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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64화 (164/175)

제164화

〈생존하십시오. 남은 시간: 5시간 02분〉

이쪽을 습격한 암살자와 치치가 가진 정보를 종합한 덕분에 샘물의 후보는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후보로 꼽힌 장소는 서로 붙었던 덕에 괜한 수고도 줄였다.

이번 층을 클리어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5시간 남짓.

만약에 후보군이 많았거나 거리가 있었다면 곤란했을 텐데, 잘된 일이었다.

“으헤헤, 조금만 더 있으면 샘물을 찾을 수 있겠는데요.”

치치는 들뜬 가슴을 안고는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에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말이야. 궁금한 게 있는데, 너는 왜 샘물을 찾으려고 하는 거야.”

나야 탑을 등반하면서 샘물을 발견하고 카르텔 본인까지 만났다 하지만, 46층 NPC에게 샘물은 전설로 여겨지고 있었다.

존재할지 없을지도 모르는 전설.

대다수 사람은 우스갯소리로 여겼으나 치치만큼은 진지하게 여기고 직접 행동으로 증명하려 했다.

분명 그렇게 된 계기도 존재할 터.

가볍게 던진 의문에 치치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입을 뗐다.

“그게 로망이잖아요. 로망이기에 비로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게 아니겠어요.”

치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내 의문을 해소하기에는 논리가 부족한 대답이었다. 하나 모순적이게도 그것만으로도 답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인간인 한, 논리보다도 먼저 몸이 움직이는 건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로망이라.’

탑을 등반하는 플레이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황금향이라는 불리는 곳에서 금전을 거머쥐기 위해, 누군가는 명예와 이름을 떨치기 위하여.

소수의 사람들 중에서는 현실에서 도피해 쾌락을 즐기기 위해.

탑은 탑에 들어오려는 강한 열망과 그에 걸맞은 이유가 존재하는 자들만 뽑아서 플레이어로 삼는다.

그리고 아무도 오르지 못한 탑의 최상층을 등반하기 위해서 등반한다.

누군가 보면 허상을 쫓는다고 여길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들은 도전정신을 잃지 않았다.

로망이라는 단어는 그들의 심장을 활활 태우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에.

‘그러고 보니 내가 탑에 들어온 이유는 뭐였더라.’

탑에 들어온 직후에는 나를 튜토리얼 속에 가둔 흑막의 낯짝을 보기 위해 악착같이 등반했다고 쳐도, 분명 지구에 있을 적에는 탑에 들어오려고 한 계기가 있었을 터.

음…. 떠올리려고 했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렴 중요한 일도 아닌데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탑에 들어오기 전이라고 해도 튜토리얼의 겪은 나한테는 천 년 전의 과거다.

당장 어제 먹은 저녁도 까먹는 마당에 천 년 전의 다짐 따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혼자 상념에 빠져 있을 때쯤, 우리는 덩굴로 우거진 장소에 도착했다.

“으음…. 지도에서 가리키는 방향을 보면 여기네요.”

치치가 턱짓한 장소를 바라보자, 그곳에는 덩굴과 나무뿌리가 얽히고 얽힌 벽이 있었다.

얼핏 봐서는 샘물로 향하는 입구라고는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손으로 덩굴벽을 툭툭 건들자 초록색 액체가 손가락에 묻어나왔다.

‘마비독인가.’

어지간한 실력자라도 한 방에 고꾸라질 만한 치사량이었다.

물론 각종 독에 대한 내성을 지닌 나한테는 별일 아니지만.

또, 그것과는 별개로 덩굴로 만들어진 벽에는 각종 가호가 걸려 있는 모양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덩쿨을 관찰하던 치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거… 불로 태워도 소용없겠는데요.”

“이런 숲속에서 불을 쓰겠다고? 자살 희망이라면 혼자 알아봤으면 하는데.”

진짜 미친놈인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치치를 바라보자, 뒤늦게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손을 가로저으며 얼버무렸다.

“그, 그런 방법도 있다는 거죠. 큼큼…. 뭐 아무튼 이걸 돌파하면 될 거 같은데….”

치치는 말을 흘리며 곁눈질로 이쪽을 바라봤다.

안 봐도 뻔한 의도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요컨대 손가락 빨고 구경하지 말고 일하라는 건가.

하긴 습격 때도 그렇고 트랩을 설치하는 등, 지금까지 일이 있으면 치치가 앞에 나서서 활약했다.

이 기회에 내 실력이나 마법을 봐두려는 계획인듯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진짜로 자기만 일한다는 사실 때문인지 불만인 것 같기도 했고.

뭐, 어쩔 수 없나.

팔목을 걷어 올리며 앞으로 나서자, 치치의 시선이 가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 봤자 소용없겠지만.’

마법사를 자처한 마당에 검을 빼들었다간 치치의 의심을 살지도 몰랐다.

그러니 의심을 사기 전에 서둘러 끝내버린다.

나는 허공을 향해 손날을 휘둘렀다.

피슈우웅! 서걱!

빠른 속도로 쇄도한 참격은 덩굴을 베고,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뒤에 있던 고목마저 베었다.

밑동이 베여 기우뚱하던 고목은 그래도 중심을 잃고 지면에 곤두박질쳤다.

거대한 고목이 쓰러지면서 자욱한 먼지가 풍겼다.

단 2초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지 치치는 희게 질린 얼굴로 내 얼굴과 쓰러진 고목을 번갈아 보며 살피기 시작했다.

치치의 시선에 의문을 느끼다 말고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윈드 커터.”

보통 마법사들은 뒤에 기술명을 붙이고 하던데 너무 늦진 않았겠지?

혹은 바람도 없는 곳에서 이만한 칼바람을? 하면서 놀랄지도 모른다.

머릿속으로 온갖 망상을 떠올리는 가운데, 치치는 두 눈을 빛내며 이쪽을 바라봤다.

“대, 대에박! 방금 전에 그거 어떻게 하신 거예요?! 바로 직전까지 마나의 흐름은 일절 느껴지지 않았는데…. 마나도 없이 이만한 마법이라니!”

마법사 특유의 기질이 발동했는지 치치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을 걸어왔다.

부담스럽기까지 한 리액션에 나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별거 아냐, 그보다도 문 열렸는데 확인 안 해 볼 거야?”

서둘러 화제를 돌리자, 치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수풀 속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수풀로 자욱한 숲속을 거닐고 있을 무렵, 멀리서부터 청아한 물소리와 함께 드넓은 정원이 펼쳐졌다.

그리고 정원의 한 가운데로부터 익숙한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제대로 찾아왔나 보네.’

정원을 향해 발을 내딛자, 탁한 기운을 몰아내고 신성한 기운들이 정신을 맑게 했다.

허공 위로 두둥실 떠오른 새하얀 입자가 몸에 닿자 온몸에 쌓인 피로가 거짓말 같이 사라졌다.

나야 샘물에 오는 것이 익숙하지만, 생애 처음인 치치는 눈시울을 붉히며 샘물에 다가갔다.

두 손을 가지런하게 모아, 물을 손아귀에 모으고 나서야 실감이 들었는지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저, 정… 정말로 샘물은 있었어. 히끅, 히끅…. 전설 따위가 아니었다고. 정말로 있었어!”

치치는 샘물을 끌어안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전설로 치부하던 곳을 진심으로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사람은 혀를 차며 로망을 찾아 나선 치치를 우습게 여겼을 것이다.

모두에 비해 특이하거나 특별해 동떨어진 ‘이레귤러’는 단체에서 박해당하기에 십상이니 말이다.

말을 걸까 싶었지만, 여운을 만끽할 수 있도록 가만히 두기로 했다.

그사이 나는 로자리오를 꺼내 샘물에 가까이 다가갔다.

순간 로자리오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샘물에 맞닿으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성물이 표식을 연속으로 발견함으로써 우연이 아니라 간주합니다.〉

〈성물에 성신의 권능이 깃듭니다.〉

- 전체 수집률: 81%

샘물에서 뿜어져 나온 광명은 이내, 로자리오 속으로 깃들었다.

그와 동시에 샘물 속에서부터 자욱한 연기가 일어나는가 싶더니, 새하얀 형체가 나타났다.

“신한별, 기다리고 있었어요. 감사하게도 또 찾아주셨군요.”

멀리서부터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을 정도의 신성한 연출에 나는 조소를 머금었다.

“누가 보면 산신령인 줄 알겠네.”

등장하는 포스만 보면 나와서 금도끼 줄까, 은도끼 줄까 하면서 물어볼 거 같은 비주얼이야.

쓴웃음을 머금은 채 바라보자 여신은 두 눈을 부라리며 얼굴을 붉혔다.

“지금 불경한 생각 했죠! 그거 신성 모독이라고요!”

“아, 그래?”

그녀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볼일 때문에 직접 행차하셨어? 저번처럼 물건만 주고 가도 난 괜찮을 거 같은데.”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보이며 능글맞은 미소를 짓자, 여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어요. 이번에는 드릴 게 없어요. 다만… 조금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어서요.”

카르텔은 놀란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치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상황에 치치는 딸꾹질을 했다.

“히끅…. 저, 저요?”

“그래요, 당신. 마신이 직접 이곳을 알아내라고 명령하던가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에 치치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마신이라니 그게 뭔가요?”

“하아…. 본인조차 인식을 못 하고 있었다니 더욱 골치 아프네요.”

치치의 대답에 카르텔은 눈을 감으며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카르텔의 손에서 새하얀 낚싯바늘이 생성되는가 싶더니, 치치에게 쇄도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치치는 몸을 움츠러들었다. 하나 그게 무색하게도 낚싯바늘은 치치의 팔을 관통해 가슴 속에 쑤욱 들어갔다.

카르텔이 가벼운 손짓으로 줄을 잡아당기자, 치치의 심장부로부터 새까만 구슬이 낚싯바늘에 걸려 나왔다.

“이거네요. 마신은 이 아이를 통해 위치 정보를 전달받고 있었던 거예요. 당신네가 거주하는 세계의 단어로는 GPS라고 말하면 아시려나요.”

“GPS라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는….”

“네, 맞아요. 마신도 실시간으로 알아차렸겠죠.”

사뭇 심각한 분위기에 치치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잠깐만요. 마신이니 위치니 그게 전부 무슨 이야기에요? 도통 이해할 수가 없는….”

치치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지만, 끝까지 이야기를 잇지 못했다.

그보다도 먼저 허공에서부터 강렬한 힘이 요동치며 차원이 갈라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감각에 얼굴이 창백해진 치치와는 달리, 나는 히죽 웃으며 허공을 응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며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드리웠다.

[이거야, 이거야. 한참 찾고 있던 도둑 고양이께서 여기에 계셨군요. 게다가 신한별 플레이어까지 이곳에 있을 거라곤 전혀 상상치도 못했는데요.]

섬광으로부터 나타난 것은 검은 곰방대를 든 진행자였다.

진행자가 지면에 착지함과 동시에 나는 지면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쿠구구궁! 콰앙!

가공할 만한 일격이 지면을 강타하며 거대한 크레이터가 일어났다.

일순 중심을 잃은 진행자가 허공으로 떠오르려고 했지만, 그보다도 먼저 배후에 파고든 나는 놈의 뒤통수에 주먹을 내리꽂으며 말했다.

“누누이 이야기했지. 다음에 보면 넌 뒈진다고.”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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