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다음 날.
해가 지자 왕궁 곳곳에 횃불이 밝혀졌다.
사신단의 환영회를 겸한 파티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왕궁에 모인 귀족들은 하나같이 전부 높은 신분이었다.
일반 귀족은 초대조차 받지 못했고 백작 이상의 귀족과 주요 대신들의 식솔들이 초대받은 자리였다.
태훈도 정갈한 정복을 입고 대기 중이었다.
‘아, 빨리 쉬고 싶다.’
하루 종일 연구실에 처박혀 원석의 교체 작업에 매달렸던 태훈은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제노비아 왕국의 공주님이 입장하십니다.”
기사의 말이 끝나자 홀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공주가 부채로 하관을 가리며 등장했다.
그 뒤로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선두에 있는 공주를 본 태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느 영애처럼 풍만한 몸집의 공주였다.
‘아니지, 아니지. 겉모습만 보고 냉대할 수야 없지. 의연하게 대처하자.’
정신을 차린 태훈은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오오, 저분이 도리아 공주님이신가!”
“소문대로 미인이군요.”
“메드니안 왕자님은 좋으시겠어요.”
태훈의 속을 모르는 카나리스 왕국의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국왕의 앞에까지 다다른 공주는 목례를 했다.
“카나리스 왕국의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사절단의 대표인 도리아 제노비아라고 하옵니다.”
“공주가 직접 사절단을 이끄느라 고생이 많소. 오는 길이 많이 불편하였을 터인데.”
“정중한 배려를 해주신 덕에 편안히 올 수 있었사옵니다.”
“오오, 대견한지고.”
국왕은 공주의 대답에 만족스러웠는지 연신 웃음을 지었다.
공주가 손짓하자 뒤에 있던 사람들이 물건들을 한 아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이쪽은 저희 아버님이 국왕 폐하께 드리는 선물이옵니다. 양국의 우호가 영원하길 바란다 하셨습니다.”
“당찬 공주로군.”
태훈의 옆에 있던 남자가 나직이 말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남자는 제1왕자이자 왕세자인 로텐바르 왕자였다.
왕위 계승을 두고 태훈과는 라이벌인 상대였다.
태훈은 그와 사이가 거북했다.
라이벌인 것을 떠나 말수도 없고 항상 냉정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였다.
왕위 계승에는 생각이 없는 태훈은 그와 친해지려 했지만 좀처럼 대꾸가 없는 인물이었다.
로텐바르의 말처럼 공주에게서는 조금도 위축된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여유롭게 주위를 훑어보다 태훈과 눈이 마주쳤다.
“오늘은 그대들을 위한 환영회다. 마음편히 즐기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폐하.”
인사가 끝나자 태훈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귀족들은 자리를 떴다.
태훈은 국왕의 옆을 지키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을 보다 못한 한 남자가 태훈에게 다가왔다.
“메드니안 왕자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외무대신인 라블로 자작이었다.
올 것이 왔다라는 표정을 지으며 태훈은 자작을 따라나섰다.
자작이 태훈을 데리고 간 곳은 도리아 공주가 있는 장소였다.
“도리아 공주님, 이분이 저희 왕국의 제3왕자이신 메드니안 왕자님이십니다.”
“메드니안 왕자님. 이분이 저희 왕국의 5왕녀이신 도리아 공주님 이십니다.”
자작과 공주의 옆에 있던 제노비아의 귀족이 서로를 소개시켜 주었다.
미지근한 표정을 짓는 태훈의 옆구리를 자작이 쿡쿡 찌르자 그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아름다운 도리아 공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도리아라고 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자자, 두 분끼리 담소를 나누게 우리는 비키도록 하지요.”
자작이 사람들을 데리고 사라지자 둘은 어색하게 서 있었다.
“제노비아의 공주에게 절대 실수가 없도록 해라.”
태훈의 머릿속으로 국왕의 단호한 말투가 스쳐 지나갔다.
‘젠장, 전생에 영업직이었다면 말이라도 붙이겠지만 난 연구직이었다고.’
본래 남자란 관심 없는 것에는 1이라도 관심을 두지 않는 생물이었다.
이 혼약도 원치 않은 혼약.
문제는 국왕이 태훈을 차기 국왕으로 점찍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텐바르라는 왕세자가 있으며 평민 출신인 태훈의 어미가 큰 난관이었다.
이미 존재하는 왕세자를 어우를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 주기 위해선 국가 간의 결혼이 제격이었다.
‘어떻게든 이 혼담을 없었던 걸로 만들어야 한다. 그게 서로를 위해서 좋은 거야.’
결심을 굳힌 그는 그녀를 조용한 테라스로 데리고 갔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태훈이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번 혼약 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공주님께서도 그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태훈은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공주는 부채를 거두었다.
“그리하라는 것은 파혼을 해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첫 대면에 하신다는 말씀이 파혼이라니. 그 이유가 궁금하군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번 혼담이 제가 국왕이 되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함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제가 국왕이 될 생각이 없기 때문이죠. 서로의 앞길을 위해 그것이 좋다고 판단되었습니다.”
“형님 되시는 로텐바르 님과 날을 세우고 싶지 않으신 건가요?”
“뭐 그것도 있고요. 그리고 저에게 국왕의 일은 벅찹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태훈의 말을 들은 공주는 발걸음을 옮겼다.
테라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그녀가 테라스의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열 살에 이미 4클래스에 도달. 국내 학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명석한 두뇌를 소유한 왕자.”
그는 공주를 향해 멋쩍게 웃어 보였다.
공주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거기다 왕자의 신분으로 다른 기사들과 동일한 시험을 치룬 것으로 유명하시죠. 그런 분이 국왕의 자리가 벅차다고요?”
“이제 겨우 칼을 휘두를 줄 아는 정도입니다. 입장이 있다 보니 제 한 몸 지킬 수는 있어야 해서요.”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공주는 태훈이 어릴 적 독살 기도를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훈의 얼굴이 펴졌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자칫 공주님도 위험해 질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잘 들은 걸로만 하죠.”
“왜죠?”
“그냥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그냥 돌아갈 수 없다?”
태훈은 말문이 막혔다.
‘본인의 목숨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하는 말인가?’
태훈이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이번에는 공주의 설명이 이어졌다.
제노비아 왕국은 그 위로 아무드 왕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문제는 최근 수년 동안 아무드 왕국이 군비를 확장하고 있다는 것.
이에 제노비아 왕국은 전력의 보충을 위해 카나리스 왕국과의 동맹을 선택했다는 내용이었다.
“요는 우리 왕국의 원석이 필요로 하다는 겁니까?”
“이해가 빠르셔서 좋네요.”
공주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말대로 원석은 전력의 3요소 중 하나였다.
병력, 마법사, 마장기.
그중 마법사와 마장기의 동력이자 힘의 원천이 오리진 원석이었다.
이렇다 할 지하자원이나 특산물이 없는 카나리스 왕국은 그간 원석의 수출로 명맥을 이어왔다.
하지만 무리한 채광으로 매장량이 감소하는 추세인데다 고급 원석은 더 빠르게 줄고 있었다.
실제로 폐광이 즐비했고 매년 왕국의 재정도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다른 곳으로부터 막대한 자금도 빌리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저와의 혼약이 이루어진다고 한들 귀국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차마 자기 입으로 왕국의 상황을 말할 수 없었던 태훈은 유감스럽다는 표현만 했다.
그러자 공주는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는 귀국과 접경해 있는 나라입니다. 귀 나라의 사정은 대충 알고 있죠. 제가 필요한 건 카나리스 왕국과의 협력 관계만 확실하다는 증거만 있으면 됩니다.”
“대체 저와의 혼약으로 얻는 게 대체 뭡니까?”
“시간입니다.”
공주의 대답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태훈은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 아직까지는 원석의 최대 생산지는 우리나라다. 우리와 협력 관계를 맺었다 하면 아무드 왕국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다는 거군.’
공주의 뜻을 이해한 태훈은 새삼 그녀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본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말하는 그녀의 기백에 감탄한 것이다.
사실 그동안 태훈이 보아온 귀족가의 영애는 사치스럽고 게으른 이미지가 가득했다.
그런 다른 영애들과는 달리 이런 기백을 보이는 여성은 처음이었던 것.
‘올해 성년이면 15살인가? 어린아이치곤 대범하군.’
그녀의 기백에 감탄하며 태훈은 말을 이었다.
“제 아버님도 이 사실을 아십니까?”
“저와의 혼약으로 왕자님이 국왕의 자리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시겠죠. 서로 이득이 있어 이 자리까지 온 게 아닐까요?”
공주는 웃어 보였다.
그러곤 부채로 다시 하관을 가렸다.
“오늘 처음 본 남녀가 사적인 시간을 너무 오래가졌습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가볍게 목례를 한 공주가 몸을 돌렸다.
그녀가 파티홀로 들어가자 혼자 남은 태훈은 머리를 긁적였다.
공주의 말을 토대로 정리하자면 자신이 혼약을 깨고 싶어도 저쪽에서 쉽게 받아들여 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테라스에 팔을 걸치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담배 피고 싶어지네.’
그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의 달은 밝기만 했다.
그날 이후 3일 후.
공주가 왔다고 해서 태훈의 일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전에는 검술 훈련을.
오후에는 실험실과 텃밭에 머물렀고 아넬리아의 병문안을 갔다.
아넬리아도 태훈의 신부 후보가 왔다는 말에 큰 관심을 보였으나 태훈은 그저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들어보니까 엄청난 미인이라던데. 맞아?”
“음, 글쎄요. 미인이라…….”
솔직히 지구의 미에 집착하는 태훈에게 있어 공주는 그의 사정권 밖이었다.
오히려 병마 때문이긴 하지만 마른 몸매를 가진 아넬리아가 그의 기준에서 더 미인에 가까웠다.
“역시 메드니안도 펑퍼짐한 게 좋지? 나도 얼른 살이 쪄야 할 텐데…….”
“안 돼! 아니, 안 됩니다!”
그녀의 말에 태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금 생에에서 그 누구보다 지구의 미를 간직한 그녀가 그리 말하자 태훈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나마 눈을 정화할 수 있는 것은 그녀뿐이었기에 더더욱이었다.
“까……깜짝이야. 왜 안 된다는 거야?”
“누님의 병은 제가 반드시 낫게 하겠습니다. 그래도 지금 몸은 유지하세요.”
“뭐야, 내가 예뻐지는 게 싫어?”
“누님이 다른 영애들처럼 펑퍼짐해진다면 제가 찾아오는 횟수가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뭐야, 그런 게 어딨어!”
“누님은 지금도 충분히 예쁘시거든요. 그러니 뚱뚱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흐흠, 그…… 그래?”
살짝 얼굴을 붉히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 그녀가 더욱 귀엽게 느껴진 태훈은 속으로 다짐했다.
그녀의 몸매는 자신이 지키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