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후우, 역시 쉽지만은 않네.”
“쉽지 않은 게 아니다. 힘들어 죽겠다! 아니, 그냥 죽을 거 같다!”
훈련실에서 뻗은 채, 한숨을 내뱉자 옆에 있던 둘리가 곡소리를 냈다.
얼마나 힘들었던 모양인지 둘리의 양 뺨은 쏙 들어가 있었다.
하긴 훈련실에서는 바깥과의 시간 흐름을 조정할 수 있다고 해도 거의 반나절 가까이 전투만 했으니 그럴만도 했나.
하나 고생의 대가로 얻은 소득도 있었다.
‘확실히 약한 놈들보다도 훨씬 강한 놈하고 싸우니까, 전체적으로 느는 게 있네.’
허공을 향해 주먹을 움켜쥐며 빙그레 웃었다.
이터의 권능으로 획득할 수 있는 스탯도 그렇고, 강한 놈과 싸우는 감각도 되찾은 거 같았다.
매번 찡얼거리긴 했어도 둘리 역시 드래곤으로서 효율적인 전투 방법을 깨우친 거 같았고.
어떻게 보면 적이지만, 반면교사가 된 셈이니 좋은 현상이지 않을까.
나는 둘리를 바라보면서 싱긋 웃음을 지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만 더….”
“안 된다! 둘리 더 이상은 못 움직일 거 같다!”
둘리는 내가 말을 전부 잇기도 전에 말꼬리를 끊었다.
훈련실에 머무르는 시간이 어지간히도 PTSD가 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내가 생각해도 너무한가 싶을 정도로 많이 굴렀으니까.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간 탑을 등반하면서 고생을 하기도 했으니까. 쉴 땐 제대로 쉬게 해줘야지.
그리고 나도 눈을 좀 붙이고 있었다.
〈10시간 02분 뒤에 다음 층으로 이동합니다.〉
슬쩍 시간을 확인하니, 다음 층으로 이동하기까지는 아직 여유로웠다.
훈련실을 종료하자 짙게 깔린 안개가 걷히며 주변 풍경이 달라졌다.
드넓은 평야는 온데간데없이 좁은 공간이 펼쳐졌다.
현실감이 돌아왔다.
훈련실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서자 시원한 공기가 우리를 맞이했다.
“으아…. 죽겠다! 한별 한숨만 자겠다!”
“자긴 어딜 자. 먼저 씻어야지.”
휴게 공간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뛰어들려는 둘리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내 손에 대롱대롱 붙잡힌 둘리는 두 뺨을 부풀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아, 아까 전에 씻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지금은 땀 범벅이잖아.”
얘는 참 언제 적 소리를 하는 거야.
뭐 둘리 딴에는 두 번이나 씻는다는 게 귀찮겠지만 이런 건 습관을 들어둬야지 좋았다.
어쨌거나 청결한 것 자체는 나쁠 게 없으니까.
나는 반항하는 둘리를 힘껏 붙잡고는 욕실을 향해 들어갔다.
“씻고 나서 같이 사우나나 조지자고.”
“한별, 아저씨 취향이다! 아재다! 아재!”
“새끼 봐라? 그럼 그 아저씨하고 뜨겁게 등이나 지지자고.”
드래곤인 둘리는 비늘 덕에 용암에라도 들어가지 않는 한, 화상을 입을 걱정이 없다.
그래서 좋은 거 같아.
반대로 말하자면 용암만 아니면 전부 된다는 거잖아.
나는 그윽한 시선으로 둘리를 바라보며 농담을 던졌다.
“오늘 한 번 수육이나 만들어보지.”
* * *
〈46층으로 이동합니다.〉
휴게 공간에서 충분한 휴식을 보낸 직후, 나와 둘리는 곧바로 다음 층으로 이동했다.
46층에 도착하자 우리의 앞에 나타난 것은 두 개의 문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44층과 비슷한 구조인 것 같지만, 저번 층과 같이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곤 기대하기 힘들었다.
탑이 저번과 같은 수단을 쓸 리는 없을 테니까.
요행에 기대는 것도 한두 번이다.
문을 바라보며 서 있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양자일택의 관문입니다.〉
〈당신을 기준으로 오른쪽 문에는 힘과 관련된 관문입니다.〉
※ 패널티로 근력과 관련된 스탯을 봉인합니다.
〈당신을 기준으로 왼쪽 문은 마법과 관련된 관문입니다.〉
※ 패널티로 마나와 관련된 스탯을 봉인합니다.
“그러니까. 오른쪽이 힘이고 왼쪽이 마법이라는 건가.”
나는 시스템 창을 읽고는 곰곰이 고민에 빠졌다.
탑이 플레이어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것은 꽤나 특이한 케이스였다.
결국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혹시 몰라 44층과 같이 탑이 숨긴 의도가 있을까 싶어 살펴봤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둘리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그렇다면 이번 층은 순수하게 고르고 싶은 걸로 선택해서 골라라는 것 같은데….
‘뭘 고르는 게 낫지?’
음…. 모르겠다.
항상 탑이 주도한 대로 움직이다가 막상 선택권을 주니 혼란스러웠다.
갈피를 못 잡고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던 그때였다.
쿠구궁!
갑작스레 진동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위험한 감각이 곤두섰다.
감각이 위협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벽이 있었다.
내 착각인지는 몰라도 점점 벽이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착시 현상인가?’
가끔 어지럼증이 일어나면 세상이 빙 도는 듯한 착각을 하기 마련인데, 그것과 같은 건가?
그런 의심을 가지기도 잠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을 부정했다.
“하, 한별! 벽이 이쪽으로 가까워진다!”
아무래도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닌 모양인지, 옆에 있던 둘리가 호들갑스러운 소리를 질렀다.
틀림없다.
주변에 있는 네 면의 벽이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서둘러 선택해주십시오.〉
〈결정을 못 내릴 시에는 벽에 깔려 사망합니다.〉
이어진 시스템 창을 읽고는 조소를 흘렸다.
“이번에는 머릴 잘 썼네.”
“그, 그게 무슨 뜻인가?”
“저번처럼 선택을 보류하면 이대로 압사시켜버리겠다는 뜻이잖아.”
벽이 가까워지는 속도를 봐서는 앞으로 여유는 5분 남짓이려나.
아니, 만약에 벽이 가까워지는 속도에 가속이 붙는다고 가정하면 그것보다도 더 짧다고 봐도 무방했다.
“한별 깔리기 전에 아무거나 선택해서 들어가자! 둘리가 보기에는 이거나 저거나 똑같아 보인다!”
제게 닥친 상황을 깨닫자, 둘리는 내 팔을 흔들면서 문을 가리켰다.
확실히 둘리의 말대로였다.
이전과는 달리 관문에서는 별다른 기척이나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특이점이 있었다면 내가 알아차리기 전에 둘리가 먼저 경고를 했을 테고.
그럼 정말로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가면 된다는 건데….
이러는 사이에도 방은 점점 좁아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악화되었지만, 무언가에 억제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은 냉정했다.
곁으로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관문,
‘곁만 보고 판단하는 건 하수가 저지를 법한 실수지.’
인간은 촉각, 후각, 청각, 시각… 등 갖갖의 요소를 통해 상대방의 성격이나 제게 닥친 상황을 판단하곤 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많이 의지하는 감각은 다름이 아닌….
“시각.”
나는 눈가를 가늘게 떴다.
단순히 시간제한을 걸려면 타이머를 사용하면 된다.
그러나 탑은 타이머가 아닌, 플레이어의 시야에 직접 보이는 압박감을 줘서 제한을 걸었다.
탑은 의도적인 압박감으로 플레이어에게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하도록 하고 있다.
또,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는 문구가 있었다,
‘힘과 관련된 관문에서는 근력을, 마법에 관련된 관문에서는 마나를 제한한다….’
그냥 들어선 영 감이 안 잡히는 이야기였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힘의 관문에서는 마나를 쓸 수 있고.
마법과 관문에서는 근력을 문제없이 사용 가능하단 뜻이다.
이러한 부분을 생각했을 때는 내게는 후자가 훨씬 유용했다.
마법사들로 가득한 곳에서 힘법사 행세라도 하면 재밌겠네.
왼쪽 관문을 선택하겠다고 둘리에게 말하자,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반박이 들어왔다.
“하지만 한별은 마법은 하나도 할 줄 모르지 않는가! 만약에 마법과 관련된 임무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 차라리 그럴 바에는 힘이 나은 거 같다!”
평소의 둘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논리적인 발언.
나 또한 그러한 가정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누구라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가정이니까. 당연히 그에 대한 대답 역시 미리 생각해놨다.
나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마법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드래곤이 옆에 붙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에헤헤, 역시 그런 거였나. 둘리만 믿고 따라와라!”
적당히 비위에 맞추자, 둘리는 헤벌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쉽게 넘어가는 거야? 뭐, 이렇든 저렇든 좋게 해결됐으니 아무렴 됐나.
고민은 짧았다.
끼이익, 손을 뻗어 왼쪽 문을 열자 강렬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파앗!
그와 동시에 청명한 시스템창이 귀청을 때렸다.
〈신한별 플레이어는 왼쪽 문을 고르셨습니다.〉
〈마법과 지혜의 세계로 이동합니다.〉
* * *
〈신한별 플레이어에게 특화된 조건을 탐색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섬광이 가시자, 시스템창과 함께 드높은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시선을 돌리자, 적어도 수십 미터가량에 다다를 것 같은 책장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도서관인가?”
주변을 둘러보고서 나는 확신했다.
도서관 특유의 책 냄새와 나른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슬쩍 창밖을 보니, 시간대는 늦은 오후였는지 주황빛 햇빛이 도서관 안쪽까지 드리우고 있었다.
정말 간만에 보는 풍경에 나는 도서관 안쪽을 거닐며 주변을 둘러왔다.
‘어릴 적에 봤었던 도서관도 분명 이런 느낌이었지.’
물론 동네 도서관과 비교하면 이곳의 도서관은 규모도 위용도 넘사벽일 정도로 압도적이었지만.
그 증거로 아무리 고개를 들어도 책장의 높이가 가늠이 안 될 정도였다.
책장에서 책을 아무거나 하나 빼 들자, 아니나 다를까. 마법학과 관련된 책이었다.
[마나의 정석]
책의 이름을 훑어보곤 책장을 넘기려던 찰나,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머, 이거 유명한 책이죠. 마나의 정석, 학부생들이 매년 있는 마법능력 시험을 공부할 때 사용하는 책이거든요.”
갑작스런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고깔모자와 금발이 인상적인 여자가 서 있었다.
가만히 세워두기도 뭐 했기에 적당히 대답했다.
“그래? 처음 보는 책이라 조금 관심이 생겨서 말이지.”
“흐음…. 그래요? 마법에 대해서 무관심한 모양이네요. 아니면 능력이 안 되는 건가?”
생각지도 못한 한 방에 그녀를 째려봤지만, 의도하고 한 말은 아니었는지 진지한 얼굴이었다.
아니, 본의가 아니었다면 그게 더 상처인데.
한마디 할까 싶었지만, 실제로도 마법에 대해 무지한 것도 사실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지나가는 인연한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넘기려던 그때였다. 그녀는 이쪽을 슥 훑어보더니,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여기에 계신 걸 보니까. 당신도 마법사인 거 같은데, 그쪽의 전공은 무엇인가요?”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입을 닫았다.
그동안은 깨닫지 못해서 그랬는데,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책장에는 마법과 관련된 도서밖에 없었다.
마법과 관련된 도서관이니 당연히 나도 마법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무슨 마법사라고 대답할까.
내가 지닌 번개의 정기를 활용한다면 전격 마법사라고 둘러댈 수 있을 것이다.
전격 마법사라고 대충 둘러대려던 그때, 괜찮은 아이디어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그 아이디어를 곧바로 입에 담았다.
“힘법사.”
“네?”
내 대답에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알통을 보이면서 대답했다.
“때려잡는 거 전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