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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75화 (에필로그) (175/175)

제175화 - 에필로그

최후의 결전으로부터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10년 전.

시스템 창에 신한별이 탑을 클리어했다는 일괄 메시지가 플레이어들에게 전송됐을 당시, 모두가 제 눈을 의심했다.

당시 탑을 등반하던 최상층은 불과 50층 대, 탑을 클리어하는 일은 한참 뒤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래서 탑이 클리어되었다는 문구가 떴을 때, 수많은 플레이어는 쉽사리 믿지 못했다.

모종의 오류가 아닐까 하고.

하나 탑에 있는 플레이어들에게 탑을 계속하여 등반할지 혹은 지구로 되돌아갈지 선택지가 주어진 그때야 비로소 그들은 확신했다.

드디어 탑을 클리어했음을.

위협이 사라진 지구와 안전한 생활, 모든 것을 보장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들은 탑을 등반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영웅이었기에.

* * *

70층대, 천공의 요람.

드넓은 하늘이 펼쳐진 구름 위, 수많은 괴수의 군세를 뚫고 익숙한 얼굴들이 마주했다.

“어이, 아줌마! 오래간만이네, 잘 지냈어?”

“아줌마는 누가 아줌마예요. 뭐, 그건 됐고 그동안 별일 없었죠?”

“물론이지. 여기까지 오다가 중간에 괴수가 함정을 파놓은 바람에 60층대로 떨어질 뻔한 것과 마비독에 걸려서 죽을 뻔했던 거 하고, 함정에 빠져서 아사할 뻔한 것만 제외하면 별일 없었어. 으헤헷.”

손가락을 접어가며 대답하자, 유채아는 어이없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하아, 그럼 그렇죠. 도대체 조심성이라는 건 어디에다가 버려두고 움직이는 거예요.”

“또또, 잔소리야? 잔소리라면 패스할게. 안 그래도 다른 플레이어들한테 듣고 온 참이거든.”

건성거리는 소녀의 대답에 유채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오랜 기간 만나서 알고 있었지만, 이 이상 대화를 나누다간 머리만 지끈거린다.

도대체 이런 녀석이 어떻게 수십 년째 플레이어 랭킹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저래 보여도 실력 하나는 믿을 만했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게.

10년 전에 있었던 최후의 결전,

유채아와 골리엇은 그 자리에서 참전한 플레이어였다.

사선에서 등을 맞댄 동료로서 서로의 무력은 잘 알고 있었기에 믿을 수 있었다.

“힘들면 지금이라도 지구로 되돌아가지 그래요? 원한다면 아프지 않게 한 방에 보내드릴 수도 있는데 어때요.”

“농담은… 됐어, 위에선 아저씨도 고군분투하고 있을 건데 가긴 어딜 가. 10년간 보기 좋게 부려 먹혀줬으니까. 나중에 만나면 신세 한탄이라도 해야지 직성이 풀리지. 그러니까. 우리도 분발해서 어서 따라잡자고.”

골리엇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소녀의 말에 유채아는 하늘 위… 아니, 그보다도 더 높이, 너머에 있는 장소를 생각하며 떠올렸다.

탑에 들어온 직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이정표가 될 남자를.

* * *

“끼에에에에액!”

고막이 웅웅 울리는 괴성과 함께 무수한 괴수들이 덤벼들었다.

군단에 가까운 괴수들의 침공을 바라보며 나는 발을 천천히 내디뎠다.

검이 지면을 긁으며 불쾌한 소리가 일어났다. 덕분에 괴수들을 자극한 모양인지, 놈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왔다.

“달려오는 꼴이 우습네. 안 그래 둘리…. 아, 맞다. 없었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려다 말고, 빈자리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둘리는 43층에 있는 드래곤 둥지에 두고 왔다.

당시에 둘리는 나와 떨어지길 싫다고 완강히 거절했었으나 거의 반강제로 떼어 뒀었다.

과거에 아델과 한 약속도 있었지만, 탑을 등반하는 플레이어의 입장과 달리 둘리는 바깥에서 아직 뛰어놀 나이였다.

그 어린놈을 사선을 오가는 전장에 데리고 다니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 녀석과 헤어진 지는 벌써 몇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녀석의 빈자리는 아직까지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탑에 등반하고 나서 탑을 클리어하는 순간까지 함께 한 건 언제나 둘리였다.

빈자리는 쉽게 채워질 리는 없었다.

“뭐, 그건 그렇고. 슬슬 일해야겠지.”

어느새 괴수들은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까지 다가왔다.

저렇게까지 열렬히 반기는데, 좌시하고 넘어갈 순 없지.

나는 낡아빠진 검 한 자루만 든 채, 앞으로 나아갔다.

예전부터 애용하던 백룡 시리즈나 아눌드 공방에서 제련한 검은 마신과의 최종결전을 끝으로 박살 나고 말았다.

물론 당시에는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한다면 글쎄…?

‘템빨이 없어도 간단하지.’

그 증거로 총알처럼 쇄도한 내 신형은 괴수들의 무리를 파고들었다.

손속을 봐줄 필요는 없었다.

검을 휘두르자, 초승달처럼 쏘아져 나간 검기는 괴수들의 머리를 베었다.

그와 동시에 지면을 향해 손을 내리치자 땅이 불쑥 올라오며 제멋대로 지형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마른 하늘에서 수십 발의 벼락이 떨어지며 새빨간 화마가 괴수들을 덮쳤다.

인간의 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지만,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손을 털었다.

마치 10년 전, 마신이 선보였던 권능과 같은 힘.

그야 당연한 일이다.

“이건 마신의 힘이니까.”

카르텔의 설명에 따르면 10년 전에 이터의 권능으로 마신의 신성을 흡수함으로써 얻은 힘이라고 했었다.

곁으로 보기에는 대단한 힘이지만, 아직 완벽하진 않았다.

나는 괴수의 혈흔이 묻은 손바닥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흐흐흐, 정녕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더냐. 만일 내가 사라지게 된다면 탑에 대한 억제력 역시 없어지는 꼴. 지금이야 내가 고삐를 손에 쥐고 있다지만, 그 고삐가 풀리게 된다면 벌어질 일은… 글쎄, 지금보다 더 낫다고는 확신할 수 없을 거 같은데.”

불현듯 마신이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뒤돌아보니 마신의 발언은 아주 틀리지만은 않았다.

당시에는 죽기 전의 발악으로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마신의 권능을 손에 얻긴 했지만, 탑에 대한 억제력은 부족했다.

마신에 의해 피해를 입은 지구를 수복하고, 게이트를 막아 괴수로 인한 피해가 벌어지지 않도록 막는 것은 성공했으나 그 덕에 탑의 내부까지 돌볼 여력이 없었다.

또, 마신의 신성은 불완전했기에 탑에 권능이 미칠 수 있는 범위는 내가 등반한 층에 한정되었다.

그러니 탑의 모든 층을 안정화하려면 이렇게 한 층, 한 층 등반할 수밖에 없었다.

“탑을 등반하면 할수록 난이도가 괴랄 맞아서 문제지.”

마신의 신성을 갖고 10년간 등반했는데도 한참 부족하다면 말 다 했지.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으면 밸런스 패치라도 해줘야지 너무하네. 아, 맞다. 내가 GM이었지 제기랄….

그나마 다행인 건,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같이 탑을 등반해줘서 안심이지. 그것도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그동안 열심히 등반했지.’

나는 눈을 감고는 과거를 회상했다.

999년간 갇혀 있던 튜토리얼에서 탑에 도착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인연을 맺었다.

어떻게 보면 과분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받은 고마움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웠으니까.

머릿속으로 상념을 떠올리고 있을 즈음, 멀리서부터 또다시 괴수들의 무리가 드리웠다.

이전보다도 훨씬 많은 숫자.

“몬스터 웨이브인가.”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를 몬스터 웨이브였지만, 나는 익숙하다는 듯이 검을 붙잡았다.

탑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10년간 꾸준히 해왔던 일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검을 치켜세울 찰나, 쿠르릉! 번쩍!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우나 싶더니, 수십 다발의 벼락이 괴수가 모여있는 방향으로 떨어졌다.

벼락은 마치 폭우가 떨어지듯 빗발쳤다.

가공할 만한 위력에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정면을 바라봤다.

“뭐야?”

벼락이 떨어진 직후, 방금 전까지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한 장소에는 시꺼먼 재와 불꽃만이 흩날리고 있을 뿐, 인기척은커녕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놀라운 광경에 넋을 잃은 그때.

칠흑과 같은 구름을 가르고, 웅장한 위용의 블랙 드래곤이 나타났다.

로드급에 맞먹는 마나량과 덩치의 드래곤의 등장에 곧바로 전투 준비를 했다. 언제든 반격을 할 수 있도록 검을 쥐려는데, 로드의 입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별, 오래간만이다! 못 알아보겠나? 둘리다! 둘리!”

“어…? 둘리라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는데, 녀석은 잽싸게 달려와 내 몸을 끌어안았다.

그대로 녀석의 품속에 안긴 나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너 뭐야? 어떻게 여기에 왔어? 그리고 그건 또 어떻게 된 거야?”

“으헤헤, 어떻게 왔긴 한별을 돕기 위해서 34층에서 곧바로 날아서 왔다!”

“무식하게 그게 된다고?”

둘리의 대답에 놀라기도 잠시, 녀석의 몸을 보고는 수긍했다. 확실히 로드급 드래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로드급 드래곤이라니….

녀석의 몸을 곁눈질로 살피고 있자, 둘리는 가슴에 박혀 있던 보옥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퍼엉!

김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둘리는 해츨링 상태로 되돌아왔다.

둘리는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내게 건넸다.

〈로드의 잔재(SSS)〉

- 로드의 사념이 뭉쳐져 있습니다.

- 드래곤 종족이 아티팩트를 사용하면 로드급 드래곤에 달하는 능력치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Feat_ 카르텔)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 아티팩트 덕분에 로드급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건가.

간만에 둘리의 얼굴을 보니 반가움이 앞섰다.

“그래서 여긴 왜 왔어. 34층에서 기다리면 되지. 한 번씩 들릴 생각이었는데.”

“후훗, 한별이라면 혼자서 힘들어할 게 눈에 훤히 보여서 도와주러 왔다! 아델도 친구를 위한 일이라면 가서 도와주고 와도 된다고 허락했다!”

의기양양한 듯한 목소리에 나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녀석의 머리를 부여잡고는 과격하게 흔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누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래.”

“으아악! 아프다 한별! 머리 세게 누르지 마라!”

“엄살은.”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기분에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뭐, 혼자도 괜찮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으려나.

둘리와 간만에 재회와 동시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모든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내셨으므로 이번 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다음 층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다음 층으로 올라가겠냐는 물음에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다면 내 손으로 직접 증명해 보인다. 탑에 들어올 때부터 다졌던 각오를 다시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우린 언제나 하던 대로 위를 향한다. 그치 둘리야?”

“한별 말이 맞다!”

“그래.”

내 물음에 둘리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때마침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새하얀 섬광이 우리들의 몸을 뒤덮었다.

〈다음 층으로 이동합니다.〉

우리들의 등반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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