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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66화 (166/175)

제166화

투욱!

묵직한 둔탁음과 함께 진행자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방금 전과 같이 실은 연기로 만든 분신이고, 본체는 다른 곳에서 기습을 노리고 있지 않을까 싶어 집중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결정적으로 각각 분리된 머리와 몸통은 소멸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나는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벤 것은 실체라는 것을.

‘분명히 베는 손맛도 있었으니까.’

검을 쥔 손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하고 손에 남은 감각을 다시 떠올리며 확신했다.

이번에야말로 놈을 베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머리를 발로 툭 건드리자, 잠깐이지만 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혹시나 사후경직과 같은 신체 반응이 아닐까 싶었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에구구, 이미 죽은 고인을 그런 식으로 막 대해도 된답니까? 서운하네요.]

놀랍게도 대가리뿐인 놈의 입은 멀쩡히 움직였다.

그걸로도 모자라 놈은 실실 웃으며 이쪽을 직시하고 있었다.

경악스러운 광경에 나는 검을 치켜세우며 경계심을 바짝 끌어올렸다.

슬쩍 시선을 돌려 놈의 몸통 부분을 확인했는데, 다행히도 몸은 완전히 죽은 모양인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 경계하진 마시죠. 분리된 이상, 어차피 쓰잘데기도 없는 몸뚱이에요. 기습이 가능했다면 진즉에 하고도 남았죠.]

해탈하기라도 한 모양인지 진행자는 후련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정말로 얼굴밖에 안 남아 있어서 관찰할 만한 게 놈의 표정밖에 없지만 그건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놈의 기색을 살폈지만, 딱히 거짓을 말하는 듯한 느낌은 없었다.

이마저도 일종의 블러핑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억지였다.

‘확실히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찌르면 될 일을, 이렇게 질질 끌 이유도 없으려나.’

그래도 머리뿐인 놈과 대화하는 것도 꺼림칙했기에 나는 놈의 얼굴을 반 바퀴 굴렸다.

얼굴 부위가 차가운 흙바닥에 맞닿자 진행자는 기침을 내뱉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퉷퉷, 뭐하십니까. 입과 눈에 모래가 들어가지 않습니까.]

“알고 있어. 그래서 일부로 한 거야.”

머리가 잘려도 살아 있는 듀라한의 사정 따위 알 게 뭐야.

어쨌거나 이제야 대화하기 한결 편해졌다.

안 그래도 진행자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자니, 체할 것 같은 기분이거든.

“긴말은 안 하지. 넌 나한테 졌고, 그리고 난 너한테 이겼어. 그뿐인 이야기야.”

[뭐, 그래서 반항 따윈 아서라 그런 뜻인가요.]

“그건 당연한 거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놈이 어디서 반항 타령이야 뒈지려고. 아, 그러고 자시고도 할 것 없이 이미 산송장 상태였던가”

[…….]

농담을 던지며 낄낄거리며 웃자, 진행자는 침묵을 고수했다.

내 비아냥에 단순히 할 말이 없어 침묵하는 걸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냥 입에 모래가 들어가서 아무런 대답도 못 하는 걸지도 모르고, 하나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다.

놈에게 볼일은 단 하나…. 아니다. 두 개면 끝날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까 전에 대화를 나눌 때부터 내내 걸리던 건데, 하나 정정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무엇인가요?]

관심이 동한 모양인지 진행자는 의문을 던졌다.

놈의 질문에 나는 시선을 돌려 치치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진행자와의 격돌로 인해 치치는 둘리의 품에 안겨 기절한 상태였다.

“치치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무시당하면서 샘물을 찾으러 다닌 게 단순히 로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지.”

[아아, 뭔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물론입니다. 그녀는 탑이 설계한 이레귤러, 로망으로 설명되지 않는 건 당연한 게 아니겠습니까?]

비록 엎어진 탓에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가소롭다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따지고 보면 안 될 건 없지.”

[예?]

“아무래도 오해라도 한 모양인데, 정정할 건 정정하고 넘어가야지. 탑에 들어온 플레이어는 뭐라고 생각해?”

[플레이어라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

뜬금없는 이야기에 진행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말투.

나는 피식 웃으며 입술을 뗐다.

“넌 잘 모르나 본데, 플레이어야말로 로망의 집합체야. 플레이어가 위험천만한 탑을 등반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야 탑을 등반하면 얻을 수 있는 명예와 명성, 그리고 수많은 금전까지. 뻔한 이유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걸 탑이 보장한 적이 있던가?”

[…….]

내 물음에 진행자는 입을 다물었다.

명예, 명성, 그리고 억만장자 부럽지 않은 금전까지 사람의 의욕을 끌어당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요소였다.

하지만 탑이 전면으로 나서서 보장해준 적이 있냐고 하면 글쎄?

“솔직히 말해 탑의 최상층에 올랐는데,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잖아.”

수많은 노력과 희생을 바쳐서 최상층에 도착했는데, 뒤통수를 때리는 클리셰야 흔한 일이다.

구전으로 하는 약속 따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짝과 마찬가지였다.

언제, 어디서, 누가 뒤통수를 때릴지 모른다.

탑을 등반한다면 한 번쯤은 가정할 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들은 목숨을 걸면서 등반한다.

“탑을 등반하는 플레이어들의 의의가 로망인데, 그걸 부정하는 것 자체가 탑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않나.”

[…시답잖은 궤변이나 늘어놓긴요.]

“글쎄, 그게 궤변인지 아닌진 네가 더 잘 텐데.”

진행자는 의중을 알 수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한낱 NPC뿐인데, 꽤나 다정해 보이십니다.]

“그 NPC가 한낱 진행자보다 나은진 내가 판단할 일이지.”

나는 놈의 뒤통수에 검을 가져다 댔다.

차가운 비수가 놈의 머리에 스치자 시꺼먼 피가 흘렀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머리통을 꿰뚫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몸통에서 머리가 떨어져도 멀쩡한 놈인데, 비수가 놈의 머리를 꿰뚫는다고 달라질 일은 없으리라.

놈을 처리할 방법을 생각하던 찰나였다.

진행자는 사뭇 달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서 신한별 당신은?]

“그래서라니?”

[신한별 플레이어, 당신은 어떤 로망을 안고서 탑에 들어오셨습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과거를 회상하려 했다가 관두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과거를 회상하기에는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다. 과거를 회상했다간 끝도 한도 없을 것 같았다.

대신에 나는 능청맞은 웃음기를 지으며 놈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아귀에서 뿜어져 나온 수십 다발의 촉수가 놈의 머리를 휘감았다.

〈[이터]의 권능으로 흡수하겠습니까?〉

이터의 권능을 발동시키자 보랏빛의 아지랑이가 일렁이며 힘을 발했다.

“로망이라…. 그건 뒈지고 나면 탑을 관장하는 그 빌어먹을 놈한테 직접 물어봐. 곧 그쪽으로 보낼 테니까.”

그 대답을 끝으로 진행자의 몸은 내 손아귀 속으로 들어왔다.

권능이 갈무리됨과 동시에 상당한 스탯이 몸에 깃들었다.

일반적인 적과 드래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스탯.

구태여 확인은 하지 않았지만, 레벨업에 필요한 경험치도 많이 쌓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레벨업을 해봤자 4레벨밖에 안 되겠지만.’

나는 상념을 지운 뒤, 몸을 돌렸다.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성신 카르텔이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성신인데, 도와줄 법도 하지 않나.”

“그리고 당신이라면 맞서 싸워 이길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요.”

“성신이라서 그런지 대단한 믿음인데.”

비아냥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탄이었다.

성신에게는 상대의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카르텔은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손바닥을 탈탈 털며 카르텔에게 다가갔다.

“그나저나 넌 괜찮겠어? 아무래도 이곳은 놈들에게 발각된 모양인데.”

“괜찮아요. 어차피 이곳에 서 있는 건 제 분신. 놈들에게 당한다고 해서 본체 쪽에 데미지가 갈 일은 없어요. 물론 거점 중 한 곳을 잃는다는 건 좀 아쉽지만요.”

“그런 것치곤 아쉬운 기색은 아닌데?”

“그야, 탑을 무너뜨릴 수 있는 영웅이 옆에 있잖아요. 오히려 든든하죠. 일당백 같은 기분이랄까요.”

카르텔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목소리에서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저분의 기억은 지우는 편이 좋을까요.”

그녀는 치치를 향해 손짓하며 되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기억을 지울 수 있다고?”

“물론이죠. 제가 지닌 권능을 사용하면 기억을 지우거나 왜곡할 수 있어요. 가령 이곳에 와서 겪은 일들을 말이죠.”

확실히 이곳에 와서 겪은 일은 치치에게 있어 가혹한 현실이었다.

평생을 몰두해 기껏 찾은 장소에서 일생 자체를 부정당한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대로 기억을 지우는 편이 치치를 위한 일일지도 모르리라.

기억을 지우느냐 혹은 현실을 알고 있도록 내버려 두느냐, 두 가지의 선택지가 눈앞에 생겼다.

그러던 도중, 문득 내 선택으로 인해 분기점이 형성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46층이 해결되리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내 선택으로 인해 엄청난 파장이 생길 것이다.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NPC가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일 테니까.

‘내가 선택하는 게 맞을까?’

내 기억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선택은 결국 치치의 인생에 간섭하는 꼴밖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을 내리고 입을 떼려는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결심이 흔들렸다.

과연 이 선택이 맞을까, 그리고 미래에 가서 후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엄습했다.

그렇지만 이 이상의 활로는 없다는 생각에 나는 결정을 내렸다.

“치치의 기억은 그대로 내버려 두겠어. 이건 녀석이 결정할 일이니까.”

“알겠어요. 저는 그 선택을 존중하겠어요.”

내 결정과 동시에 카르텔의 몸이 점점 흐릿해졌다.

탑에 머무를 수 있는 한계 시간이 지난 탓이었다.

카르텔은 손을 흔들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46층이 클리어되었습니다. 당신의 선택으로 인해 분기점이 형성됩니다.〉

〈따라서 47층이 히든 스테이지로 변경됩니다.〉

46층을 클리어했다는 시스템창과 함께 강렬한 섬광이 눈 앞을 가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빛이 가시고.

내 선택 앞에 펼쳐진 것은 새빨간 불바다가 된 마탑이었다.

〈시나리오: 멸국의 마녀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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