.
“네 주인은 잠들었다는데 죽은 거야?”
“말 그대로 잠이 든 것뿐이다. 수면에 들었다는 말로 정정하지.”
“그렇다면 혹시 네 주인은 드래곤인가?”
“그렇다.”
“이름은? 언제 잠들었지?”
“블랙 드래곤 라미트라스. 잠에 든 지 500년이 좀 넘은 것 같군.”
태훈은 수도에서 조사했던 드래곤들에 대한 기억을 되짚었다.
길게는 천 년도 잠든다는 드래곤은 명실상부한 중간계 최강의 생명체.
개체 수가 얼마 되지 않는 전형적인 판타지 생명체였다.
“너 같이 정령계로 돌아가지 못한 존재는 몇이나 되지? 그리고 네 주인은 왜 너희를 두고 잠들어 버린 거야?”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네댓 개체는 될 것이다. 그리고 주인이 언제 깰지는 나도 알 수 없다.”
정령은 자신의 주인이 500여 년 전 전투를 겪고 나서 심한 부상을 입었다고 말했다.
그 상처의 치유를 위해 급히 동면에 들었기에 자신과 같은 정령들이 돌아갈 기회를 잃었다고 했다.
“그 정도로 경황이 없었다고?”
“상대는 무척이나 강했지. 소멸당한 동료도 상당했다.”
“그 정도면 엄청난 싸움이었겠는데. 하지만 그런 기록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어.”
자신이 본 기록은 약 천 년 전에 있었던 기록이었다.
드래곤 슬레이어와 드래곤의 싸움.
결과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참패로 끝났다는 기록이었다.
거기에 드래곤의 분노로 도시 하나와 2만 명이 넘는 생명이 사라졌다.
그만큼 드래곤을 건드린 대가는 참혹했다.
“싸움은 해상에서 진행되었다. 기록에 남을 만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겠지.”
“네 주인과 싸웠다는 인물에 대한 정보가 있나?”
“모른다.”
“그날의 기억을 되살려 봐.”
정령은 그날의 기억을 회상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나의 주인은 레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 하나가 찾아왔다.”
“인간?”
태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에게 치명상을 입힌 정도의 존재라면 적어도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이라고 추측했었다.
“확실해?”
“확신할 수 있다. 그의 외형은 인간이었고 인간의 언어를 쓰고 있었다.”
“그 인간의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내 주인과 뭔가 거래를 하려는 듯하더군.”
“거래? 인간이 드래곤과 거래를 할 정도의 격이 있던가?”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내 주인과의 거래가 틀어진 듯하자 먼저 검을 들이민 것은 그 인간이었다.”
정령은 자신의 본 그날의 회상을 늘어놓았다.
인간과 싸움을 벌이던 드래곤은 시간이 점점 지나자 자신이 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장소를 옮겼다.
해상이라면 쫓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상대는 해상까지 드래곤을 쫓아왔다고 했다.
“잠깐, 방금 검을 쓴다고 하지 않았어? 비행 마법은 7클래스라고. 마법과 검술을 둘 다 쓴다는 거야?”
“솔직히 그 당시엔 내 주인도 놀라는 듯했지. 나 역시 적잖이 놀랐다. 하지만 너를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날 보고 바뀌어? 왜?”
“네 안에서 세 가지 기운이 느껴진다. 푸른 마나와 붉은 마나. 거기다 오리진의 기운까지 느껴지는 군.”
정령의 말에 태훈은 입을 다물었다.
‘상급 정령은 힘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인가?’
태훈이 침묵을 지키는 것을 본 늑대는 다시 한번 질문을 해왔다.
“어째서 인간이 세 가지 기운을 쓸 수 있는 거지? 그 어떤 존재도 듀얼 적성이 한계인 것으로 안다. 그건 드래곤도 마찬가지.”
“음, 뭐 내가 좀 특별하긴 하지. 그나저나 그 인간은 그 이후로 어떻게 됐어?”
“나도 모른다. 난 주인을 따라 피신했으니까.”
태훈은 정령의 말을 정리했다.
역사서에 남지 않은 인간과 드래곤의 싸움.
드래곤을 궁지로 몰아넣을 정도의 엄청난 인재.
그런 인간이 드래곤에게 거래를 하려 했다는 점.
‘하지만 벌써 500년이 흘렀다. 인간은 이미 죽었을 테니 궁금하면 드래곤에게 물어봐야 하는 건가?’
태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목숨이 여럿도 아니고 드래곤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힘을 좀 더 기르면 그 인간처럼 드래곤과도 마주할 수 있을 정도가 될 순 있겠지.’
태훈은 자신의 본심을 꺼냈다.
“너와 계약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지?”
태훈은 정령과의 계약이 하고 싶었다.
정령까지 부린다면 자신의 모든 적성을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
자신의 안전에 훨씬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였다.
거기다 인간계에는 정령에 대한 정보가 매우 적었다.
실제로 오랫동안 정령 적성을 위해 정령에 대해서 공부했지만 이렇다 할 정보가 없었던 것.
당연히 정령 소환에 대한 방법조차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지금의 주인에게 얽힌 몸. 중복 계약은 할 수 없다.”
“그 주인은 지금 부재중이라며. 언제 깰지도 모르는데 계속 이렇게 기생하면서 살 거야?”
“계약을 파기하려면 주인의 허락이나 나보다 상위의 존재가 허락해야만 한다.”
“너보다 더 상위의 존재라면 정령왕?”
“지니급 정령 혹은 정령왕이다. 그리고 지금 네 마나량으로는 나와의 계약은 무리라고 말했을 텐데.”
태훈은 입맛을 다셨다.
현재 자신의 푸른 마나량은 4클래스.
1년 전에 도달한 뒤로 발전이 없었다.
신력을 담당하는 붉은 마나 역시 중급 신관 정도의 양.
그나마 오리진의 양이 조금 더 높아 상급 웨폰 마스터의 경지였지만 이 역시 반 년 전에 멈춘 상태였다.
“그럼 너보다 약한 정령은 가능해?”
“나와 대화가 가능한 것을 보면 정령과의 친화력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럼 정령이랑 계약하는 법을 알려줘.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
“좋다.”
태훈은 정령이 알려주는 대로 바닥에 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육망성을 중심으로 한 진이 완성되자 정령이 설명했다.
“육망성의 각 끝자리에는 각 원소를 상징하는 물건을 놓아야 한다.”
“물건이라…….”
태훈은 집을 뒤져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원소는 총 6개로 땅, 불, 바람, 물, 빛, 어둠이었다.
그리하여 찾아낸 것은 벽에서 긁어낸 흙, 물통에 있는 물, 불이 붙은 양초였다.
“바람과 빛. 어둠이 없네.”
“바람의 자리는 아무것도 두지 않아도 된다. 어둠의 자리에는 내 기운을 두면 된다.”
“그래도 빛이 없잖아.”
“제일 좋은 것은 태양석이다.”
“태양석? 아, 잠깐만.”
태훈은 자신의 짐에서 예복을 꺼냈다.
제노비아에 도착하여 환복하려던 예복에 태양석으로 만든 붉은 단추가 달려 있었다.
준비가 완료되자 정령은 태훈에게 눈을 감고 육망성의 안에 들어가 앉으라고 했다.
“이러면 되는 거야?”
“그 안에서 정신을 집중해라. 그러면 너와 상성이 맞는 계열의 정령이 답을 할 것이다.”
“정신을 집중하라고 해도…… 그냥 명상만 하면 되는 거야?”
“오직 정령과 계약을 하고 싶다고만 생각해라. 넌 적성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태훈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몽롱한 듯한 기분과 함께 깊은 고요 속에 잠겼다.
* * *
“어머나!”
드넓은 잔디 위에 있던 여성이 나지막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본 것은 희귀하다는 다섯 잎 클로버.
정령계에서도 백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행운의 상징이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려나?”
그녀가 클로버에 손을 가져가려는 찰나 거대한 말발굽이 잎을 짓밟아 버렸다.
“이런 썅! 밟힐 뻔했잖아!”
그녀는 손을 잽싸게 빼며 욕을 내뱉었다.
그러곤 3미터가 넘는 말을 향해 로우킥을 날렸다.
“조심하라고! 이런 말대가리 새끼야!”
“누가 어둠의 정령이고 누가 빛의 정령인지 정말 심각하게 고민되는 발언이군.”
한숨을 내쉬며 말한 말은 거대한 흑마였다.
“너 지금 뭘 밟은 건지 알아? 소녀의 순수한 동심을 짓밟은 거라고!”
“3천 살 먹은 소녀의 동심 따윈 알고 싶지 않아.”
“젠장, 굴에만 처박혀 있는 녀석이 여긴 왜 왔어?!”
“호출이다. 소환의 종이 울렸어.”
소환의 종이라는 단어에 여성은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쳇, 그래봐야 또 엘프겠지.”
“엘프든 오크든 종이 울리면 가봐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말의 설득에 여성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말과 여성이 도착한 곳에는 다른 존재들도 있었다.
“미친년 왔는가.”
“어따 대고 미친년이래! 성깔 드러운 노인네가!”
온몸이 불타는 듯한 형상을 한 노인이 가볍게 여성의 말을 무시했다.
“그놈의 성깔은 여전하군.”
“다들 그만해요. 오랜만의 종인데 반갑지 않나요?”
푸른색 긴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성이 둘을 말렸다.
“그나저나 오랜만의 종이로군.”
“보나마나 엘프겠지.”
여섯 존재들은 저마다 각자 한마디씩 내뱉었다.
땅의 지니는 거대한 석조 골렘.
물의 지니는 푸른색 긴 머리의 차분해 보이는 여성.
바람의 지니는 형체가 희미하게 보이는 중성체.
불의 지니는 온몸이 불타고 있는 듯한 남성 노인.
어둠의 지니는 거대한 흑마.
빛의 지니는 금발의 여성으로 입이 험했다.
“그래서 누구야?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고.”
빛의 지니가 귀찮은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게 좀 이상해. 색은 보이는데…….”
물의 지니가 가운데 놓인 수정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수정구는 지상계에서 정령의 소환의식이 발동하면 나타나는 물건이었다.
지니들은 수정구에서 보인 색상과 문양의 형태를 보고 계약자의 수준에 맞는 정령을 내려보내곤 했다.
“무슨 소리지? 색은 보이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형태가 두 개가 보여요. 그것도 삼각형으로 두 개.”
“수정구도 고장난 거 아니야? 왕들보다 더 오래된 물건이잖아.”
빛의 지니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왕을 불러야 할까?”
거대한 흑마가 물었다.
“불러. 불러서 수정구를 바꿔달라던지 해야지. 이래선 일을 못 하잖아.”
“맨날 풀밭에서 머리에 꽃만 꽂는 광년이 일은 무슨.”
“노망난 늙은이가 죽어볼래? 앙?”
“그만들 해요. 지금 왕을 불렀으니까 경거망동하지 마세요.”
물의 지니가 상황을 정리했다.
잠시 후 구슬만 한 푸른빛이 나타나자 지니들은 구슬 앞에 무릎 꿇었다.
“물의 정령왕을 뵙습니다.”
티격태격하던 각자의 개성은 온데간데없이 정중한 말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