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내 말에 마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마신으로부터 강력한 풍압이 쏟아졌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뒤편에 서 있던 플레이어들은 풍선처럼 휩쓸려 나갔다.
나는 클레이모어의 무게를 이용해 휩쓸리지 않도록 버텼다.
바람이 멎어들 찰나, 마신의 신형이 사라졌다.
언뜻 보면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 같이 제자리에서 사라진 것 같지만, 실은 엄청난 속도로 인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그리고 놈이 나타날 장소는…
“후읍!”
가볍게 숨을 들이켜며 검을 측면을 향해 휘두르자, 묵직한 감각과 함께 놈의 도끼가 시야에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일격으로 손아귀가 저릿저릿했으나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로우킥으로 마신의 옆구리를 걷어차곤, 빈틈을 노려 놈의 허벅지에 단검을 날렸다.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비수는 놈의 허벅지에 닿기도 전에 기세에 휩쓸려 바닥에 떨어졌다.
‘역시 호락호락하진 않다는 건가.’
질량이 적은 무기는 놈의 기세에 휩쓸려 몸에 닿지 않는다.
그렇다고 확실하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클레이모어 같은 무기는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다.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놈에게 접근하기는 벅찼다.
그렇다고 해서 또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속도로도 안 된다면 더 빠르게.
그걸로도 부족하면 더 더 빠르게.
더 더 더 빠르게.
설령 몸이 부서진다고 하더라도 악을 쓰면 되리라.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만든다, 지금까지 이뤄냈던 일이다. 항상 해오던 것을 결정적인 순간에 해내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후우.”
나는 검을 어깨에 짊어지고는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눈을 번쩍 떴을 때쯤, 내 몸은 비수와 같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속에 가속을 더하자 주변 풍경이 쉼 없이 지나갔다.
가공할 만한 속도였지만, 반면 내 눈에는 치열하게 전투 중인 플레이어들부터 시작해 경로상으로 날아드는 도끼, 치열한 전투의 흐름까지 모든 게 보였다.
평소라면 쉽사리 보이지 않았을 것들이지만, 눈이 속도에 적응한 까닭이었다.
꽤나 신속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마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놈의 눈동자는 정확히 내 시선과 마주치고 있었기에.
‘따라잡혔다고?’
이걸로는 마신을 추월하기에는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나는 어금니를 까득하고 깨물었다.
있는 힘껏 지면을 박차고 상공으로 도약했다.
천장의 잔해를 지르밟으며 빠르게 움직이자, 중력가속도가 더하면서 스피드가 상승했다.
이제는 눈으로는 인지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였지만, 보지 못하면 감각으로 움직이면 된다. 속도가 절정에 다다랐을 무렵, 나는 기둥을 박차고 일직선으로 떨어졌다.
목표는 놈의 어깨.
촤악!
잔영을 남기며 쇄도한 검은 정확히 놈의 어깨를 꿰뚫었다.
놈의 어깨에서 피가 한 움큼 솟아 나왔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검을 비틀어 힘차게 베어냈다.
어깻죽지가 길게 베여나가며 검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새하얀 뼈가 드러날 정도의 중상이었으나 마신은 아무렇지 않게 팔을 들어 올렸다.
“이게 ‘고통’이라는 느낌인가 보군. 몸에 이런 감각이 느껴지는 건 정말로 간만이야.”
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위기감을 느끼곤 뒤로 물러섰다.
내 판단은 옳았다.
바닥에 쏟아진 혈흔은 마치 시간이 역행하는 것처럼 방울방울 솟아나는가 싶더니, 마신의 손아귀에 흡수되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어깻죽지에서 새살이 돋아났다.
부상은 눈 깜짝할 사이에 회복되었다.
김이 빠질 정도로 허무한 광경이었다.
‘역시 쉽지는 않나.’
나는 손에 쥔 검에 재차 힘을 주며 태세를 정비했다.
“간만에 가슴을 뛰게 만들어줬으니, 나 또한 재밌는 걸 보여줘야겠지.”
마신은 천장을 향해 맨손을 뻗었다.
그 상태로 주먹을 쥐고 잡아당기자, 폐허가 된 천장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천장으로부터 수십 개의 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에 나는 당황하지 않고 검을 휘둘러 비껴냈다.
쿠구궁!
재차 검을 내찔러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기둥을 막으려는데, 딛고 있던 바닥이 울컥 솟아 나오며 일순 중심을 잃었다.
한순간 자세가 흐트러지면서 빈틈을 향해 기둥이 떨어졌다.
강렬한 충격이 복부에 작렬하며 통증이 잇따랐다.
상당한 고통이었지만, 백룡 시리즈가 남은 데미지를 흡수했기 때문에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포켓에서 포션을 꺼내 들이켜자, 마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꽤 놀랐나 보군. 그럴 만도 하지 이 공간은 내가 만들었으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나.”
그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그쪽이 대단한 건 알겠지만, 그런 것치곤 우리들까지는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보였는가? 아무래도 얕보인 거 같은데, 그렇게 판단하면 곤란하지.”
내 도발에 마신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불길한 감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감각은 현실이 되었다.
〈띠링!〉
지금껏 탑을 등반하면서 수없이 들었었던 청명한 알람 소리.
평소라면 괘념치 않게 넘겼을 테지만,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모든 플레이어의 감각이 마비됩니다.〉
이어진 시스템 창과 함께 주변에 서 있던 플레이어들은 다리가 풀리며 제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았다.
그나마 유채아와 소녀는 쓰러지는 것만큼은 면했지만, 그마저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시야에 떠오른 시스템 창을 바라보며 인상을 구겼다.
놈이 탑을 제작했다면 제맛대로 시스템을 운용할 수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까지 염두에 두지 않았다니 생각이 짧았다.
머지않아 내 감각도 마비될 터, 무방비해지기 전에 대비책을 세워야만 했다.
“둘리야!”
“알았다!”
서둘러 둘리를 부르자, 녀석은 귀를 쫑긋 세우며 달려왔다.
눈치껏 전황을 알아차렸는지 꼬리를 이용해 내 몸을 가렸다.
“좀 있으면 못 움직일 테니까. 그전까지 최대한 버텨…….”
나는 서둘러 말하다 말고, 의아함을 느끼곤 말꼬리를 끊었다.
‘뭐야? 괜찮은데?’
문득 몸 상태를 살펴보니, 그저 손끝이 저릿한 느낌만 들 뿐이었지. 다른 플레이어들과 같이 특출난 변화는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손아귀를 쥐었다 피기를 반복하며 몸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도 움직이는 데에는 별문제가 없는 듯했다.
오히려 적당한 감각 마비 덕분에 내내 감돌던 통증이 싹 가셨다.
의외의 상황에 마신의 얼굴을 살펴봤지만, 놈은 이 사실을 모르는 듯 보였다.
“그렇다면 제3의 요소라는 건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던 거 같은데.’
그때도 시스템의 영향으로 오감 중 하나가 마비되어 곤혹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 뒤에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시스템의 영향을 풀 수 있었더라…?
기억은 흐릿했지만, 모종의 계기는 있었다.
당시에 우리는 허허벌판을 걷다 말고 피라미드를 발견했고, 그 뒤에 샘물을 발견하곤…….
“아…!”
“왜, 왜 그런가 한별! 큰일이라도 났나!”
나지막이 내뱉은 외침에 둘리가 화들짝 놀라며 반응했다.
녀석의 모습에 나는 무안한 얼굴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을 덧붙였다.
그건 그렇고.
모든 게 떠올랐다.
나는 품속에 내내 지니고 있던 로자리오를 꺼내 손에 쥐었다.
〈성물이 표식을 연속으로 발견함으로써 우연이 아니라 간주합니다.〉
〈성물에 성신의 권능이 깃듭니다.〉
- 전체 수집률: 81%
당시에도 이와 같은 시스템 창이 뜨고 나서 탑의 제약이 사라졌었다.
지금까지는 시스템 창에 떠오른 퍼센티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었는데, 문득 떠올랐다.
‘설마 성신의 권능이 탑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건가?’
우연히 떠올렸으나 제법 그럴싸한 가정이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보니 샘물에서 권능을 수집한 뒤로는 탑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 같았다.
게다가.
둘리가 몸을 내세워 앞을 가로막은 덕에, 마신에게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듯했다.
절호의 찬스였다.
나는 놈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치열한 리액션을 벌였다.
“허억허억, 그래서 이게 네가 가진 비장의 수라고?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걸 보면 마신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나 봐.”
“하하핫, 입만 살아서는 볼만한 꼴이구나. 뭐… 자네들은 꼭 살려둬야 하는 이유가 있거든.”
“이유?”
다행히도 의심을 피한 모양인지 마신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화를 이었다.
놈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눈썹을 들썩였다.
“그런 셈이지. 자네는 이 세상에 탑이 도래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뭐, 꿈이나 희망… 그런 게 아니겠어.”
“맘속에도 없는 말이나 하기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자 마신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것도 잠시, 놈은 근엄한 목소리를 냈다.
“세상에는 실이 있다면 득도 있는 법, 탑은 플레이어들에게 인지를 벗어난 이능을 주지. 반대로 플레이어들은 탑이 이어나갈 힘을 돌려준다네.”
“이게 무슨 뜻이지?”
두루뭉술한 이야기에 나는 물음을 던졌다.
“돌아갈 고향이 없이 탑에서 죽은 자는 NPC가 된다. 그리고 알다시피 지구는 탑에 의해서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잠식되어 가지.”
“…….”
“역시 반응을 보니, 그 사실은 알고 있었나 보군.”
마신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탑을 등반하면서 수많은 NPC와 플레이어, 그리고 주어진 환경을 보면서 한 번쯤은 가정해본 이야기였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술자리에서 할 법한 우스갯소리였기도 했고.
당시에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라고 치부했었건만… 마신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오니 머릿속이 딱딱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놈은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물었다.
“만약 탑에 의해 지구가 소멸한다면 탑에 남은 자들은 어떻게 될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