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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71화 (171/175)

제171화

“만약에 내가 원하는 게 네놈의 목이라면 흔쾌히 따주나 싶어서. 그 조건이면 피차 좋은 거래가 될 거 같지 않아?”

“……!”

내 목소리에 주변에서 경악이 섞인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나와 함께 탑을 등반한 유채아와 소녀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얼굴을 쓸어넘겼지만, 나에 대해 모르는 플레이어들은 제법 신선한 반응을 보였다.

누가 보면 동물원 속 침팬지라도 된 줄 알겠어.

마신은 한참 뜸을 들이다 말고 답변을 내놓았다.

“기대를 배신한 거 같아 안타깝게 되었지만, 고작 그걸로 내 목숨을 치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서 말이지.”

“새끼, 처음부터 마음이 없었으면서 튕기기는.”

이렇게 될 줄 알았기에 실망하진 않았다.

이걸로 협상도 결렬이니, 더 이상 봐줄 필요는 없었다.

“둘리야 봐주지 말고 쓸어 버려.”

“알겠다! 둘리한테만 맡겨라!”

내 명령에 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성체화를 했다.

연회장의 중심에 난데없이 성체급 드래곤이 나타나자 이를 지켜보던 플레이어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얼마나 당황한 모양인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플레이어들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제자리에서 풀썩 쓰러지는 플레이어도 있었다.

아무래도 다른 탑에서도 드래곤의 존재는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듯했다.

하나 드래곤이 상대라도 자신의 뒷배가 마신이라는 걸 상기했는지 플레이어들은 재차 투지를 끌어올렸다.

“음… 역시 이걸로는 포기해주지 않나 보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나.

조금 귀찮겠지만 전면전은 상정해두고 있었다. 지금 와서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발끝으로 지면을 툭툭 치자, 백룡 시리즈가 연미복 위에 덧씌워지듯 착용되었다.

다른 갑옷이라면 거추장스럽게 갈아입어야겠지만, 백룡 시리즈에는 자동 탈부착 기능이 있었기에 갈아입기 편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자 신호한 것도 아닌데, 누구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다.

그들한테는 미안하게 됐지만, 느긋하게 봐줄 생각은 없었다.

누구처럼 상냥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둘리야, 처음부터 전력이다.”

“알겠다! 둘리에게 맡겨만 달라!”

내 외침에 둘리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딱히 일러두지 않아도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는 대답이었다.

간만에 의지를 불태우는 녀석의 모습에 싱긋 웃음을 지었다.

괜한 걱정이었네.

“미리 경고하지만, 빠질 사람은 먼저 빠져. 후회하지 말고.”

뭐… 지금 경고해봤자 잔뜩 흥분한 그들의 귀에 목소리가 들릴 리는 없겠지만.

나는 백룡의 장갑을 끼고는 정면으로 걸어 나갔다.

항상 생각하던 거지만, 단체전에서는 충격요법만 한 게 없거든.

플레이어들의 공격이 닿기 직전, 나는 있는 힘껏 지면을 내리찍었다.

콰과과광!

지면이 쩌저적 갈라짐과 동시에 밑에서부터 솟아 나온 토사가 플레이어의 공격을 가로막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플레이어들의 움직임이 짐짓 멈췄다.

그 사이를 파고들어 선두에 선 플레이어의 배를 올려 찍는다!

천장의 한가운데에 플레이어의 머리가 박히자, 다른 플레이어들은 숨을 죽였다.

그들의 머릿속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그걸로 놀라면 어떡해.”

아직 놀라기에는 많이 남았는데.

때마침 뒤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는 게 느껴졌다. 몸을 뒤로 내뺌과 동시에 배후에서 준비하고 있던 둘리가 브레스를 내뿜었다.

입속에서 압축된 흑염이 일직선으로 작렬했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플레이어들이 방패를 치켜들고 앞을 가로막았으나 그들의 방어력으로는 드래곤의 브레스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콰광! 공기를 찢기는 파열음과 함께 브레스의 일직선상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휩쓸렸다.

살아남은 것은 브레스의 측면에 서 있던 플레이어들뿐.

그나마도 중상을 입어 움직이기에는 벅차 보였다.

“이것도 적당히 조절한 건데, 엄살떨지 마. 단지 죽을 만큼 아플 뿐이지, 뒈지지는 않아.”

아, 물론 운이 지지리도 없다면 보장하진 못한다.

나는 피식거리며 초토화가 된 길목을 걸어갔다.

흑염은 연회장의 바닥과 벽을 따라 모든 것을 불사질렀다.

화르륵, 흑염이 천장까지 범위를 넓혀가자 연회장 전체를 빛내던 샹들리에가 지면에 떨어지며 유리 조각이 사방에 흩날렸다.

블랙드래곤의 흑염은 맞닿은 모든 것을 불태우지 않는 한, 꺼지지 않는 불꽃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번에는 어디까지나 제압할 목적이기 때문에 둘리에게 불꽃의 성질을 최대한 줄이라고 언질을 줬었지만, 그마저도 이 모양이라니.

그렇다고 해서 놀랍지는 않았다.

플레이어 중에는 둘리와 맞먹을 만한 강자는 없다는 것은 이미 파악했던 바였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나.

나는 마신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놈은 처음부터 플레이어들을 도와줄 생각이 없었는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관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녀석한테는 다른 플레이어들한테는 느끼지 못했던 강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오싹오싹한 감각이 살결을 찔렀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마신을 향해 다가섰다.

그리고는 능글맞은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준비한 건 이게 전부야?”

“크하하핫, 지금까지 수많은 플레이어를 봤지만 이렇게까지 당돌한 녀석은 처음이로군. 네놈의 뻔뻔함에는 나도 한 수 접어야겠구먼.”

마신은 나를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잠시, 놈은 뒤편을 가리키며 느긋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래서 저것들은 직접 상대하지 않아도 되겠던가?”

“글쎄, 그쪽의 부하들과는 달리 나와 함께 하는 녀석들은 그런 걱정이 필요 없거든.”

내 말을 끝으로 강력한 충격파와 함께 플레이어들이 우수수 쓸려나갔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유채아와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별 씨, 이쪽은 신경 쓰지 마세요!”

“아저씨는 아저씨 볼일만 봐. 나중에 확인했을 때 1인분도 못하면 보자고!”

뒤늦게 난입한 그녀들의 등장에 플레이어들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단순히 수적으로 본다면 한참 불리한 건 이쪽이지만, 둘리의 활약 덕에 적의 기세는 꺾일 대로 짓밟힌 상태였다.

적이라고 해봤자 우연히 살아남은 잔당에 불과했기에 걱정할 일은 생기지 않으리라.

게다가.

“난 수준 떨어지는 놈들하고는 겸상을 안 하겠다는 주의라.”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그 답변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마신은 재차 제안을 권했다.

“재밌군, 재밌어. 아무리 봐도 아쉽단 말이지.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말하려무나. 자네 같은 강자가 휘하에 들어오는 건 환영이니.”

“새끼가, 귀라도 막혔나. 말했잖아 수준 떨어지는 놈하고는 겸상 안 한다고, 그건 너도 포함이야.”

손가락에 묻은 귀지를 후하고 불며 뇌까렸다.

적의가 듬뿍 담긴 내 발언에 놈의 눈썹이 들썩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놈이 서 있는 단상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초승달 모양으로 날렵하게 쇄도한 풍압은 놈이 서 있는 자리에 격돌했다.

단상으로부터 후풍이 일어나며 각종 잔해가 하늘에서부터 쏟아졌다.

“그러니까, 쫑알쫑알 씨부리지 말고 덤비기나 해.”

기다려주는 것도 지겨우니까.

내 말을 끝으로 짙은 연기를 가르며 검은 인영이 달려들었다.

자칫 한눈을 팔았다간 아무것도 모른 채, 당하기에 충분한 스피드…!

평소라면 적의 공격을 어떻게 맞받아치면 효율적일지 계산부터 했지만,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머리로 판단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움직였다.

채애애앵!

검과 도끼가 정면에서 격돌하자, 새빨간 스파크가 튀었다.

단 한 번 맞붙이였을 뿐인데, 참고 있던 숨이 한 번에 새어 나왔다.

강자와의 싸움에서는 첫 격돌에서 상대의 기량을 파악할 수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내가 판단한 놈의 무위는….

‘역시 쉽지만은 않나.’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놈의 실력과 드래곤 로드의 힘을 비교한다면 로드의 힘 따위는 도마뱀 수준으로밖에 안 느껴졌다.

드높은 절벽에 앞을 가로막은 듯한 기분이었으나 나는 이를 악물며 놈의 도끼를 떨쳐냈다.

그와 동시에 놈의 몸이 지면에 스며 들어간다 싶더니, 이내 배후에서 도끼가 쇄도해 들었다.

섬전과 같은 속도.

가까스로 놈의 움직임을 따라잡았지만, 반응하기에는 늦었다.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투명팔찌를 써야 하나.’

아티팩트를 사용하면 놈의 공격을 흘러낼 수 있을 테지만, 관두기로 했다.

한 찰나에 위기를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 손에 있는 패는 최대한 숨겨두는 게 좋았다.

설령 지금 닥친 위기를 회피한다고 해도.

그다음은?

다음의 다음에는?

놈이 방비책을 세우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게다가 탑을 관리자라면 아티팩트의 효과가 통하지 않을 가능성까지 염두 하는 게 좋았다.

대신에 검을 기다란 장대로 전환한 다음, 지면을 있는 힘껏 밀쳐냈다.

씌이잉!

잽싸게 날아든 도끼는 장대의 일부를 잘라냈지만, 이미 놈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뒤였다.

나는 백덤블링으로 뒤로 물러선 다음, 검을 꽉 잡으며 근육을 긴장시켰다.

첫 번째 격돌에 손이 떨려왔으나 오히려 전투의 긴장감을 신체에 적응시켰기에 좋았다.

순식간에 나와 거리를 벌린 마신은 건들거리며 도끼의 날을 매만졌다.

“확실히 큰소리를 칠 정도의 실력은 되는군. 과연… 탑에 나와 맞먹을 수 있는 플레이어가 있었다니 상상 이상이로군.”

“적어도 누구처럼 약속해놓고 내빼는 허풍은 떨지 않거든.”

“하하… 남의 속을 긁는 것 역시 수준급이야.”

내 비아냥에 마신은 히죽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는 너도 제대로 싸우지 않고 간만 보는 건 매한가지잖아.”

“알고 있었나.”

“물론이지.”

한 번의 격돌로 전부 판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지.

나는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무기를 클레이모어로 전환했다.

방금 전의 공방에서 놈은 결코 전력을 내보이지 않았다. 쉽게 말하자면 이번 공방은 간단하게 주고받은 인사치레일 뿐, 전초전은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내 물음이 정답이었는지, 놈의 몸에서부터 방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기세가 소용돌이쳤다.

그저 보는 걸로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 강함.

다른 플레이어들이었다면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섰을 테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한 발짝 다가섰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마신과의 전투는 이제 막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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