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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2만 포인트로 환생하기-8화 (8/150)

8화

공주가 방문한 지 수일이 흘렀다.

태훈은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을 그녀와 함께 보내야만 했다.

그간 태훈은 이야기의 중심을 혼약을 피하는 쪽으로 몰고 갔다.

하지만 공주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누가 강요하는 인생 말고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입에 발린 말도 해보았다.

하지만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왕족에게 있어 정략결혼을 사명으로 아는 공주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라의 색도 그렇고 나한테 악의는 없다. 그렇다면…….’

그는 피할 수 없다는 이용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정했습니다. 이 혼약 받아들이죠.”

“호오…….”

공주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국왕이 되기로 하신 겁니까?”

“아니요, 그건 아마 죽을 때까지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받아들이시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원치 않는 혼약을 하시면서까지 왕자님이 얻는 것은 뭐죠?”

그녀의 오라가 잠시 흔들렸다.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에 태훈은 간결한 대답을 내놓았다.

“뭐 저도 시간이라고 해두죠. 거기다 제 목숨까지.”

“저와 제 나라를 방패로 삼겠다는 말씀이군요.”

실제로 독살까지 당할 뻔한 태훈에게 이웃 왕국과의 혼인 관계는 든든한 방패였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노비아 왕국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습니까. 나중의 일이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국제 정세고.”

“그렇군요. 파혼이 결론입니까?”

“말해보시죠. 귀국이 아무드 왕국을 대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그 정도쯤은 계산을 해보셨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태훈은 그녀가 명석한 인물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던 공주가 입을 열었다.

“3년입니다.”

“음, 좀 길군요.”

태훈은 신음을 흘렸다.

약혼으로 정할 경우 결혼까지에는 그 준비에 시간이 걸린다.

자신의 위에 있는 형들이나 누나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 시간은 약 2년.

약혼 사이로 3년까지 간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뭐 1년 정도야 벌 수 있겠지.’

사실 이번 혼약으로 태훈은 적지 않은 것을 챙길 수 있었다.

그가 말한 대로 자신의 목숨을 지켜줄 방패로 쓸 수도.

또 국왕의 마음에 들어 자유롭게 국고를 축낼 수도 있었다.

‘적을 더 늘릴 수도 있긴 하겠지만 혼약 단계라면야 급작스럽게 일을 벌일 단계는 아니겠지.’

“서로 만족한 결과를 얻은 것 같네요.”

“그럼 언제쯤 돌아가시는 겁니까?”

“근 시일 내에 돌아가야겠죠.”

“그럼 저는 아버님께 경과를 보고 하겠습니다.”

태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가자 그녀가 그를 불러 세웠다.

“잠시만요.”

“뭔가 더 말씀하실 게 있으십니까?”

“혹시 국왕이 되는 것이 싫어서 저와의 혼약을 기피하시는 것이 이유의 전부인가요?”

“그것도 이유 중 하나죠.”

“하나라면 다른 것은?”

“전 제가 하고 싶은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떠밀려서 하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아서요. 그럼.”

태훈이 방을 나가자 그녀는 부채를 만지작거렸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종잡을 수 없는 남자네.”

그간 태훈을 본 그녀의 솔직한 평가였다.

두뇌가 명석하고 마법사와 기사의 소질을 둘 다 가진 인재.

둘 중 하나의 소질만 있더라도 자신이 본 남자들은 거만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다재다능한 인간이 정말 국왕의 자리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첫 대면에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하다니……’

그렇게 생각한 공주는 헛웃음을 지었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공주였다.

한편, 태훈의 결심을 들은 국왕은 매우 흡족해했고, 3일 후 공주는 편지를 들고 본국으로 귀국했다.

태훈은 근심을 덜고는 항생제 제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반면 제노비아 왕국과의 혼사가 정해지자 카나리스 왕국의 정계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 *

시간이 흘러 공주가 돌아간 지 두 달이 흘렀다.

제노비아에서도 혼약을 반기는 서신이 도착.

서신에는 메드니안 왕자의 자국 방문을 부탁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사이 겨울이 찾아왔다.

태훈은 만들어진 애플 사이다를 토대로 항생제의 최종 단계에 접어들었다.

식초를 베이스로 만드는 천연 항생제에는 여러 재료가 필요했다.

마늘과 양파, 통후추가 주원료였고 이곳에서 찾을 수 없는 재료는 대체품을 넣었다.

“생강이랑 고추냉이가 없어도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나저나 통후추가 비싼가? 너무 적네.”

지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탕이나 소금, 후추 같은 것이 상당한 비싼 가격이었다.

‘기술만 있다고 되긴 힘들구나. 재료 수급부터 원활하기가 힘들어.’

그런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왕궁에 한 무리가 찾아왔다.

붉은색과 흰색 옷감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은 자들.

머리에 커다란 관을 쓴 사람들이 왕궁을 찾은 것이다.

“오, 메드니안 왕자님! 그간 잘 계셨습니까!”

그중 맨 앞에 서 있던 노인이 태훈을 보고 반갑게 달려왔다.

“카를로스 집정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제노비아 왕국의 왕녀와 혼약을 하기로 하셨다면서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카를로스 집정관은 정말로 기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태훈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왕궁에는 어쩐 일로…….”

“지방에 그림자 병이 도진 모양입니다. 오늘은 그것을 보고하러 왔습니다.”

“그림자 병이라면, 돌림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태훈은 왕실 서고에서 본 내용을 떠올렸다.

원인은 모르나 주로 겨울철이 되면 나타나는 돌림병.

가슴 부근에서 시작되는 검은 반점이 전신으로 퍼지며 죽어가는 병이었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요즘은 발길이 뜸하십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집정관이 능글맞은 웃음을 치며 태훈에게 달라붙었다.

사실 태훈에게 있어 집정관이나 그가 속한 교황 총국은 달갑지 않은 족속들이었다.

4대 신전을 통괄하는 교황 총국.

동시에 포션과 신력을 독점하며 막대한 이득을 올리고 있는 조직이었다.

교황 총국의 역사는 길었지만 카나리스 왕국에서는 100년도 되지 않는 접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은 다른 왕국이나 제국들에게 하는 것처럼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그것을 위해 자금난에 휘청이는 카나리스에 막대한 자금을 융자해 준 것.

하지만 상아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카나리스 왕국에 뿌리를 내리기란 쉽지 않은 일.

그러던 와중에 평민 출신인 태훈이 국왕의 신임을 얻고 차기 국왕으로 주목받자 전폭적으로 태훈을 지지하고 있었다.

자신을 정략 도구로 보는 그들이 곱게 보일 수 없었지만 태훈은 신력을 터득하기 위해 그들에게 선의를 보이고 있었다.

“하하, 최근에는 제노비아 왕녀도 찾아왔었고 꽤 바빴습니다.”

“하긴 그렇겠군요. 이제 왕녀도 돌아갔으니 종종 찾아주십시오.”

카를로스 집정관은 씩 웃어 보인 뒤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보던 태훈은 이제 그만 교황 총국과 손을 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신력은 이미 터득했고 총국에서 보관 중인 서적과 지식도 필요한 부분은 모두 얻은 상태.

거기다 조만간 자신과 부딪힐 일이 많았기에 정리는 빠를수록 좋았다.

“알!”

“네, 왕자님.”

“그림자 병이 도졌다는데 거기에 대해서 좀 알아봐. 언제 어디서 시작됐고 피해는 어느 정도인지.”

“알겠습니다. 헌데 그건 왜 알아보시려고 하시는 건지…….”

“됐으니 알아와.”

태훈은 이곳의 불치병에 대해 알아본 전력이 있었다.

태훈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몇 가지 병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그림자 병이었다.

전염병이라 하면 날씨가 더운 여름에 발병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그림자 병은 병원균이 살아남기 힘든 겨울에만 일어나는 전염병.

거기다 포션이나 신력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하여 불치병으로 알려져 있었다.

“왕자님, 북쪽에 있는 포드령에 있는 마을이라고 합니다.”

“포드령? 이번에도?”

최근 10년간 꾸준히 발생했던 지역이었다.

“이쯤 되면 그 지역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오히려 다행 아닌가요? 그림자 병이 포드령 밖으로는 퍼지지 않으니까요.”

“이번에도 격리한대?”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북부 중앙군에서 병력을 파견한다는 것 같습니다.”

알의 말을 듣고 있던 태훈은 잠시 고민했다.

매년 그림자 병으로 사망하는 인원은 100명도 채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 100명도 되지 않는 인원이 전부 사망한다는 치사율 100프로인 병.

“한번 가봐야겠어.”

“가보다니요. 어디를요?”

“어디긴 어디야. 포드령이지.”

“네에?”

알은 뜨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전염병이 창궐하는 지역을 가시겠다고요?”

“잘 생각해 봐, 뭔가 이상하잖아. 무조건 죽는 전염병이 매년 포드령에서만 발생하는 것도 그렇고, 그 정도로 강력한 전염병이 치료제도 없는데 자연히 사라진다는 게 이해가 안 돼.”

“신관들도 대책이 없어서 손을 놓는 마당에 거길 왜 가시겠다는 겁니까? 그리고 포드령만이 아닙니다. 다른 왕국에서도 그림자 병은 창궐합니다.”

알은 진땀을 흘리며 태훈을 말렸다.

그가 가겠다면 수호 기사인 자신도 동행을 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었다.

치료제도 없는 전염병이 퍼지는 곳에 가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하다는 거야. 내가 알기로 다른 왕국에서도 특정 지역에서만 발병하고 사라진다고 하던데. 뭔가 공통점을 알면 병을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어.”

“폐하께서 절대로 허가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당연하지. 그래도 갈 수는 있어. 넌 입단속이나 잘해.”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알은 눈만 껌뻑였다.

태훈은 바로 국왕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제노비아 왕국으로 가겠다는 말을 했고 그 말을 듣고 있던 알은 다시 한번 뜨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겨울에 제노비아 왕국을 가겠다고?”

“왕국의 서신에도 빠른 시일 내에 방문을 원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봄에 가도 늦지 않을 것 같다만 어찌 그리 서두르느냐.”

“폐하, 왕자님이 제노비아의 왕녀님에게 푹 빠지셨나 봅니다. 윤허해 주시지요.”

“아, 그런 것인가!”

국왕의 옆에 있던 외무대신인 라블로 자작이 말하자 국왕은 기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작년에도 그렇고 태훈은 혼인에 대해 굉장히 미온적이었다.

그런 왕자가 혼약을 결정하고 약혼녀를 보겠다고 엄동설한에 국외로 나가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군. 내가 미저 메드니안의 생각을 읽지 못했어. 왕자도 마음이 있던 거군.”

“황송합니다, 아버님.”

“좋다, 허락한다. 제노비아 왕국에 결례가 없도록 외무대신이 만전을 기해 준비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폐하.”

국왕의 허락을 받고 나온 태훈은 웃고 있었다.

그가 수도를 벗어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설렘도 가득했다.

하지만 알의 표정은 울기 직전이었다.

“왕자님, 설마 옆길로 새시려는 겁니까?”

“제노비아는 갈 거야. 포드령은 거쳐 갈 뿐이지.”

“그게 그거 아닙니까!”

알은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태훈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저 아직 스무 살입니다.”

“누가 너 잡아먹어? 그리고 이거 안 놔? 바지 내려간단 말이야!”

“왕자님!”

“그럼 넌 두고 갈게. 안 따라와도 돼.”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너 요즘 기어오른다? 난 네 상관이야. 지금 항명하는 거야?”

태훈은 알과 많이 친한 사이였다.

검술을 익힐 때 초창기 대련 상대였고 그를 알고 지낸 지도 벌써 6년이었다.

그만큼 신임하고 허울이 없는 상대였다.

“아이고, 왕자님이 사람 잡네!”

바닥에 드러누워 칭얼대는 알을 살짝 두드려 준 태훈의 얼굴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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