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오오, 메드니안. 매일 부지런하구나.”
백발의 노인은 태훈을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버님.”
“그럼그럼. 너도 잘 잤느냐.”
그의 손이 태훈의 손을 어루만졌다.
국왕은 태훈을 끔찍이 아꼈다.
이름을 건국왕의 이름을 따다 붙일 정도로 태훈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어디 다녀오는 길이냐?”
“잠시 나갔다 왔습니다.”
“설마 또 논일을 하고 온 게냐?”
국왕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태훈이야 적당히 핑계를 댔던 것인데, 밭을 가꾸고 있다는 이야기를 못마땅해했던 그였다.
“너는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갈 몸이다. 어찌 그런 하찮은 일을 하고 있는 게냐!”
“아버님, 그건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이 나라를 위한 일입니다.”
“매번 그 소리! 약초 따위를 어디다 쓴단 말이냐!”
태훈이 가꾸는 밭은 다름 아닌 약초를 모아놓은 밭이었다.
5살 때부터 왕실 서고와 약초꾼들의 경험담을 정리하기 시작한 그는 반년 전 밭을 하나 만들었다.
그러곤 그곳에 직접 옮겨다 심은 약초를 재배하고 있었다.
국왕의 꾸중에 태훈은 반박하기를 그만두었다.
“거기다 원석까지 가져다 쓴다지?”
“오늘은 그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자금이 필요합니다.”
오리진 원석은 전 대륙을 통틀어 가장 값어치 있는 광물이었다.
마법회로에 들어가는 동력원으로, 마장기의 필수 원료이며 마법사들의 보조 장비에도 필요했다.
카나리스 왕국은 대륙을 통틀어 오리진 원석의 최대 매장량을 가진 왕국.
하지만 근래에 들어 수많은 광산들이 폐광을 하고 있었다.
“너도 이제 성년이다. 이제 장난은 그만하고 나랏일을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
“송구합니다. 수업은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그의 성적은 발군이었다.
국왕에게 보고를 올리는 여러 교사들은 태훈이 다른 왕자들보다도 명석하다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의 마법 재능과 검술을 보고 혀를 내두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만 한 분야에서만은 낙제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너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모르느냐?”
“아버님, 저는 왕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다음 국왕은 왕세자이신 로텐바르 형님이 어울립니다.”
태훈의 위로는 두 명의 형이 있었다.
정실인 피나 왕비의 자식들로, 왕세자인 제1왕자 로텐바르는 태훈보다 8살 위인 24살이었다.
그런 후계자가 있음에도 작년에 태훈이 성년인 15살이 되면서 국왕은 노골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내무 부대신의 자리에 앉히려 했던 것.
이에 귀족들은 국왕이 왕세자를 교체하려는 시작 단계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귀족들의 반발이 거세어지자 국왕은 한발 물러났다.
대신 중앙군의 요직에 태훈을 앉히는 등 온갖 노력을 하고 있었다.
“로텐바르가 더없이 훌륭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로텐바르에게 없는 것이 너에겐 있다.”
“선안 말입니까?”
“그 선안이 왕실에 다시 힘을 가져다 줄 것이다.”
“…….”
저승에서 고액으로 샀던 마안.
국왕을 포함해 왕국 사람들은 그것을 선대의 증표인 선안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왕위의 정통성 또한 태훈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아, 진짜 왕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은데.’
몇 년 전부터 국왕이 계속 자신에게 다음 국왕을 잇게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태훈은 바로 거부 의사를 나타냈다.
막내인 자신이 국왕에 오르게 되는 과정은 불 보듯 뻔한 일.
태훈이 왕족을 택한 이유는 하나.
약을 만들기 위한 자금을 쉽게 조달하기 위해 고른 것뿐이었다.
하지만 대화는 항상 도돌이표처럼 같은 이야기만 반복될 뿐.
그래서 태훈은 시간을 끌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큰 언쟁은 피하고 있었다.
“내일 제노비아에서 사절단이 온다. 넌 잊지 말고 그 자리에 참석해라.”
“제노비아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제노비아는 카나리스 왕국과 국경이 접해 있는 이웃나라였다.
국력이나 영토도 카나리스와 비슷한 곳이지만 지난 16년간 그곳에서 사절이 오는 경우는 없었다.
“내일이 되면 알 것이다.”
“알겠습니다. 허면 국고에서 원석을 꺼내가도 되겠습니까?”
“맘대로 하거라. 어차피 너의 것이 될 것들이니.”
“감사합니다, 아버님.”
태훈이 방을 나서자 알이 뒤로 따라붙었다.
“또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까?”
“후우, 뭐 그렇지.”
“왕자님은 참 이상하십니다. 왜 국왕이 되려 하지 않으십니까?”
알의 말에 태훈은 그저 피식 웃었다.
태훈도 국왕이 되는 것에 대해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왕이 되면 국고를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국왕이라는 자리의 무게를 감당하기 싫었다.
자신의 판단하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좌지우지될 것이고 자칫하다가는 포인트의 폭락을 가져올 수 있었다.
거기다 나라의 사정 또한 밝지 않았다.
카나리스 왕국이 전성기였던 것은 오래전의 일이었고 지금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아, 그리고 내일 제노비아에서 사절단이 온다는데 들은 거 있어?”
“아니요, 들어본 적 없습니다.”
“그럼 그거나 알아봐. 나만 졸졸 따라다니지 말고.”
“어디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텃밭.”
알을 제쳐두고 태훈이 향한 곳은 연병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
공터에는 농구 코트만 한 면적의 건물 두 개가 들어서 있었다.
하나는 약초를 재배하는 곳이었고 다른 하나는 실험실이었다.
“음, 잘 자랐어.”
약초들을 보며 태훈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만들 약은 천연 항생제.
텃밭의 약초들은 그 밑바탕이 될 재료들이었다.
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잘못된 식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이나 남성이나 큰 몸집을 선호했고 식단 자체가 탄수화물과 지방으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
그러다 보니 영양 불균형으로 인한 면역력 저하가 눈에 띄었다.
서민들이나 기사들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자주 쓰기에 초고도 비만은 면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영양 불균형이 많았다.
귀족들은 그야말로 손을 쓸 엄두도 나지 않는 상황이 즐비했다.
태훈이 알아서 식단을 조절하고 몸을 가꾸지 않았다면 분명 그도 온갖 성인병에 노출되었을 게 분명했다.
건물의 사방에는 원석이 박힌 마나 회로가 곳곳에 있었다.
태훈이 직접 연구하여 설치한 것들이었다.
적절한 온도 유지와 해충이나 균의 잠식을 막기 위해서였다.
약초가 준비되었다고 생각한 태훈은 실험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값비싼 유리로 만든 세공품들이 있었는데 전부 실험도구들이었다.
마법회로로 만든 작은 냉장고에서 몇 가지 물품을 꺼낸 태훈은 바로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먼저 병을 소독하고…… 사과랑 더럽게 비싼 설탕 넣으면 되는 거지.”
이곳에선 상상도 할 수 없이 비싼 설탕을 한 무더기 넣으며 그는 입맛을 다셨다.
마지막 물을 넣어준 태훈은 입구를 잘 막은 다음 검은 천을 덮어 탁자 밑에 밀어 넣었다.
그가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애플사이다라는 식초였다.
제조에 필요한 시간은 두 달.
실험실을 나온 태훈이 향한 곳은 누이 아넬리아의 방이었다.
“누님. 저 왔습…….”
문을 열자마자 날아오는 그녀의 흰 팔뚝이 보였다.
앙칼지며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빈틈!”
그가 피하지 못할 움직임은 아니었으나 태훈은 얌전히 그녀의 팔을 받아들였다.
가녀린 팔뚝이 그의 목젖을 강타했다.
“꽥!”
다리 힘이 풀린 척하며 뒤로 넘어지는 시늉을 하자 아넬리아는 웃었다.
“아싸! 104전 전승!”
그는 목덜미를 만지며 투덜거렸다.
“누님, 이러다 사람 잡겠어요.”
“칫, 안 죽었나.”
“오늘은 건강해 보이시네요.”
“응, 오늘은 컨디션이 좋아.”
자리를 털고 일어난 태훈은 그녀의 안색부터 살폈다.
갈색의 긴 생머리를 가진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천성적으로 몸이 좋지 않았다.
감기와 몸살은 기본.
상처가 나면 쉽게 곯았는데 피부도 약해 상처는 일상이었다.
태훈이 첫 작품으로 천연 항생제를 선택한 것도 그녀를 위한 일이었다.
“우리 산책 가자. 방 안에만 있으니까 심심해.”
“또 아프면 어쩌려고요. 조금만 기다려요, 제가 조만간 병을 낫게 해줄게요.”
“호호, 네가 무슨 수로. 말이라도 고맙네.”
그는 애틋한 눈으로 그녀의 앙상한 손을 잡았다.
그녀는 태훈이 아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자신이 아기일 때 아넬리아는 그를 매우 아꼈다.
몸이 좋지 않음에도 거의 매일 같이 자신을 보러 왔던 것.
거기다 태어난 날 어머니를 잃은 동병상련을 겪었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그만 가볼게요. 너무 오래 있었어요.”
“왜 벌써 가게?”
그녀는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저 때문에 아프면 어떻게 해요.”
“쳇.”
그녀는 타인과의 접촉으로도 몸이 아플 정도로 허약했기에 만남의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아넬리아의 방을 나온 태훈의 앞에 알이 나타났다.
“역시 여기 계셨군요.”
“왜? 무슨 일 있어?”
“사절단이요. 왕자님이 알아보시라고 하셨잖습니까.”
“아, 그래. 알아봤어?”
“네, 다름이 아니라 내일 오는 제노비아 사절단에 그곳 공주님이 포함되어 있답니다.”
“공주? 아, 설마…….”
불안한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설마가 맞는 것 같습니다. 요새 제노비아의 외교관이 자주 들락날락하는 걸 본 것 같습니다.”
“아, 그걸 잊고 있었네.”
잠시 고민하던 태훈은 알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 네가 나 대신 수고 좀 해줘야겠다.”
“네? 뭐를요?”
“내 대역을 하루만 해라.”
의미심장하게 웃는 태훈을 보며 알은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왕자님! 저를 죽이실 거면 그냥 검으로 베십시오!”
“뭔 소리야? 누가 죽인데?”
“그 말이 그 말이잖습니까. 작년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얼마나 곤욕을 치르셨는지 아시잖습니까!”
태훈은 작년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의 성인식을 맞이하여 성대한 파티가 열렸었다.
다른 왕족들과 마찬가지로 반려를 맞이하기 위한 무도회도 겸한 자리.
그는 파티 시작할 때 얼굴만 비추고 몸 상태를 핑계로 방에 틀어 박혔다.
“왕자님은 답답하다고 몰래 나가시고. 제가 왕자님인 척 방에서 얼마나 진땀뺐는지 아십니까? 나중에 기사단장님한테 들켜서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단 말입니다!”
“이제 와서 왜 지난 일을 들추고 그래. 나도 엄청 혼났다고.”
“그리고 이번에는 경우가 다릅니다. 귀족 영애들이 아닌 외국의 공주입니다. 분명 나중에 문제가 될 소지가 있습니다.”
알의 설득에 태훈의 고민이 깊어졌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것도 외국의 공주에게 그런다면 단순한 질책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작년 파티의 기억을 떠올린 태훈은 몸서리쳤다.
서늘한 가을의 밤이었지만 몰려든 귀족가의 영애들은 외투가 필요 없는 지방층의 소유자들이었다.
지구의 미를 기억하고 있는 그에게 그만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음, 역시 이번에는 피할 수 없는 건가.”
“듣기로는 제노비아 왕국의 공주들은 하나같이 미인이랍니다. 왕자님께도 나쁜 일은 아니실 겁니다.”
“그건 네 기준이고. 난 마른 몸이 좋다니까.”
그러자 알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왕자님의 기준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삐쩍 마른 몸이 뭐가 좋으시다는건지.”
“남이사. 어쨌든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겠지?”
한숨을 내쉰 그는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