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화르르, 47층에 도착하자마자 시뻘건 화마가 들이닥쳤다.
상하좌우 어딜 살펴보든 간에 뜨거운 열기와 화염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화염 속에서는 사람들의 비명과 절규가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고통 중 가장 고통스럽다고 여겨지는 분신(焚身). 생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은 비할 바가 못 된다.
게다가 기관지로 메케한 연기가 들어가며 숨을 쉬는 것마저 버거워졌다.
의식이 흐릿해져 갈 때쯤, 때마침 백룡 시리즈의 효과가 작용하며 한결 나아졌다.
‘어떻게 된 거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의아하기도 잠시, 불길로 일어난 아지랑이의 너머로부터 하늘 높이 익숙한 형체가 눈에 드리웠다.
“저건……?”
언젠가 본 것 같은 익숙한 풍경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서 있는 장소가 바로 마탑의 입구라는 것을.
단순히 풍경을 보고선 마탑을 연상하기는 힘들었지만, 공기 중에서 상당한 마나가 느껴졌다.
만일 확인해보지 않았다면 모르고 넘어갔을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마탑의 잔재는 남아있지 않았다.
이곳이 마탑이라는 것을 깨닫고 보니, 주변에서 마법사들이 불을 끄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법사들은 각종 빙결이나 물과 관련된 마법을 연사했지만, 이미 커질 대로 커져 버린 불길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고의 장소라 불리는 마탑에서 이만한 대화재가 일어나기는 쉽지 않다.
분명 원인이 있을 터.
‘도대체 뭐지?’
나는 시스템창을 바라보며 불안감을 느꼈다.
〈시나리오: 멸국의 마녀가 시작됩니다.〉
단순한 문구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이 세계관에서 마녀라고 불리는 존재는 한정되어 있었다.
그중 유명한 사람이라면 치치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설마 치치가?”
나는 의아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된 원흉이 치치라고 해도 마탑에서 파문을 한 것도 아니고, 단지 마탑의 지식이 유출될 것을 대비해 암살을 시도한 것도 아닌데 원한이 있을 리는….
아, 생각해보니 전부 했구나.
다시 생각해보니 치치가 마탑을 무너뜨릴 명분은 차고 넘쳤다.
오히려 지금까지 꾹 참고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
그렇다곤 해도 아직 확정된 사항은 아니다.
“일단 사태를 정리해야겠지.”
상황으로 보건대 이대로 둔다면 화재는 며칠간 꺼지지 않고 도시를 불태울 것이다.
이대로 둘 순 없었다.
“둘리야!”
“알고 있다! 둘리한테만 맡겨라!”
내 부름에 둘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팔뚝을 걷어 올렸다.
하긴 저번 층에서도 정체를 숨기기 위해 내내 품속에 숨어만 있었으니 몸이 근질거릴 만도 했다.
성체로 현현한 둘리가 손을 들어 올리자,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폭우가 쏟아졌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일반적인 마법으로는 마탑 전체를 불태우는 화염을 해결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환경 자체를 바꾸어 버리면 될 일이었다.
“괜찮은데. 이대로면 몇 시간 안으로 꺼지겠어.”
“헤헤, 둘리한테 걸리면 별일도 아니다!”
내 칭찬에 둘리는 부끄럽다는 듯이 몸을 꼬았다.
뭐, 급한 일도 해결했겠다.
주변을 둘러보자 경외로 가득한 눈으로 둘리를 우러러보는 마법사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럴 만도 했다.
탑에서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어딜 가든 신, 그 이상의 존재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하물며 일평생을 마법에 종사하는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드래곤의 존재는 한마디로 일컫기 힘든 존재였다.
게다가 누구도 손을 못 쓰던 마탑의 대화재마저 손쉽게 해결해버렸으니 경외할 만했다.
간만에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서서 그러지, 둘리는 콧방귀를 뀌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 같아선 좀 더 즐기게 두고 싶었으나 시간이 급했기에 둘리에게 속삭였다.
“뭐해. 똥폼 잡지 말고 빨리 움직이자고.”
“버, 벌써 가는 건가? 깔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미리 확인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재촉하자 녀석은 아쉽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그 마음은 안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치켜올렸으면 좋겠고, 조금 더 인정받고 싶은 마음가짐. 하물며 둘리는 아직 해츨링이니 더욱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거야 마법사들에게 맡겨두면 알아서 하겠지.”
“그, 그런가.”
둘리는 내 발언에 시무룩한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잠시, 녀석은 기운을 찾으며 되물었다.
“그래서 한별, 찾는다고 했던 그 사람은 어떻게 찾을 건가?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글쎄… 천천히 방법이라도 강구해서 찾아보든지…….”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도 그럴 게.
화염에 휩싸여 몰락한 마탑의 꼭대기에서부터 익숙한 인영이 눈에 비쳤다.
‘저건…?’
곧바로 시력을 집중해 상대의 정체를 살폈다.
비록 온몸을 뒤덮는 로브를 뒤집어쓴 탓에 상대의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익숙한 마력의 파장이 느껴졌다.
그 덕에 상대의 정체를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치치?”
고민은 짧았다.
지면을 박차고 달려 나서자, 뒤늦게 둘리가 뒤따라왔다.
방금 전의 혼잣말을 들은 모양인지 둘리는 질문을 연신 던졌다.
“한별 찾은 건가?”
“아마도? 그런 거 같은데.”
치치를 발견했다고 해도 아직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없었다.
마탑을 붕괴시킨 원흉이 치치라는 증거가 없는 이상, 모든 가능성을 가정해두고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상대와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져 갔다.
이윽고 로브를 입은 상대의 앞에 다가가고 나서야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상대가 치치라는 것을.
그렇지만 묘한 일이었다. 마치 치치는 내가 이곳에 도착할 줄 알고 기다리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기에.
이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47층에 도착한 것도 바로 직전이다.
내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 줄 모르는데 어떻게 기다리고 있었을까.
의아스러운 부분이 여럿 있었지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누군가 싶었는데 치치, 너였나.”
“오래간만이에요. 거의 일 년만이네요.”
1년이라고?
갑작스러운 치치의 발언에 나는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고 눈치를 살폈다. 47층에 도착한 바로 직후라 날짜를 살펴볼 여유는 없었다.
어쩌면 이쪽을 떠보려는 심산일지도 모른다.
혹시 몰라 치치의 안색을 살펴봤지만, 수상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적당히 화젯거리를 돌리기로 했다.
“오래간만이네. 샘물에 같이 갔었을 때 이후로는 처음인가?”
“네, 그렇네요. 그때는 큰 도움을 받았어요. 진심으로 감사해요.”
치치는 가슴께를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묵묵히 그녀를 지켜봤다.
곧바로 본론이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틀어 맞았다.
“보아하니 궁금하신 모양이죠? 마탑을 불구덩이로 만든 원흉이 누군지에 관해서?”
“눈치가 빠른데.”
“후훗, 별 대단한 건 아니에요.”
치치는 폭삭 주저앉은 마탑의 터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녀석의 몸에서는 재의 잔향이 남아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심상치 않은 직감이 들었다.
그녀는 잿더미가 된 마탑을 향해 양 손을 활짝 펼치며 대답했다.
“제가 그 원흉이거든요. 마탑을 불쏘시개로 만든 사람을 찾고 있었다면 잘 찾아오셨어요.”
내 직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 * *
치치의 대답에 나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마탑 방화 사건의 원흉이 알고 보니 치치였다니.
불과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일어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막상 상황이 닥쳐 생각해보니 내가 한 선택에 회의감이 들었다.
46층이 끝나기 직전, 카르텔은 내게 두 가지의 선택지를 줬었다.
치치의 기억을 지우겠느냐, 혹은 그대로 내버려 두겠는가.
그 당시, 선택지를 앞두고 나는 치치의 기억을 그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었다.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내가 내린 선택의 결말은 무너져 내리는 마탑이었다.
“보아하니 놀라신 모양이네요.”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겼길래. 이런 선택을 내린 거지.”
“별거 아니에요. 다만 삶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거든요.”
“회의감?”
“네, 1년 전 진행자라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곰곰이 생각했거든요. 사상과 꿈이 전부 만들어진 것이라면 모두가 저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걸 참을 필요가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일을 벌였다 이건가?”
나는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되물었다.
“맞아요. 당신은 제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
치치의 물음에 나는 입을 닫고는 생각에 빠졌다.
만약 지금의 행동에 대해서 잘못되었냐고 물어본다면 객관적인 시점에서는 잘못된 행동이다.
그녀의 행동으로 인해 수많은 피해가 일어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까.
하나 나로서는 그 행동을 잘못되었다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글쎄.”
“그 뜻은 뭔가요?”
오묘한 대답에 치치는 의외라는 듯한 말투로 되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나는 별거 아니라는 양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그야 좆 같은 놈들을 좆 같아서 때려 팬 게 뭐가 잘못인데.”
“…….”
단순명쾌한 내 대답에 치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야 그렇잖아. 그리고 이번 일은 일방적인 일도 아니잖아.”
자고로 박수도 서로 맞붙이여야 소리가 나기 마련인데, 마탑의 놈들은 엄연히 선을 넘었다.
놈들을 살수를 부려 치치를 암살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걸 직접 겪고도 가만히 참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보라고 해라.
“내가 꼴리는대로 살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
물론 이를 두고 궤변이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궤변이라면 궤변이었다.
이건 죽음에 대한 자기합리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발상이니까.
하나, 한 가지만큼은 알아둬야만 했다.
“근데 뭐 어쩌라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다면 당연히 그 반대도 당연한 게 아닌가.”
나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