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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65화 (165/175)

제165화

콰득!

주먹이 진행자의 뒤통수를 타격한 순간.

놈의 머리는 풍선처럼 터지며 피와 내장이 사방으로 퍼졌다.

곁으로만 보면 일격에 뒈진 것 같지만 틀렸다.

나는 손등에 묻은 피를 떨쳐내며 혀를 내둘렀다.

“쯧, 안 통했나.”

뻔히 보이는 속임수나 쓰긴.

내 주먹이 놈의 머리를 강타하던 찰나, 마치 슬라임처럼 주먹이 쑤욱 들어가는가 싶더니 아무런 타격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놈은 살아있다.

기감을 넓힘과 동시에 나는 창을 꺼내 덩굴을 향해 투창했다.

파공음과 함께 공기를 찢어발기고 빠르게 쇄도한 창은 덩굴을 끊고는 자욱한 연기를 일으켰다.

창은 시커먼 그림자에 박혀 있었는데, 검은 연기가 몽실몽실 일어나더니 진행자의 모습으로 현현했다.

[정말 오래간만에 뵀다고 생각했는데 성급한 것은 여전하시네요. 인사 정돈 나눌 시간을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진행자는 곰방대에 불을 붙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곰방대의 끝에서부터 연기가 일렁이며 상공으로 솟아올랐다.

반면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불쾌한 티를 냈다.

“이번에는 무슨 수작질을 부리려고 여기에 온 거야? 내 경고 잊은 건 아니겠지?”

[이러면 너무 섭섭한데요. 그래도 저희가 함께 한 시간이 얼마인데요. 게다가 신한별 당신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팬심으로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씨부리면 될 거 같지.”

[하하, 농담도 험하시긴.]

놈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잠시, 녀석은 내게서 눈을 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신한별, 당신께도 볼 일이 있지만 그건 제 관할이 아니니 이번은 그냥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관할이 아니라고? 그건 무슨 뜻이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음을 던지자, 진행자는 알려줄 생각이 없다는 듯 짙은 웃음기를 띠며 몸을 돌렸다.

진행자는 샘물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더니, 제자리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곤 카르텔을 응시했다.

[사실 이번에 볼일이 있는 건 신한별 플레이어분이 아니라 여기에 계시는 기생충…. 아니, 성신 한 명 때문에 볼일이 있어서 왔거든요.]

진행자는 의도적으로 말을 멈추고는 정정했다.

누가 봐도 뻔히 보이는 도발이었지만, 카르텔은 아무런 안색의 변화도 없었다.

그 모습에 진행자 시시하다는 듯 혀를 차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신 때문에 얼마나 찾아 나선 줄 아십니까. 덕분에 시간을 쪼개고 쓸모없는 인력까지 낭비했잖아요. 순순히 모습을 드러내면 좋았을 텐데, 이런 장소에 둥지를 틀고 있었을 줄이야.]

“그래서 절 찾으려고 이런 짓까지 벌이셨다고요?”

카르텔은 검은 구체를 손에 쥐고는 두 눈을 부라렸다.

마치 살얼음이 우수수 돋아날 것 같은 분위기에 치치는 몸을 떨었다.

[그래요. 저희 진행자로서는 당신이 꼭꼭 숨겨둔 성소의 위치를 찾을 수 없었거든요. 그리고 저희들도 업무가 있는지라 시간을 쪼갤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진행자는 치치를 훑어보며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

[어쩌겠습니까. 그렇다면 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릴 수밖에…. 탑의 주민을 이용하면 될 일.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이레귤러를 만들자고.]

“이레귤러?”

놈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진 몰라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하게 정중했다.

[네, 맞아요. 태어날 때부터 샘물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도록 설계했어요. 솔직히 시답잖은 헛수고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정정하도록 하죠. 당신은 결과로서 증명했어요. 당신은 훌륭한 이레귤러입니다! 모든 이의 귀감이 되기에는 충분하죠.]

진행자는 과장스럽게 양팔을 펼치며 외쳤다.

그 모습에 반해 치치는 텅 빈 동공으로 손을 덜덜 떨었다.

“아, 아니에요! 저는 제 의지로… 그리고 로망을 찾기 위해서 샘물을 찾으려고 했을 뿐이에요!”

[아아, 시답잖긴. 그것마저 그렇게 믿도록 ‘설계’된 겁니다. 그게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손찌검을 당하면서까지 포기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그게 단순히 로망이라고 설명한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이야기겠나요.]

이야기에 종점을 찍는 진행자의 발언에 치치는 털썩 주저앉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얼굴.

그럴 만도 했다.

진행자의 한마디에 지금까지 그녀가 쌓아 올린 모든 게 부정당하고 무너진 기분일 테니까.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숨을 죽이는 사이, 진행자는 카르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게 됐으니 당신은 이 구역에서 철수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건 규율 위반이라고요. 막무가내로 행동해도 되는 겁니까? 그러니 당장….]

진행자의 손끝에서 막대한 권능과 동시에 시꺼먼 어둠이 뿜어져 나왔지만, 그보다도 먼저 놈의 팔뚝이 바닥에 떨어졌다.

깔끔한 절단부와 동시에 몸통에서 떨어져 나간 팔은 차가운 바닥을 내뒹굴렀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상황에 진행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들자, 핏줄이 붉으락푸르락 튀어나온 진행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인상 펴. 그러다가 주름 생긴다.”

[무슨 짓이시죠?]

가볍게 농담을 던지자, 놈은 악귀 같은 얼굴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분명히 경고했잖아 오늘이 네 제삿날이라고. 나랑 이야기하는 도중에 어디서 딴청이야.”

뒈지려고.

내가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서자, 진행자는 의도를 알 수 없다는 듯 입에 머금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래서 무얼 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설마 플레이어가 진행자를 이길 수 있다는 건방진 생각이라도 하시는 건가요?]

“너, 전대 진행자 알지?”

[누굴….]

“그 있잖아. 나한테 털털 털려서 너희들한테 압송당한 병신 새끼.”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시는 거죠?]

놈은 인상을 찌푸리며 곰방대를 쥐었다.

곰방대를 쥔 놈의 손은 미세하게나마 부들대고 있었다.

그렇겠지.

나한테 털린 전대 진행자는 놈들 사이에서도 불명예스러운 이름일 테니까.

듣자 하니 플레이어한테 처음으로 당한 진행자라나 뭐라나, 꼴 좋은 일이다.

“아아, 별건 아냐. 단지…. 그놈도 너처럼 나대다가 나한테 탈탈 털렸었다고.”

그저 그뿐인 이야기다.

그리고 그저 그뿐인 결말이고.

그 말을 끝으로 지면을 즈려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한 찰나에 벌어진 일에 진행자는 가까스레 곰방대를 뻗었다.

내 검과 놈의 곰방대가 맞부딪치며 강렬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거목이 뽑히고, 지면이 파헤쳐질 만한 격돌.

명색이 성신인 카르텔은 멀쩡했지만, 강풍에 의해 몸을 이리저리 맞부딪힌 치치는 기절하고 쓰러졌다.

때마침 나타난 둘리가 치치의 몸을 끌어안았다.

“한별!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할 일 해라!”

둘리의 배려에 나는 맘 편히 앞으로 나아갔다.

확실히 다른 진행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한 강함이었다.

이렇게 맞서는 것만으로도 절로 손이 떨릴 정도였으니까.

만약 일전의 내가 놈을 상대했었다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을지도 모르리라.

하나 탑을 등반하면서 여러 경험을 하고 강해졌다.

로드급 드래곤과 강함을 비교한다면 글쎄.

‘영, 감이 안 잡히는데.’

어중간한 약자면 몰라도 일정 이상의 강함을 지닌 강자 정도 되면 강함을 예측하기 힘들어지는 법이다.

그도 그럴 게.

강해지면 질수록 보통은 한 분야에 깊이 파고들어 그 방면으로 강해지기 마련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나 같은 경우에는 무력.

유채아의 경우에는 기교와 기술.

골리엇의 경우에는 특수능력.

이렇듯 서로 간에 상성이 존재하기에 섣불리 강함을 일축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단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넌 처리할 수 있어.”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과연 그게 자만감일지 아니면 자신감일지는 모르겠지만요.]

검을 내찌르자, 진행자의 신체가 연기로 변하면서 비켜나갔다.

한순간 생긴 틈을 타 진행자는 곰방대를 휘둘렀다.

언뜻 보면 가벼운 공격인 것처럼 보여도 일격 속에는 무궁한 변화와 더불어 각종 살초가 뒤섞여 있었다.

맞았다간 죽을지도 모른다!

재빠른 판단 끝에 나는 옆으로 몸을 날렸다.

놈의 곰방대는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를 타격했다.

콰아앙!

곁으로 보면 아주 가벼운 일격이었지만, 놈의 곰방대가 지면을 강타하자 흙이 용솟음쳤다.

마치 만화 영화 속에서 등장할 법한 연출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다고 해서 의지가 꺾일 일은 없었다.

이만한 위기야 일상과도 같았다.

놈의 몸에서부터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 연기는 일대를 가득 채울 정도로 확산하였다.

나는 검으로 연기를 휘적거리며 비아냥거렸다.

“매번 담배만 피우더니, 할 줄 아는 게 연기를 내뿜는 것밖에 못 하나 봐?”

[당신께 충고를 들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보다도 그게 뭔지 알고 그렇게 들이쉬나요. 너무 위기감이 없으신 거 아니에요?]

“위기감을 느낄만한 상대가 아니라서.”

어깨를 으쓱거리며 도발했지만, 진행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나를 바라봤다.

항상 느끼는 바지만 짜증 나는 웃음이었다.

[분명 충고했습니다.]

진행자는 씨익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곰방대에 불이 붙는가 싶더니, 이내 스파크가 일어났다.

주변을 자욱하게 퍼진 연기에 스파크가 만나자, 푸른 뇌전과 함께 새빨간 폭발이 연기의 흐름을 타고 작렬했다.

‘설마 연기를 들이쉰다는 게 그런 이야기였나.’

쯧, 하여간 교활한 놈이다.

이대로면 폐로 들어온 연기가 폭발하게 될 터.

결심은 짧았다.

투명 팔찌를 발동하는 것으로 체내부터 폭발하는 것은 회피했다.

하나 아티팩트의 효과는 단 3.5초.

이대로 아티팩트의 효과가 풀린다고 해도 바깥에는 잇따른 폭발로 인해 여전히 불바다다.

위험으로 가득했지만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아티팩트의 효과를 해제했다.

화마가 치솟으며 상당한 열기가 온몸에 침투해 들었다.

그나마 백룡 시리즈의 효과로 열기가 차단해준다고는 하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갑옷의 틈으로 들어오는 열기는 막을 수 없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면을 향해 뛰쳐나갔다.

여기에서 멈춰 서면 죽도 밥도 안 된다.

타앗!

나는 화마를 뚫고 하늘을 향해 도약했다.

‘쓰읍, 더워 뒈지겠네.’

그렇지만 내 발걸음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새빨간 화마를 검으로 베어낸 끝에, 저 너머로 의기양양한 진행자의 얼굴이 드리웠다.

이걸로 나를 처리했으리라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렇게 확신했다면 곤란하지.

나는 놈의 머리를 힘차게 베어내며 외쳤다.

“마신인가 뭔가 하는 놈한테 가서 전해. 곧 갈 테니까. 그전까지 목 잘 닦으라고.”

이번에는 허상이 아닌 실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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