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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63화 (163/175)

제163화

치치와 동행한 지 벌써 이틀이 흘렀다.

우리의 목적은 샘물을 찾는 것이었지만, 결정적인 단서가 없는 지금으로선 당장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샘물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동안 치치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마법사나 상아탑, 그리고 마녀의 존재에 관해서도 말이다.

‘마녀가 압도적 재능을 가진 마법사들의 멸칭일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치치는 동 나이대의 마법사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겪다 못해 각종 가스라이팅을 당해 제 발로 상아탑을 걷어차고 나왔다고 했다.

그로 인해 상아탑의 마법사들에게 배신자라고 낙인찍힌 탓에 쫓기는 중이라고 했다.

“고작 상아탑을 나왔다는 이유 하나로 그렇다고?”

“고작이 아니에요. 마법사란 지식을 탐구하고 탐닉하는 자들. 저로 인해 상아탑의 지식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는 걸 걱정한 탓이겠죠.”

내 물음에 치치는 피식 웃으며 쥐고 있던 고기를 물어뜯었다.

진지해질 법한 이야기였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모습에 나도 가볍게 웃으며 고기를 한 입 크게 베었다. 육즙이 새어 나오며 감칠맛이 입맛을 자극했다.

뭐, 본인이 직접 상관없다는데 신경 쓸 필요는 없으려나.

그렇게 넘기려는데 치치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이쪽을 훑어봤다.

“그런데 보통 이 정도는 상식이지 않나요?”

어? 그런 거였어?

당연하지만 나야 그 사실에 대해 알 턱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한순간 뜨끔 했지만, 곁으로 내색하지 않으며 미리 준비해둔 변명을 꺼냈다.

“지금까지 시골에서 마법을 배웠거든. 그래서 세상 물정에는 좀 어두워서 말이지.”

“흐음…. 그래요? 뭐 그렇다면야.”

치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고기를 베어 물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 변명을 기이하게 여길 법도 했으나 치치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이틀 동안 여행하면서 알았는데, 대체로 마법사들은 자신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무신경한듯했다.

그런 의미에선 다행이었다.

‘괜한 의심을 받는 건 사절이기도 하고.’

깊이 파고들진 말아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하나만큼은 꼭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탑과 시스템에 관해서 알아?”

“탑…? 상아탑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또 시스템은 뭐죠? 처음 들어보는데.”

내 물음에 치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혹시 이쪽을 속이려는 연기가 아닐까 싶었지만, 정말로 모르는 것 같았다.

설령 알고 있다고 해도 플레이어인 나를 속일 이유는 없다.

나는 곧바로 결론을 내렸다.

이곳의 NPC들은 탑에 관해 모른다.

“아냐,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쳇, 사람 궁금하게 해놓곤…. 그럴 거면 물어보질 말던가요.”

적당히 얼버무리자, 치치는 뺨을 부풀리며 고개를 획 돌렸다.

식사도 적당히 마쳤겠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신한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스런 표정을 짓고 있던 치치가 사뭇 진지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곧바로 사태를 파악한 나는 주변에 흩어진 모래를 이용해 불을 껐다.

치이이익!

횃불이 꺼지자 순식간에 어둠이 도래했다.

기감을 끌어올리자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몇몇 무리가 느껴졌다.

다른 여행자나 행인이 아닐까 싶었지만, 이내 머릿속으로 부정했다.

‘그럴 리는 없지.’

카르텔의 샘물은 마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반적인 사람은 찾지 못하는 곳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샘물을 찾기 위해 인적이 드문 장소를 위주로 탐색하고 있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이런 오지까지 발을 디딜 리가 만무했다.

“또, 이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올 리도 없고.”

“한별! 둘리도 필요하면 말해라! 언제든지 가세하겠다!”

내내 품속에 숨어있던 둘리가 몸을 뒤척이며 의지를 불태웠다.

하긴 둘리의 성격으로 이틀 동안 품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으니, 심심해질 법도 했다.

기회가 생겼으니 당연히 나서고 싶어 하겠지.

하지만 그 의견에는 반대였다.

“아니, 넌 숨어있어.”

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둘리라는 카드를 내세우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둘리가 나서게 될 때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서였다.

하나 그런 의도가 있다는 걸 알 턱이 없는 둘리는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내 멱살을 붙잡고 애원했다.

“하, 한별…. 둘리도 할 수 있다! 시켜만 달라!”

“둘리, 넌 비장의 패잖아. 비장의 카드가 이런 자리에서 나서도 되겠어? 그래도 된다면 난 상관없는데.”

“비, 비장의 패?! 헤헤헤, 알겠다! 이번에는 참겠다!”

비장의 카드라는 말에 둘리는 두 눈을 반짝이며 얌전히 품속으로 들어갔다.

그럼 그렇지. 이래서 녀석은 다루기 편하다니까.

둘리와 함께 다닌 세월이 얼마나 긴데, 녀석을 다루는 거라면 간단했다.

그러는 사이, 정체불명의 사람들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곧 와요!”

치치가 목소리를 높이며 스태프를 들었다.

스태프에서는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강렬한 에너지를 불러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화염구가 쏟아졌다.

치치가 스태프를 휘두르자, 화염구는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문제는 내 쪽으로 쇄도하는 화염구였다.

무의식적으로 검을 꺼내려다, 치치가 이쪽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지면을 즈려밟고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방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에 화염구가 떨어지며 폭발을 일으켰다.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아 나무 위에 착지해 상황을 살폈다.

‘적은 다섯 명인가.’

당연한 말이겠지만, 다섯 명 전부 마법사였다.

그들은 얼굴을 숨기기 위해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나무와 덩굴 사이를 타고 은밀하고 잽싸게 움직였다.

마법사의 움직임이라고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는 스피드와 움직임.

그들의 다리에 의식을 집중하자 희미하게나마 마력이 느껴졌다.

일종의 강화 마법을 이용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전면에 나서서 내가 쓰러뜨려도 별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구태여 밑천을 드러낼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고 적을 상대한다고 해도 급이라는 게 있다.

바로 전 층에서 마법의 끝자락을 넘어 초월자라고 불리는 드래곤. 게다가 그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찬란한 권능과 광명을 자랑하는 로드급 드래곤과 맞서 싸워 당당히 승리를 거두기까지 했다.

그런 내가 저런 마법사들과 맞서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타산에 맞지 않았다.

그러니 이 기회에 치치의 실력을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때마침 치치와 마법사들이 격돌했다.

각양각색의 화려한 마법들이 하늘을 수 놓으며 눈길을 빼앗았다.

콰광!

하늘에서 전격이 쇄도하고, 사방에서 불길이 화르르 타오르며 마나의 움직임에 따라 숲속 전체가 요동친다.

확실히 마법사들의 싸움은 땀내 나는 전사들의 전투와는 달랐다.

싸우는 내내 눈이 신기해지는 느낌이랄까.

물론 당사자들한테는 치열한 싸움이겠지만, 내가 느낀 관점에서는 그랬다.

“곧 끝나겠네.”

내내 싸움을 지켜보다 말고 조용히 읊조렸다.

비록 상대의 숫자가 많다고 해도 승기는 치치에게 기울었다.

처음부터 적들에게 승산은 없었다. 이대로 지켜만 보면 몇 분 내에 결판이 나겠지.

거의 끝나가는 전투를 바라보던 도중이었다.

뭐지?

문득… 정말 문득이지만,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저들은 이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서 왔었던가.’

치치와 나는 추격을 당할 것을 대비해 숲속을 빙빙 둘러왔었다.

게다가 발자취가 들킬 것을 대비해 우리의 행동반경에 트랩을 깔아뒀었다.

하나 설치해둔 트랩은 발동하지 않았었다.

그렇다는 건, 우리를 습격한 마법사들은 내가 인기척을 느끼기 전부터 이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왔다는 뜻인데.

평범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우리 중 누군가의 몸에 일종의 기계나 탐지 마법이 걸려 있지 않은 한은.

그래서 곧장 둘리에게 물었지만, 기이하게도 둘리는 고개를 저으며 단언했다.

“탐지 마법? 으음…. 아니다! 그런 마법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없다고? 정말이야?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정말이다! 둘리, 거짓말 같은 건 안 한다!”

혹시 몰라 되물었지만, 둘리는 딱 잘라 말했다.

그렇다는 건 정말이라는 건데….

계속 뇌리에서 감도는 위화감의 정체를 파악하려던 그 순간.

“후우, 전부 끝났어요.”

습격자들에게서 승리를 거뒀는지, 치치는 이마를 훑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녀의 모습에 나는 생각하기를 관뒀다.

“습격자들은?”

“저기에 전부 몰아놨어요. 저흴 어떻게 찾았는지 심문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그게 참… 잘 안 됐거든요.”

치치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턱짓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이미 숨을 거둔 마법사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가 복면을 걷어내자, 입 주변으로 초록색 액체가 묻어 있었다.

아마 패배하기 직전에 독약을 삼켜 자결한 모양이었다.

“배후는 알겠어?”

“보나 마나 상아탑 측의 마법사들이겠죠. 뭐, 이런 경험이야. 흔해서 신경도 안 써요.”

이런 경험이 ‘흔하다고’?

그녀의 말에 나는 의문을 느꼈다.

고작 재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그리고 상아탑의 비밀이 노출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이유 하나로 귀중한 인력을 소모하면서까지 쫓을 수 있나.

적어도 내 상식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하나를 의식하기 시작하면 다른 것까지 지레짐작하면서 의심하게 되는 건 안 좋은 버릇이었다.

그렇게 자리를 옮기려던 그때였다.

치치는 주머니 속을 뒤척이더니, 활짝 웃었다.

“아, 맞다! 좋은 걸 얻었어요.”

“뭐길래 그래?”

“짜짠! 이거 저들이 갖고 있던 지도인데, 여기에 적혀진 표시를 보면 샘물의 위치로 의심되는 장소인 거 같아요. 뭐… 열 곳이 넘긴 하는데 제가 지닌 정보랑 비교하면 많이 좁힐 수 있겠는데요.”

치치는 흥분에 들떠 히죽거렸지만, 그에 반해 나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달콤한 과실은 사람을 현혹하기 마련이지만, 고도의 단맛은 독이 되기도 마련이다.

마치 서로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가 누군가의 압력에 의해 억지로 맞물리는 듯한 기분.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내가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일단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치치는 흥겹게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그동안 알아낸 증거에 의하면 이 숲속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저들의 지도와 비교하면 많이 겹친단 말이죠.”

“그렇다는 건.”

따악, 치치는 손가락을 튕기더니 지도의 한 켠을 가리키며 말했다.

“맞아요. 바로 이곳에 샘물이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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