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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70화 (170/175)

제170화

나는 정면의 무대를 바라봤다. 불과 10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

아주 짧은 거리였지만, 내 시선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무대 뒤 어둠 속에서 검은 형체가 움직였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검은 형체가 나타나자,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은 몸을 부르르 떨며 놀란 반응을 보였다.

아니, 그보다도 놈에게서 느껴지는 귀기(鬼氣)를 느낀 까닭이리라.

고작 등장만 했을 뿐인데 회장의 분위기를 휩쓸다 못해 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작은 소란이 모이기 시작하면 소음이 되기 마련이다. 내빈객들의 목소리가 하나둘씩 겹쳐 소음을 만들어내자 회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한 번 일어난 소란은 멈추기 어려운 법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란은 멎어 들었다.

이어진 목소리로 인해서.

“조금 어수선하군.”

“⎯⎯!”

짧은 한마디였지만, 너머로부터 들린 목소리에는 그만한 박력과 힘이 있었다.

이윽고.

검은 인영은 스포트라이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탑의 관리자라 불리는- 일명 마신의 실체가 드러났다.

놈은 펄럭이는 망토와 함께 마치 제복을 연상케 하는 시꺼먼 옷을 입고 있었는데, 우직해 보이는 거구는 공포감을 형성했다.

마신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도끼를 지면에 내려뒀다.

“제군들 잘 찾아왔다! 먼저 소개를 하자면 나는 탑의 관리자이자, 그대들을 이곳에 초청한 장본인이라네.”

놈의 외침에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리되었다.

그렇지만 분위기에 의해 휩쓸린 것뿐이지, 근본적인 불안감은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 익숙한 유채아나 골리엇은 덤덤하게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주변에 있는 빈객들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짙은 불안감이 깔려 있었다.

그것도 잠시, 마신은 본론으로 들어섰다.

“이렇게 서 있는 것도 시간 낭비일 테니,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지. 우선 그대들은 ‘각’ 탑의 대표로 선발된 자들이네. 플레이어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자질을 가졌으며 탑을 통해 그 실력을 증명해주었어.”

마신은 과장스럽게 양팔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놈은 무덤덤하게 입에 담아서 그렇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무심코 의문을 떠올렸다.

“각… 탑의 플레이어라고?”

그게 무슨 뜻이야, 탑이 하나뿐이 아니라고?

내가 모르는 다른 뜻이 있지 않을까 해서 머리를 굴려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외의 의미는 떠오르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자,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빈객들도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나 역시 놈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이해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때마침 마신이 설명을 덧붙였다.

“흠… 아무래도 혼란스러운 듯하군. 어렵게 생각할 거 없이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네. 탑이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면 곤란하지.”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설마, 여기에 있는 사람들 전원이 플레이어라고?’

경계해야 할 건 마신뿐만이 아니었나.

저들의 실력과 능력도 모르는데 먼저 나서는 건 섣부른 판단이었다. 저들이 어떤 스탠스로 나올지 모르니 가능한 패는 숨겨두는 게 유리했다.

그보다도 나는 마신을 흘겨보며 인상을 구겼다.

마신은 어째서 탑의 플레이어들을 이곳에 초청했을까.

순수하게 연회를 즐기기 위해서?

‘개소리겠지.’

탑에 들어온 직후라면 몰라도 지금까지 탑을 등반하면서 수많은 경험을 하고. 또, 수두룩한 위기 속에서 맞서 싸웠다.

오랜 경험을 기반해 확신할 수 있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마신은 입가에 불쾌한 호선을 그리며 입을 열었다.

“연회라는 명분을 통해 그대들을 초대한 이유는 단 하나. 자네들의 선택을 보기 위해서라네.”

“선택?”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의문에 마신의 시선에 내가 있는 방향에서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놈은 의도적일 정도로 내 눈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탑에는 수많은 강자가 존재한다네. 그들은 자신의 꿈과 희망, 그리고 제 실력을 믿고 열심히 등반하지. 하지만 자네들은 그들 중에서도 훨씬 월등한 실력과 그에 걸맞은 힘을 가지고 있어.”

“…….”

“나는 말이야. 그런 귀중한 인재가 헛되이 소모되는 게 싫어서 말이지. 그래서 자네들에게 제안… 아니, 기회를 주겠네.”

놈은 기회라는 단어를 강조해 말하며 눈을 번쩍 떴다.

안광이 반짝 번뜩이며 강렬한 기운이 소용돌이치듯 회장 내를 감돌았다.

마치 폭풍을 연상케 하는 압력에 내빈객들은 어금니를 깨물며 힘겹게 저항해냈다. 하나 그게 시작이라는 듯 시간이 흐르자 일부 플레이어들은 제자리에서 혼절했다.

가공할 만한 압박감이었지만, 나는 가볍게 어깨를 터는 것으로 저항해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불길한 느낌은 항상 적중하기 마련이었다.

“선택지를 주도록 하지. 고르시게나. 지금 이 자리에서 내게 복종할 것인지 혹은 이 자리에서 죽어줄 것인지. 내게 복종하면 탑을 등반할 필요도 없이 원하는 걸 바로 주도록 하지. 하나 그 반대는….”

끝까지 말을 잇지 않았지만, 이어질 뒷말을 떠올리기에는 충분했다.

갑작스레 주어진 선택지에 빈객들은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줄곧 이어진 상황에 사고가 따라가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탑을 등반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던 그들일 텐데, 탑의 관리자라는 이가 탑을 등반할 것도 없이 소원을 이뤄주겠다고 한다.

곁으로 보기에는 달달한 과실 같지만, 어느 정도 탑을 경험한 그들이기에 불안한 거다.

달달한 과실이 알고 보니 독이 든 사과가 아닐까 하고.

하지만 선택지는 두 개밖에 없다.

달달한 과실이 됐든 독사과가 됐든, 고르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어차피 죽을 거라면 난 놈의 말을 믿어보겠어.”

회장에 있던 누군가가 결심한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그마한 혼잣말이었으나 그 파장은 파도가 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거의 모든 플레이어가 마신 측에 붙었다.

‘표면상으로 보자면 거절할 이유는 없으니까.’

나는 뒤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모두가 마신의 의견에 찬동한 가운데, 유채아와 소녀만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가볍게 너스레를 떨었다.

“들어보면 괜찮은 기회 같은데 어때? 낙화산으로 갈아탈 수 있는 기회잖아.”

“한별 씨는 짓궂기는요. 뻔히 보이는 함정이잖아요. 겪어보니까, 탑이 사탕발림 소리를 하면 죄다 함정이더라고요.”

“그런 셈이지. 그러는 아저씨도 저쪽에 안 붙은 건 마찬가지잖아. 안 그래?”

긴장을 풀기 위해서인지, 녀석들은 헛웃음을 흘렸다.

맞는 말이었다.

“뭐… 탑하고는 이런저런 악연이 있어서 말이지.”

“그렇다면 저도 마찬가지예요. 악연이라면 한별 씨보다도 자신 있거든요.”

유채아는 채찍을 꺼내 들며 의욕을 드러냈다.

잘됐네, 나도 그 의견에는 동감이거든.

이걸로 협상은 결렬이다.

마신도 그렇게 여겼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하핫, 아쉬운 인재를 잃었어. 어쩔 수 없나.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내게 거스르는 놈들의 목을 가져와 증명해 보거라.”

마신이 플레이어들을 향해 선언하자, 그들의 시선이 한데 쏠렸다.

“저놈을? 하, 하지만… 같은 플레이어잖아?”

“알 게 뭐야! 먼저 제안을 거스른 건 저놈이잖아! 자업자득이지.”

“나… 나는 이뤄야만 하는 소원이 있다고.”

한 찰나 동요하는가 싶더니, 일부 플레이어의 외침에 형세가 역전되었다.

이미 예상한 바였다.

어느샌가 플레이어들은 각자 무기를 꺼내 들며 우리를 둘러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유채아와 소녀 역시 무기를 꺼내 들었다.

“한별 씨 어쩔까요?”

“난 지금이라도 싸울 수 있으니까. 언제든 말만 해 아저씨.”

둘 다 최상의 컨디션인지 기세를 끌어올렸다.

의지가 샘솟는 건 좋지만, 나는 그녀들을 제치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됐어. 둘 다 손 쓰지 마.”

“네?”

“아, 아저씨?”

내 말에 둘은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깜빡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라도 다른 뜻이 있을까 싶어서 눈동자를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지만, 아쉽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나는 플레이어들을 무시한 채, 마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갔다.

물론 개중에도 흥분을 못 이기고 덤벼드는 놈들이 있었지만, 전부 둘리의 선에서 정리되었다.

조금 손속이 과해 보였지만, 둘리 녀석도 그동안 품속에 숨어 있는다고 몸이 근질근질했을 테니 내버려 두기로 했다.

오히려 조금 과한 편이 좋았다. 분위기는 곧 기세와 마찬가지다.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유리하게 만들어두는 편이 좋았다.

마신을 앞에 두고, 나는 질문을 던졌다.

“그 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호오, 무엇이지?”

플레이어들을 전부 제압한 채, 앞으로 다가가자 마신은 관심이 동한 모양인지 눈가를 가늘게 떴다.

“분명 말했지? 네 편에 붙으면 원하는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물론일세. 돈과 지위, 명예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청해도 된다. 오는 게 있으면 당연히 가는 것도 있어야겠지.”

마신은 손을 뻗으며 말했다.

가식이 가득 담긴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내 웃음에 놈은 의아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웃기지?”

“아아, 별 건 아냐. 단순히 궁금해졌을 뿐이야.”

“뭐가 궁금하지.”

마신은 눈썹을 들썩이며 내려놓았던 도끼를 집어 들었다.

고작 무기를 들었을 뿐인데, 공기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상당한 기세가 몸을 자극했으나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만약 내가 원하는 게 네놈의 목이라면 어떻게 할 거지?”

본론은 지금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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