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탑에 남은 자들.”
나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돌아갈 곳을 잃은 플레이어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이대로 탑을 끝까지 등반하거나 혹은 NPC로서 탑의… 마신의 수하가 될지.
하지만 탑을 마지막까지 등반한다고 해도 플레이어들에게 승산은 없었다.
〈모든 플레이어의 감각이 마비됩니다.〉
시스템 창의 문구를 바라보며 안색을 굳혔다.
나야 우연히 카르텔과 만나 탑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권능을 얻었다지만, 반면 다른 플레이어는 그러한 기회는 없었다.
결국 마신의 손아귀 안에서 농락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층에 도착해도 마신은 당해줄 생각은 없었겠지.’
이러나저러나 탑은 끝까지 등반하기란 불가능했던 거였다.
플레이어가 희망을, 꿈을 위해 그리고 가족과 연인을 위해 악착같이 등반하는 모습을 놈은 웃으면서 방관했을 뿐이니까.
속이 메스꺼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악착같이 발버둥 치는 모습을 관전하는 게 어련히도 좋았나 봐.”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면 쓰나. 단지 탑을 위해서 필요한 수순이었다네. 그렇게 말하면 자네도 알아들을 수 있겠지?”
“염병하네.”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인상을 구겼다.
오로지 자기의 욕망을 위해 멀쩡히 고향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터전을 망가뜨리고, 희망을 유린한 행위가 허락될 리는 없었다.
내가 그런 반응을 보이거나 말거나, 놈은 상관없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훗, 그래봤자. 움직이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다. 거기에서 잘 보고 있게나, 내게 거스른 플레이어들의 말로를 말이야.”
마신은 둘리와 나를 지나치고는 유채아와 소녀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놈의 발걸음에 유채아와 소녀는 도망치려 했지만, 몸이 마비된 탓에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혀를 차며 포켓에서 생명의 반지를 꺼내 손에 쥐었다.
사람이 가장 방심할 때는 언제일까?
다른 무엇도 아닌, 일이 의도대로 잘 풀리고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고 있을 때.
이변은 그때 벌어지기 마련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투명화를 발동하자, 놈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나는 그때를 노려 빠르게 쇄도했다.
씌잉!
마신은 내 접근을 막기 위해 도끼를 들어 회전시켰다.
강렬한 바람이 일대를 밀어냈다. 자칫하면 나 또한 강풍에 휩쓸릴 뻔했지만, 그 타이밍에 투명 질주를 발동.
3.5초간 물리적인 힘에서 벗어난 내 신형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졌다.
“흐읍!”
예리한 칼날로 팔뚝을 베어낸 다음, 놈의 뒷덜미를 붙잡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플레이어들이 모여있는 회장으로부터 충분히 멀어졌을 즈음, 나는 놈의 몸을 지면을 향해 내동댕이쳤다.
쿠웅, 과격한 파찰음과 함께 놈이 떨어진 장소로부터 거대한 싱크홀이 일어났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온몸의 뼈가 골절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충격이었건만, 마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옷을 털며 일어섰다.
“시스템의 영향에서 벗어날 줄이야. 설마 했는데 카르텔 그년하고 접선이라도 한 모양이로군.”
마신 역시 짚이는 부분이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쯧, 도둑고양이 같으니. 이런 일이 생길까 봐. 다른 놈들에게 찾으라 시켰건만. 뭐, 지금 와서 신세를 한탄해도 달라질 건 없겠지.”
놈이 손을 휘젓자, 지면이 솟아나며 원 상태로 되었다.
“그래서 준비한 게 고작 이것뿐인가? 나를 속이면서까지 벌인 짓이 겨우 이것뿐이라면 자네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다만.”
“걱정은 접어둬. 실망시킬 일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 필요한 일이기도 했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회장에서 놈과 싸우기에는 주변에 다른 플레이어들이 많았다. 만약에 궁지에 몰린 마신이 인질극을 벌인다면 곤란했기에.
‘물론 장소를 옮기기 위해서 아티팩트를 쓴 건 좀 아깝긴 하지만.’
뭐, 그 덕분에 불안감을 배제했다면 싸게 먹힌 셈이었다.
놈에게 같은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은 뼈아팠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장의 무기가 없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백룡 시리즈의 세트 효과를 발동합니다.〉
〈속성의 권능이 담긴 보옥을 흡수해 10분간 사용자의 잠재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립니다.〉
포켓에서 전기의 정기를 꺼내 갑옷의 심장부에 가져다 대자, 정기가 흡수되며 강렬한 힘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푸른 뇌전이 갑옷 위를 감싸듯 덮어씌워졌다.
아티팩트의 능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발동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두 손을 내려다보며 확신했다.
‘이거라면…….’
어쩌면 놈을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민은 짧았다.
아티팩트에 걸려 있는 리미트 시간은 10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으나 허투루 쓸 순 없었다.
지면을 박차고 정면으로 뛰어들자, 내 몸은 뇌전의 줄기처럼 앞으로 뻗어나갔다.
단 한 걸음이었으나 모든 신체 능력이 한 단계씩 올라간 느낌이 체감되었다.
파지지직, 검과 도끼가 격돌하자 주변으로 퍼져나간 뇌전이 마신의 몸을 경직시켰다.
그래봤자 몇 초 남짓.
하나 경지에 다다른 실력자 간의 전투에서 몇 초간의 간극은 상대의 신체를 빼앗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창으로 변환시킨 다음, 창대를 휘리릭 돌려 놈의 시야를 현혹한 다음 창날을 위로 향했다.
잽싸게 날아간 창날은 놈의 눈을 꿰뚫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손끝에서 피어난 전격은 창대를 타고 전류했다.
강력한 뇌전은 놈의 시야를 앗아갔다.
“끄윽!”
타격에 성공한 모양인지, 마신은 처음으로 신음을 내며 도끼를 휘둘렀다.
시각으로 보고 휘두른 게 아니라 감각으로 움직인 거라 정밀도가 크게 떨어졌다.
그 덕분에 어깨가 살짝 스치는 수준에 그쳤다.
아릿한 고통과 함께 피가 흘렀지만, 전투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출혈이야 전류가 부상을 입은 부위를 지지며 상처가 아물었다.
아프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지속되는 출혈에 의해 꼴사납게 쇼크사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는 창대를 걷어찬 후, 건틀렛으로 전환시킨 후 근접전으로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마신은 좁혀진 시야로 인해 내가 접근할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전처럼 회복을 하려고 해도 상당한 시간이 소모될 것이다. 단순히 부상을 입은 것이라면 몰라도 몸에 남은 뇌전이 끈덕지게 방해할 테니까.
또, 나 역시 회복할 틈을 줄 생각은 없었다.
‘이만한 기회는 날마다 오는 게 아니거든.’
놈을 향해 전류를 휘감은 건틀렛을 날리던 그 찰나, 지면이 붕괴하며 마신은 하늘 위로 떠올랐다.
붕괴된 지반 역시 하늘 위로 떠오르더니, 내 접근을 막으려는 듯 허공 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혀를 내둘렀다.
“시야가 보이지 않으니, 아예 접근 자체를 막겠다는 건가. 머리 좀 썼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는 입이 타들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저건 사기잖아!
백룡의 시리즈에는 자동세척 기능, 수중 호흡 기능, 자동 탈착용 기능 등등 어지간한 능력은 다 들어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하늘을 나는 효과만은 존재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어이없음을 넘어 놀라울 정도였다.
아니, 명색이 백룡의 로드의 외피로 만든 아티팩트인데 하늘을 못 난다고?
어쩔 수 없이 손에 뇌전의 창을 만들어 놈을 향해 쏘아냈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바위에 막혀 사그라들었다.
“직접 올라갈 수밖에 없나.”
이대로 시간을 낭비하는 건 좋지 않았다.
아티팩트의 시간이 발동 중일 때, 승부를 봐야만 했다.
곤란해하고 있을 즈음, 멀리서부터 둘리의 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놈을 향해 브레스가 내뿜어졌다.
“한별 타라! 둘리가 올려보내 주겠다!”
둘리의 외침에 나는 지면을 도약해 녀석의 머리 위에 탔다.
“너, 여긴 어떻게?”
“헤헤, 한별이라면 여기에 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천진난만한 둘리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녀석도 참…. 이런 상황에서까지 돕기 위해서 오다니, 둘리답다면 둘리다운 행동이었다.
둘리의 도움을 받아 상공을 향해 뛰어올랐다.
당연히 내 움직임을 막기 위해 무수한 바위가 우박처럼 내렸지만, 오히려 잔해를 지르밟으며 상공을 향해 등반했다.
마지막에 이르러 천장에 도달하자, 산발이 된 놈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 새 많이 회복한 모양인지 전에 비해 안색이 밝아 보였다.
“기여코 여기까지 오다니, 집념 하나는 대단하구나.”
비아냥이 섞인 말투, 하나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반응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
집념 하나로 따지자면 어떤 사람을 데리고 와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튜토리얼에서 999년간 악착같이 발버둥을 쳤는데 못할 건 없지.
쿠르릉, 뇌운이 요동친다 싶더니 천장에서 떨어진 벼락이 내 검에 깃들었다.
“슬슬 끝내자, 이제는 지겹잖아.”
“크큭, 입만 산 놈이 재밌군, 재밌어. 그래, 그렇게 원한다면 끝내주마.”
내 말에 마신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도끼를 들었다.
도끼에는 파군(破軍)의 정기가 담기며 상당한 박력을 이끌어냈다. 그에 반면 내 검에는 수십 다발의 벼락을 충전한 뇌전이 공기를 찢어발겼다.
이윽고 격돌하는 검과 도끼.
각기 다른 권능이 담긴 무구는 격돌하며 천장과 벽, 지면을 갉아 먹어갔다.
이미 한계를 초월한 지는 오래.
뇌전이 혈관 속을 빠르게 타고 흐르다 못해 온몸의 모공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 와중에도 내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 수백, 수십 개의 시스템창이 디버프를 걸었지만, 나는 상관없다는 듯이 움직였다.
그리고 뒤로 크게 젖힌 마신의 도끼가 내 팔을 내려찍으려던 그때!
“이걸로 효과도 다 됐나.”
“뭐, 뭣이!”
내가 씩 웃으며 손에서 검을 놓자, 마신은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렇겠지. 멀쩡히 싸우고 있던 적이 무기를 버렸으니.
검이 손에서 떨어진 것과 동시에 아티팩트의 효과가 바닥나며 온몸에서 맴돌던 뇌전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뇌전이 소멸하는 것과 동시에 내 손바닥으로부터 수십 다발의 보랏빛 촉수가 뿜어져 나왔다.
[이터의 권능을 발동합니다.]
이터의 권능은 마신의 도끼를 흔적도 없이 먹어 치운 다음, 놈의 몸을 향했다.
보랏빛 촉수에 의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마신을 바라보며 나는 말을 덧붙였다.
“이걸로 체크메이트다, 새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