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68화 (168/175)

제168화

‘솔직히 나라고 훈계를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니까.’

탑에 들어오고서 나는 꼴리는 대로 멋대로 행동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 있으면 팼으며, 내게 거스르는 단체가 있으면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파멸시켰다.

그로 인해 수많은 원한을 샀다.

그리고 그 원한들이 검을 들이밀면 그마저도 업신여길 수 없도록 박살 냈다.

이미 수두룩한 전과가 있는 내게 치치를 말릴 수 있는 명분은 없었다.

나는 치치의 모자를 벗기며 어깨를 두들겼다.

“긴말은 안 할게. 단지 한 번 사는 인생, 얽매이지 않고 살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살면 되는 거야.”

“…….”

내 말에 치치는 입술을 깨물며 눈시울을 붉혔다.

비록 나한테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치치에게는 일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다.

당시의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도 없으니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고 싶어도 토로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어.”

“히끅… 히끅, 하지만 사상과 로망은 탑이라는 곳에 의해서 설계된 거라고…….”

치치는 쥐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그게 내내 걸렸던 건가.

46층에서 진행자와 싸울 당시, 놈은 치치를 앞에 두고 그런 발언을 입에 담았다.

그때도 놈에게 반박하긴 했지만, 그 의견에 대해선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글쎄, 반대로 생각하면 단순히 설계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손찌검을 당하면서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오로지 네 의지로 이뤄낸 결과고, 결과물이야.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일이지.”

“그, 그런가요.”

내 말에 치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쪽을 바라봤다.

망설임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확신을 담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긍지를 가져.”

진행자의 발언 따윈 믿을 게 못 된다.

놈은 항상 진실 속에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서 타인을 속아 넘기게 만드니까.

이번 일도 항상 일어났던 해프닝일 뿐이다.

분명 그럴 터였으나 왠지 모를 불안감이 뇌리에서 불쑥 튀어나오려고 했다.

‘만약 거짓이 아니라, 정말이라면?’

탑을 등반하면서 NPC에 관해서는 줄곧 의문을 품었었다.

그중에는 탑과 플레이어에 대해 아는 NPC가 있었으며, 반대로 그에 관해서는 일절 모르는 NPC들이 존재했다.

하물며 후자의 경우에는 시스템의 영향에 그대로 노출되기도 했었다.

바로 치치 같은 경우에도 46층에서 47층을 등반했을 뿐인데, 시간이 1년이 훌쩍 흘렀다.

게다가 41층에서는 등반에 실패하고 죽은 플레이어가 NPC로 변하기도 했었다.

탑에서 죽은 플레이어는 다시 지구로 되돌아간다.

그게 플레이어들에게는 상식이었지만, 41층에서 벌어진 일은 지금 떠올려도 의아스러운 일이었다.

‘분명…. 41층에서 NPC로 변한 플레이어들은 고국을 잃었다고 했었던가.’

그리고 지구는 탑에 의해 자연 발생한 괴수들이 대지를 불태우고, 바다를 증발시키며 인간이 생존할 자리를 점점 좁혀 가고 있었다.

만약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 계산된 거라면?

되돌아갈 곳을 잃은 플레이어들은 탑에 종속되어 NPC화가 된다. 그리고 NPC는 탑에 의해 점점 잠식되어 기억을 잃는다면….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은 없겠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망상에도 정도가 있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을 무렵, 옆에 있던 치치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저기 안색이 별로 안 좋은데, 괜찮나요.”

아무래도 심각한 얼굴을 보고 걱정한 모양인데, 나는 치치의 얼굴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게, 방금 전의 일로 펑펑 울어서 그런지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상황을 떠나서 본인도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은데, 걱정해주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별일 아니라는 양, 가볍게 손을 젓자 치치는 한결 나아진 얼굴로 이쪽을 마주했다.

“어쨌든 감사해요. 덕분에 한결 나아진 거 같아요.”

〈히든 스테이지의 조건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따라서 47층이 클리어됩니다.〉

〈곧이어 다음 층으로 이동합니다.〉

치치의 감사 인사와 함께 이번 층이 종료되었다는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이걸로 이번 층도 마무리.

불에 타버려 잿더미가 된 마탑의 위에서 이렇게 마무리 짓는 것도 영 찜찜했지만, 탑을 빠르게 등반할 수 있다면 곁으로 보이는 형태야 상관없었다.

때마침 하늘에서부터 섬광이 떨어졌다.

다음 층으로 향하는 빛.

무의식적으로 나와 헤어질 것을 직감한 치치는 사뭇 아쉽다는 얼굴을 지었다.

“이제 가시는 건가요?”

“그래야지.

* * *

〈48층으로 이동합니다.〉

〈삐빅, 전송 중 변동 사항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대기실로 이동하겠습니다.〉

〈대기해 주십시오.〉

파아앗!

시스템 창과 함께 시야를 가리던 섬광이 가셨다.

47층을 클리어한 직후, 곧바로 다음 층으로 이동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우리의 앞에 펼쳐진 것은 새하얀 방이었다.

간만에 보는 풍경에 둘리는 날개를 파닥거리며 소리쳤다.

“한별! 땅에서 하늘까지 전부 새하얗다!”

“알고 있으니까. 호들갑 떨지 마.”

나는 둘리의 뒷덜미를 붙잡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전에도 몇 번 겪어본 장소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대기실.

보통은 다음 층이 단체층이거나 혹은 선택해야 하는 관문이 있는 등등, 일이 있을 때 잠시 머무르는 용도로 쓰이는 곳이었다.

여기까지는 익숙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시스템상에서 생소한 문구를 보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변동 사항이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바짝 경계하고 있을 찰나.

포켓이 강제로 열리는가 싶더니, 하늘 위에서 종이 한 장이 펄럭거리며 두 손 위로 떨어졌다.

코팅된 종이의 표지에는 새하얀 배경에 유려한 사인만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 모습이 고급스러움을 강조하는 듯 보였다.

당연히 이 종이를 모른다고 할 생각은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닌 내가 지닌 포켓에서 나온 물건인데, 당사자가 모른다면 누가 알겠나.

나라도 알고 있어야지.

게다가 내게 있어서 이건 소중한 물건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연회의 초대장이니까.’

갑자기 웬 연회라고 생각하면 곤란했다.

때는 2개월 전으로 돌아가, 6층을 클리어한 직후 보상으로 받은 물건이었다.

평소의 나라면 연회 따윈 시시하다고 여기더라도 이 초대장은 쉬이 넘길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연회의 특별 게스트로 오는 상대가 바로….

“탑을 만든 원흉이란 말이지.”

그만한 거물이 행차하시는데, 그냥 가시게 내버려 두면 섭섭하잖아.

이로지 이날만을 위해 탑을 등반하고.

수많은 역경을 이겨냈으며, 목숨을 담보로 위험한 장소에 드나들며 성장을 거듭했었다.

드디어 놈과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초대장을 양옆으로 펼치자, 과장스러운 폭발음과 동시에 새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얼마나 많은 연무량인지 초대장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연기는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요사스럽기까지 한 분위기에 둘리는 가슴을 부둥켜안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 한별! 신기하다! 연기가 알아서 움직이고 있다!”

둘리는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눈을 빛냈다.

녀석을 뒤로한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무렵, 연기는 한데 뭉치기 시작하더니 이내 형체를 이뤄냈다.

우리들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깔끔한 연미복이 어울리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처음 보는 것 같았지만, 안면이 있었다.

저번에도 초대장을 통해 홀로그램으로 설명을 건넨 안내인이었다.

이번에도 홀로그램인가 싶어 손을 앞으로 뻗으려는데,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내 손을 쳐냈다.

“흠흠, 가능한 불필요한 접촉은 삼가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홀로그램이 아닌 모양인지 실체가 느껴졌다. 그리고 약간의 불쾌함도 같이 찾아왔다.

다른 플레이어였다면 성급하게 흥분했을지도 모르리라.

하지만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팔을 내려다봤다.

‘확실히 진행자보다는 강한가.’

아주 잠깐의 충돌이었지만, 상대의 기량을 탐색하기에는 충분했다.

그 증거로 내쳐진 부위에는 얼얼한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무안한 기색을 감추곤 손을 탈탈 털었다.

“깐깐하게 굴긴. 저번에는 영상으로 대신하더니 웬일이래. 심경의 변화라도 들었나 봐?”

“탑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은 분들은 전부 귀한 손님, 정중한 태도로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 정중이라는 단어와는 완전히 딴판 같은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정중이라는 의미가 바뀌었나 보지?”

“제 태도에 불편을 느끼셨으면 먼저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뭐, 그렇다면야.”

일부로 비아냥거렸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는다는 양 고개를 숙였다.

좀 더 뻔뻔한 태도로 나올 줄 알았건만 생각지도 못한 저자세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고개를 숙이는데, 따로 트러블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적당히 상황이 정리되자 남자는 손을 앞으로 뻗으며 질문을 던졌다.

“우선 확인 절차를 위해 물어보겠습니다만 신한별 플레이어, 당신은 지상 최대의 연회에 참여하겠습니까?”

“물론이지. 바라던 바야.”

남자의 질문에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탑의 제작자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튜토리얼에서 나온 직후부터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당연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그의 물음에 나는 초대장을 건네며 대답했다.

남자는 초대장의 겉표지를 스윽 훑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인 절차를 마쳤습니다.”

그는 그대로 초대장을 찢었다.

난데없는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찢어진 초대장으로부터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리고는 허공에 시꺼먼 문이 떨어졌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단조로운 철문같이 보였지만, 그 너머로부터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만이 유일하게 현실감을 일으켰다.

남자는 문의 손잡이를 돌리며 입을 뗐다.

“그럼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탑이 이 땅에 세워진 이래로 가장 창대한 연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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