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국경 근처에 도달하자 제노비아 왕국의 남부군 병사들이 사절단을 이어받았다.
제노비아 왕국은 역사가 700년에 이르는 유서 깊은 나라였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도 제롬은 웅장함이 카나리스 왕국과는 남달랐다.
카나리스 왕국의 왕자가 혼약을 위해 방문한다는 소식은 금세 수도에 퍼졌다.
태훈이 탄 마차가 수도에 들어서자 길거리에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제노비아 왕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마차의 길을 터주기 위해 마중을 나왔다.
“제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궁정 기사단 소속의 딘레이라고 합니다.”
“반갑소, 데로이 남작이라고 하오.”
짧은 통성명 이후 마차는 왕궁을 향해 움직였다.
마차가 왕궁에 도착하고 태훈과 남작은 게스트룸으로 안내되었다.
“제노비아가 상당히 큰 나라인 것 같은데.”
“한때 아무드 왕국의 영토 절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여기가 대륙 남부의 곡창지대라고 했었나?”
“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영토가 평지이니 부러울 따름이죠.”
적도에 걸친 카나리스는 울창한 산림과 산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식량 생산량은 낮은 편이었고 대부분의 식량은 제노비아에서 수입하는 부분이 많았다.
카나리스는 광산에서 나오는 원석과 함께 철광석이 주 특산물.
제노비아는 곡물과 암염에서 나오는 소금이 주 특산물이었다.
서로에게 필요한 자원들을 가지고 있는 이웃 나라.
덕분에 이번 혼약은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데로이 남작이 뭔가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폐하께서 주신 편지입니다. 도착하면 드리라 하셨습니다.”
“무슨 내용인데?”
“읽어보지 않아서 내용은 모르겠습니다.”
남작이 준 편지를 읽던 태훈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거기엔 지령이 있었다.
“대가 없이 식량을 가져오라고?”
“올해 수확량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식량을 조달하라니. 이런 건 무리잖아.”
“아마도 왕자님의 외교 능력을 시험해 보시려는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을 성공하신다면 왕자님의 입지도 올라가지 않을까요?”
태훈은 내키지 않았다.
아무런 준비도 없는데 식량을 가져오라는 것.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설사 일을 성사시키더라도 자신의 입지가 올라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아버님이 작정을 하신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다고 폐하의 명령을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지.”
식량은 중요한 문제였다.
수확량이 좋지 않다는 것은 겨울 내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아사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왕위에 가까워지는 것은 싫지만 이건 포인트를 벌 수도 있는 문제다.’
태훈은 식량과 거래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제노비아가 당장 고민하는 문제가 아무드 왕국과의 분쟁인가?”
“아무래도 그렇겠죠. 이번 혼약도 아무드 왕국을 견제하기 위한 정략결혼이니까요.”
“돈이 없는 국가는 아니니 결국 군사력을 증강시켜 주는 문제인가?’ 하지만 그것은 실현이 불가능했다.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문제는 단 시간 내에는 불가능했다.
뭐가 좋을지 고민하던 태훈에게 한 사람이 찾아왔다.
”국왕 폐하께서 메드니안 왕자님을 찾으십니다.”
“알겠네. 곧 찾아뵙겠다고 전하게.”
남작은 태훈의 환복을 도왔다.
준비를 마친 태훈이 알현실로 들어가자 제노비아의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저게 선안인가?”
“160년만의 선대의 증표라는군요. 마법사이면서 기사라니 앞날이 기대됩니다.”
“체격이 상당하군요. 올해 열여섯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은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환대 속에 마주한 제노비아의 국왕은 펑퍼짐한 몸매의 노인이었다.
‘연배는 아버님과 비슷해 보이는군.’
그 옆으로는 왕족으로 보이는 국왕의 식솔들이 보였다.
그중에는 5왕녀인 도리아 공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존안을 뵈어 영광입니다. 카나리스 왕국의 3왕자인 메드니안 에란겔이라고 합니다.”
“짐이 국왕인 리니어스다. 먼 길을 오느라 수고 많았네.”
“따듯한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이쪽은 저를 보좌하는 데로이 남작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폐하. 데로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저희 폐하께서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형식적인 인사와 선물을 건넨 뒤 환영식에 참석한 태훈은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기 바빴다.
잠시 후 도리아 공주가 다가오자 귀족들은 자연스레 자리를 비켜주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사정이 그렇게 됐습니다. 지방에 그림자 병이 도졌다길래 그걸 조사하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림자 병이라면 전염병 아닌가요? 거길 다녀오셨다고요?”
도리아 공주가 살짝 뒷걸음질 쳤다.
그러고는 제정신이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 간 사실로 알았습니다. 그림자 병은 전염병이 아닙니다.”
“신관들조차 방도가 없는 전염병이라고 하던데요.”
“그 병은 사람을 죽이는 병이 아닙니다. 쇠약해지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낫는 병입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아직 정식으로 보고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제가 장담합니다. 모든 건 마족의 짓이었습니다.”
“마족? 마족을 처리했다는 겁니까?”
“힘들었지만 다행히 상대가 약한 놈이었습니다. 나중에 제노비아 왕국에게도 정식으로 보고를 보내겠습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공주는 이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미간이 좁혀졌다.
“그럼 이번 방문은 약혼보다는 전염병에 대한 조사가 우선이었다는 거군요.”
오라로 그녀의 기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태훈은 애매모호한 대답을 꺼내놓았다.
“겸사겸사죠. 약혼은 서로에게 이익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기껏 내놓은 대답도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간의 주름은 그대로였다.
대화의 주제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제노비아도 상당히 발전한 나라더군요. 수도도 그렇고 카나리스 보다 규모가 커 보였습니다.”
“대부분이 평야이니까요. 산세가 험한 카나리스는 불가능하죠. 하지만 그만큼 카나리스는 천연의 요새가 아닙니까.”
“그럼 우리나라가 제노비아에게 도움이 될 것이 원석과 철광석 말고는 없습니까?”
“저희는 상아탑과 거래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원합니다.”
“그건 마장기 때문인가요?”
“…….”
태훈의 물음에 공주는 대답을 아꼈다.
마장기는 군력에 있어서 3대 요소 중 하나로 마법의 결정체였다.
국가마다 크기와 형태가 조금씩 다르지만 핵심적인 것은 그 안에들어가는 마법회로였다.
수십에서 백 톤까지 나가는 거대한 철갑 덩어리가 움직이기 위해선 막대한 동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원석과 마법회로.
그중 마법회로는 상아탑의 전유물이라고 할 만큼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되고 있었다.
카나리스는 태생이 마법사의 나라라고 할 만큼 상아탑과는 가까운 나라.
그 때문에 모든 왕국을 통틀어 마법회로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태훈도 마법회로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정보에 의하면 아무드 왕국은 비밀리에 마장기의 수를 늘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건 믿을 만한 정보가 못 됩니다. 아실 텐데요? 나라마다 마장기의 제한 숫자가 있습니다.”
보병과 기마병이 주력인 병력 구성에서 거대한 철갑 거인은 압도적이었다.
지구로 따지자면 탱크 같은 존재.
거기다 공성 병기로도 쓸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큰 전쟁도 한 번 있었다.
그 전쟁 이후 상아탑은 철저하게 각 국가에 대한 마장기의 마법회로 수출을 제한하고 있었다.
거기다 마장기의 원동력이 되는 원석 또한 고순도의 원석으로 카나리스 왕국은 그런 원석의 국외 반출은 철저히 관리하고 있었다.
“상아탑이 자신들이 만든 조약을 어기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무드 왕국에서 기체의 보유량을 늘린다는 확실한 정보가 있습니다.”
“기체가 많아도 마법회로가 한정적이면 무용지물입니다. 스페어 개념의 기체겠지요.”
“저희도 그러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라는 말이 괜히 있진 않겠죠.”
공주의 단연한 태도에 태훈은 잠시 대답에 뜸을 들였다.
“상아탑에 한번 확인을 해봐야겠군요. 제 마법 스승인 분에게 여쭈어보겠습니다.”
“그래주시면 저희야 고마울 따름이죠. 상아탑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조직은 카나리스 말고는 없으니까요.”
그때 데로이 남작과 한 남자가 다가왔다.
공주와 함께 카나리스를 찾아왔던 남자였다.
술이 들어갔는지 두 사람 모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여기들 계셨군요. 파티의 주인공들이 자리를 빛내주실 때가 왔습니다!”
파티는 항상 무도회를 겸하고 있었다.
금새 홀의 중앙이 비워지며 자리가 마련되었다.
어느새 궁정 악단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태훈은 예법대로 공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리를 빛내러 가보실까요?”
“그러죠.”
무도회의 곡은 대부분 느린 음악이었다.
여자든 남자든 성별을 막론하고 전부가 큰 몸집이었기에 애당초 빠른 곡은 무리였다.
태훈은 천천히 움직이며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다.
“제노비아는 안정적인 기반이 있고 자랑인 기병이 있습니다. 지형 또한 기병에 유리한 평야인데 아무드를 무서워할 필요가 있습니까?”
“평야인 것은 장점이지만 곧 단점입니다. 그만큼 대량의 공성병기에게 쉽게 노출이 되죠. 그 정도는 아실 줄 알았는데요.”
“병법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실제로 태훈은 병법이 큰 관심이 없었다.
자신은 사람을 살리는 방법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전쟁이나 병법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한 곡이 끝나자 이번엔 귀족들도 나서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기사 서품까지 받으셨다면서 병법에 관심이 없다고요?”
“검술은 어디까지나 제 몸을 지키는 수단입니다. 그러는 공주님은 병법도 잘 아시나 봅니다?”
“흉내 낼 정도는 됩니다.”
“그럼 내일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안내를 말하시는 거죠?”
“국경을 보고 싶군요. 가족이 될 나라인데 그렇게 걱정인 아무드 왕국과의 국경을 보여 주시죠.”
“아버님에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두 번째 곡까지 끝나자 태훈은 국왕에게 쉬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이에 국왕은 먼 길을 오느라 피곤했을 테니 쉬라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국왕은 태훈은 불렀다.
“공주에게 들었다. 하급 마족을 처치했다고?”
“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림자 병에 대해 조사하던 중 그 원흉을 알게 되었습니다.”
“혼자서 마족을 무찔렀다는 이야기인가! 영웅이라 불리어도 아깝지가 않도다!”
“과찬이십니다. 다행히 아주 약한 마족이었습니다.”
“그럼 앞으로 우리나라도 그림자 병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나?”
“마족이 사라졌긴 하나 그 힘이 남아 있으니 당분간은 병이 유지될 겁니다. 하지만 전염은 없을테니 안심해 주십시오.”
국왕은 크게 기뻐했다.
그러고는 전날 공주를 통해 부탁했던 국경 시찰을 허용해 주겠다고 말했다.
수도 제롬과 국경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평야인 만큼 도로가 직선으로 뻗어져 있었고 국토는 종단 길이가 짧고 횡단 길이가 길었다.
마차로 이틀 만에 국경에 도착한 태훈은 탁 트인 평야와 마주할 수 있었다.
“대단하군요. 이 정도나 되는 평야가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아무드 왕국의 요새까지는 400키란 정도입니다. 기병으로 달린 다면 하루 반 정도면 도착합니다.”
“요새까지가 전부 평야란 말입니까?”
“중간에 강이 하나 있긴 하지만 그렇습니다.”
상황을 설명하는 요새 대장의 말의 말에 태훈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카나리스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남한 전체 정도 되는 거리가 전부 평야란 말이잖아. 어마어마한데.’
거기다 평야는 비옥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시야가 트인 만큼 적의 침입도 쉽게 눈치챌 수 있겠군요.”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군마로 3일 거리니 적이 보이기 시작하고 나서 대응하기엔 늦습니다.”
“중간에 감시초소 같은 건 없습니까?”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국경이다 보니 사람의 왕래가 적어 몬스터 서직지가 군데군데 많습니다.”
상황을 보던 태훈은 불현듯 스치는 아이디어에 자신의 손바닥을 쳤다.
“그렇군요. 몬스터 때문에 감시 초소의 운영이 쉽지 않다는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항상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떠올린 아이디어라면 몬스터 따윈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 이거라면 충분히 식량과 딜을 할 수 있겠어.’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인 태훈은 다시 서둘러 제롬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