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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74화 (174/175)

제174화

이터의 권능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놈의 몸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다른 괴수였다면 순식간에 흡수하고 말테지만, 놈은 내 다리를 잡고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마신이 지닌 힘의 총량이 어지간히 크다 보니 이터의 권능으로 흡수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모됐다.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놈을 내려다봤다.

“다른 사람들의 목숨은 보잘것없이 여겼으면서 정작 본인은 목숨이 어지간히도 아깝나 봐.”

“끄윽, 네 이놈! 감히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탑의 창조주이자 모든 차원의 지배자가 될 자를….”

“네네, 자기소개는 잘 들었고요.”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는 놈을 앞에 두고, 나는 귀지를 파며 대충 대답했다.

별로 궁금한 내용은 아니었다.

나는 손가락에 묻은 귀지를 후하고 불며 놈의 얼굴을 걷어찼다.

축구공처럼 튕겨 나간 마신은 볼품없이 지면을 굴렀다.

놈은 바닥을 한참 구르다 말고 우뚝 튀어나온 돌부리에 부딪히고 나서야, 제자리에서 멈췄다.

왠지 모르게 후련해지는 기분이었기에 조금 더 발로 걷어차기로 했다.

“우윽! 윽! 으으윽!”

걷어차이는 와중에도 체면을 생각했는지, 놈은 필사적으로 고통을 참는 모습을 보였다.

이전이었다면 이런 타격에는 아무런 피해도 없었을 터였으나 이터의 권능에 의해 방어력이 흡수된 탓에 데미지는 곧바로 몸에 적용되었다.

그렇게 한참 두들겨 맞다 말고, 정신이라도 나간 모양인지 마신은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정녕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더냐. 만일 내가 사라지게 된다면 탑에 대한 억제력 역시 없어지는 꼴. 지금이야 내가 고삐를 손에 쥐고 있다지만, 그 고삐가 풀리게 된다면 벌어질 일은… 글쎄, 지금보다 더 낫다고는 확신할 수 없을 거 같은데.”

“왜 이렇게 혀가 길어,”

나는 놈의 머리짝을 걷어차려다 말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내가 알 바야? 그건 남은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곧 뒈질 사람이 걱정할 일은 아니지.”

본보기로 꺼낸 말에 그의 안색은 핼쑥해졌다.

이터의 권능에 의해 기가 빨려서 그런지 혹은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그런진 잘 모르겠지만 아무렴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놈의 종착지는 여기까지였기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해두지, 그래.”

“크억, 으아아학!”

마침내 이빨마저 빠진 마신은 고통 어린 신음을 흘렸다.

태산과 같이 굳건한 덩치는 어디 가고, 지금 내 앞에 쓰러져 있는 상대는 백발에 볼품없는 노인의 형상을 띈 마신이었다.

놈의 생명력은 여기까지다.

앞으로 5분… 아니, 길게 봐도 놈의 수명은 3분 남짓이 한계였다. 어쩌면 그것보다도 더 적을지도 몰랐다.

제 목숨줄을 자각했는지, 마신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흐흐, 제 욕심이 다리를 붙잡게 될 줄은 몰랐어. 이럴 줄 알았다면…. 푸흐흐, 이런 가정을 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으려나.”

처음에는 반항하려는 의지가 보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삶을 포기한 모양인지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그대로 땅바닥에 드러누운 마신은 만연한 얼굴로 혼잣말인지 모를 한탄을 내뱉었다.

“어차피 죽을 거 하나만 물어보자.”

“무엇이 궁금한가? 그래, 관용을 베풀어 궁금한 게 있다면 알려주도록 하지.”

여전히 위에서 보는 고자세는 꺼림칙했지만, 어차피 뒈질 놈이다.

몇 분이 지나면 뒈질 놈한테 예의까지 바라는 건 큰 욕심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 자리에 모인 플레이어들을 NPC로 만들어서 뭘 하려고 했던 건데.”

나는 과감히 물음을 던졌다.

내내 의문이었다.

그저 탑의 꼭대기에서 상주하면서 있어도 되는데, 도대체 어떤 목적이 있길래 자신의 신변을 노출하면서까지 플레이어들 앞으로 행차했을까.

그도 그럴 게.

지금까지 마신은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만일 일이 있다면 진행자를 지켜서 진행했을 뿐.

내내 지니고 있던 의문에 마신은 옅은 웃음을 내었다. 그것도 잠시 무리하게 웃은 모양인지 각혈을 했다. 오바도 참… 저런 오바가 없겠네.

본인도 부끄러웠는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별 건 아니다. 세상에는 무수한 행성들이 있지. 그리고 그 행성에는 무수한 자원과 에너지가 잠들어 있다. 그렇지만 직접 간섭하는 건 쉽지 않아. 그러기에는 방해하는 것들이 많아서.”

갑자기 시작된 이야기에 의아함이 앞섰지만, 묵묵히 듣기로 했다.

“그래서 그걸 해결하기 위해 세운 게 탑이라네. 각지에 탑을 만들어 그 행성을 점점 잠식해나간다. 그게 첫 목적이었지.”

그의 말에 안색을 굳혔다.

확실히 지구상에도 탑이 세워진 뒤의 삶은 확연히 달라졌다.

곳곳에서 괴수가 나타났으며, 지구의 지형이 바뀌거나 자연환경이 달라지거나 하는 현상이 일어났었다.

지금 생각하면 바뀐 환경은 탑과 꽤나 닮은 분위기가 있었다.

“행성에서 날 때부터 자랐던 플레이어들은 한마디로 데이터를 지닌 그릇이지. 그리고 그들을 매개체로 쓴다면 행성을 잠식해나가기에는 더할 나위도 없지 않은가, 끌끌”

놈의 말에 의하면 그 데이터를 뽑아내기 위해선 진행자가 아닌, 마신 본인이 직접 행차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랬나.

NPC 중 일부 NPC들은 탑과 시스템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마신이 그릇에 담긴 모든 데이터를 뽑아냈기 때문에.

당연히 전의 기억이 뽑혔기 때문에 본인이 탑에 있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탑의 주민으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다.

가혹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각자 영웅이 되려는 꿈을 가지고 탑에 들어오지만, 누구나 영웅이 될 순 없어.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튜토리얼을 통해 각자의 한계치와 성장폭은 정해져 있지.”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마신은 웃음을 지었다.

“영웅이 될 수 있는 자는 일부 자질이 뛰어난 자들이 가능하지. 그게 바로 재능이지. 그리고 자질이 뛰어난 자들은 좋은 먹잇감이지 않겠나.”

독이 든 항아리에 영물을 넣으면 독을 지닌 영물이 탄생한다.

독을 지닌 영물을 선별해 또다시 항아리에 넣으면, 가혹한 환경 속에서 서로를 잡아 삼켜 그중에서 살아남은 개체가 강한 고독(高毒)으로 태어난다.

마신은 엄선된 고독 중에서도 더욱 뛰어난 고독을 제 것으로 삼기 위해 탑을 그릇으로 썼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이걸로 일말의 고민도 사그라들었다.

이터의 권능은 마신의 힘을 전부 빨아들였다.

죽기 바로 직전, 마신은 내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자네도 알아두게나. 사람의 욕심은 끝도 한도 없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분탕질이나 치긴.”

걱정 마라, 그깟 욕심 따윈 이미 튜토리얼에서 두고 온 지 오래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신은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려 했던 자의 최후라고 생각한다면 부질없는 최후였다. 그러게 욕심도 적당히 부렸어야지.

나를 탑에 가둔 원흉을 처리했다.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후련함이었다.

“후우, 힘들어 뒈지겠네.”

나는 제자리에서 풀썩 쓰러지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확실히 놈을 상대한다고 전력을 다해서 그런지, 이제는 서 있을 기력도 없다. 근육의 긴장이 풀리며 수마가 찾아왔다.

이대로 한숨 자려고 하던 그때, 상공에서부터 들려온 요란한 목소리가 내 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하, 하아안벼어얼!!!”

유난히도 시끄러운 목소리에 눈을 뜨자, 눈물과 콧물로 범벅인 둘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대로 죽으면 안 된다. 한별 죽으면 둘리는 어떻게 하나! 갈 땐 가더라도 꿍쳐둔 간식의 위치는 알려주고 가라!!”

‘이게… 뒈지려고 환장했나.’

나를 걱정해주는지 알았는데, 간식 때문에 그런 거였어?

억울해서라도 이대로 죽을 순 없지.

나는 둘리의 목덜미를 낚아채고는 녀석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새끼가, 나보다 간식이 중요해? 괘씸죄로 일주일 동안 간식 없을 테니까. 그런 줄 알아.”

“아, 안 된다! 농담이다, 농담! 충격요법이면 한별이 일어날지도 몰라서 한 장난이다!”

이어진 내 발언에 둘리는 허둥지둥 손을 휘저었다.

뭐, 괘씸하긴 했지만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이니까 봐주기로 했다.

“그래서 한별 이제 모든 게 다 끝났나?”

딱히 할 것도 없겠다. 누워서 천장의 문양을 눈에 새기고 있을 즈음, 둘리는 얼굴을 불쑥 내밀며 물음을 던졌다.

녀석의 질문에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게, 다 끝났나?”

녀석의 물음에 나는 의문으로 대답했다.

이터의 권능을 이용해 마신의 힘을 흡수했다. 힘에 익숙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마신이 지닌 힘은 그대로 쓸 수 있었다.

당장 큰 위협은 지웠으나 아직 할 일이 끝났다고 할 순 없었다.

각 행성에 지어진 탑도 처리해야 하고, 탑 안에 남아 있는 플레이어와 NPC의 처리도 생각해봐야 하니까.

아니, 이거 이렇게 보니까. 마신이 싸고 간 똥을 내가 치우는 꼴이잖아.

마음 한 켠에서 울컥하긴 했지만, 오늘은 기념비 할 날이니 넘어가기로 했다.

생각할 시간은 많다.

앞으로 할 일이야 천천히 생각하면 되겠지.

나는 둘리를 바라보며 새삼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여러모로 개구쟁이긴 했지만, 녀석이 없었다면 탑을 등반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지. 이것도 기분이겠다.

“둘리야, 내가 특별히 네가 원하는 거 전부 사줄 테니까 말만 해.”

“저, 정말인가! 그렇다면 아까 전에 회장에 있던 초콜릿 분수 먹고 싶다! 계속 먹고 싶다고 이야기했었는데 한별, 아직 안 데려다줬다!”

어째, 마신을 쓰러뜨린 것보다도 훨씬 밝은 얼굴로 눈을 빤짝거리는 둘리.

그런 녀석을 보며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그래, 그 초콜릿 분수에 가보자고.”

“좋다 한별! 이번에는 둘리가 앞장서겠다!”

흥겨운지 앞으로 뛰어나서는 둘리를 바라보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띠링!

〈4레벨이 됐습니다.〉

피식.

뒷북이라면 뒷북이지만, 지금까지의 여정이 4레벨이 되기 위한 여정이었다니 우스울 따름이었다.

튜토리얼을 나서고 나서 처음으로 본 레벨업 문구에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뭐….

“이것도 괜찮나.”

4레벨이 되기 위해 모아야 할 경험치량이 마신을 죽이는 것이었다면 값싼 편이지.

시스템 창을 바라보며 아련하면서도 섭섭한 눈빛을 짓고 있자, 멀리서부터 둘리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한별! 어서 와라!”

둘리의 재촉에 나는 시스템 창을 끄고는 달려갔다.

“그래, 재촉 안 해도 곧 갈게.”

* * *

〈플레이어 일괄 메시지: 31기수의 마지막 도전자가 탑을 클리어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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