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60화 (160/175)

제160화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남은 시간은 10분가량.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점점 사라지는 관문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초조해졌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야 해.’

내가 떠올린 묘책은 솔직히 말해서 묘책이라고 부르긴 애매한 종류였다.

그저 시스템 창에 적혀 있는 허점을 파고든 것뿐이니까.

분명 시스템의 설명에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쉬운 시련이 존재하는 관문이 사라진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라면 그런가 하고 넘겼으나 나는 이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려운 관문만 남는다고 하면 될걸 뭘 이리 어렵게 표현했을까, 하는 의문을.

나는 그 발상에서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이거 10분이 전부 지나면 그냥 이번 층 끝나는 거 아냐?’

시간이 지날수록 관문은 점점 사라진다.

그런 논리라면 10분이 지나면 이번 층도 자연스레 클리어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라면 억지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해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만약 시간이 오버해서 패널티가 생긴다면 탑에서도 미리 알렸을 테니까.

물론 근거는 없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준비는 해야겠지.’

1초를 남기고도 바뀌는 일이 없으면 남은 관문을 열고 곧바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1분가량이 남자, 대다수의 관문이 사라졌다.

남은 관문은 총 열 개.

30초…. 20초…. 10초.

본격적으로 카운트다운이 개시되자, 긴장이 바짝 올랐다.

“마지막 남은 문.”

내 계산에 따르면 카운트다운이 끝나기 전에 문이 사라질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59분하고 50초가 지났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었다.

꿀꺽, 침이 목울대를 타고 천천히 흘러가는 소리와 둘리의 목소리.

땀이 주르륵 흘러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까지.

평소라면 가볍게 넘겼을 소음이 확성기를 튼 것처럼 시끌벅적하게 들려왔다.

긴장감이 절정에 다다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다짐은 여전했다.

‘마지막 1초까지.’

섣불리 판단하고 행동하는 건 좋지 않았다.

그러니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틴다.

혹시 모를 0.1초의 간극을 대비해 마지막으로 남은 관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렇게 카운트다운이 1초에 다다르자 문의 손잡이가 사라졌다.

이윽고.

〈제한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이동할 관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 층이 종료됩니다.〉

〈곧이어 다음 층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이번 층이 종료되었다는 문구와 함께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나는 시스템 창을 확인하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예상이 그대로 적중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둘리가 옆에서 입을 쩍 벌리며 팔짝팔짝 뛰기 시작했다.

“하, 한별 문이 전부 사라졌다! 해낸 건가? 해낸 거지? 믿고 있었다!”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것처럼 기뻐하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됐다!”

솔직히 반쯤은 도박이었는데, 이렇게 성공할 줄은 몰랐다.

예상이 정확히 틀어 맞았다는 기쁨에 둘리를 부둥켜안는 것과 동시에 다음 층으로 이동하는 섬광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45층으로 이동합니다.〉

〈플레이어 일괄 메시지: 신한별 플레이어님께서 44층을 60분 만에 클리어하면서 역대 클리어 시간을 갱신하셨습니다.〉

* * *

〈29채널- 44층 전용 채널〉

- ???? ㅅㅂ 뭐임? 시스템 봤음?

⤷ ㅇㅇ 아니, 어떻게 하면 벌써 클리어 함;;

⤷ ㅋㅋㅋ 갈고리 수집가

- 역시 신협!! 믿고 있었습니다!

⤷ 신멘!!

⤷ 신멘!!!

- 신협한테는 당연한 거지

- 억까충들 어디 감ㅋㅋㅋ 항상 기어 나오더니 이제는 뭐라고 깔 거임?

- 또또, 호들갑이여;; 신한별이 관문 가장 먼저 열어서 쉬운 시련 받았겠지. 응~ 쉬운 시련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야

⤷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는데, 신한별 혼자 맨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음ㅇㅇ

⤷ ??? 그럼 가장 어려운 관문에 들어가서 클리어 한 거네 ㅗㅜㅑ

- 신까들 어디 갔음? 증거 나오자마자 끝까지 입꾹닫하는 거 봐

- 신하다 추까들ㅋㅋㅋㅋ

- 근데 44층에서 제한 시간 전부 기다리면 관문이 사라져서 클리어할 수 있거나 한 건가?

⤷ ㅋㅋㅋ 말도 안 되는 소리

⤷ 아무리 끼워 맞혀도 그게 맞겠냐? 능지 수준;

⤷ 그렇겠지ㅎㅎ

* * *

〈45층, 휴게 공간입니다. 또한, 통합 공간으로도 이동할 수 있습니다.〉

〈12시간 13분 뒤에 다음 층으로 이동합니다.〉

휴게 공간에 도착했다는 문구와 함께 쌓여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44층은 비교적 수월하게 클리어했다지만, 다른 층을 등반하기는 쉽지만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탑은 상위층으로 등반하면 할수록 더욱 어려운 조건이 주어지고 복잡해진다.

그 증거로 하위층을 등반할 때는 주로 개인층이 주류였지만, 지금은 개인층보다도 단체층이 주류였다.

그만큼 수많은 경험과 각기 다른 관점을 지닌 플레이어들이 한꺼번에 몰려있으니, 생각해야 할 변수가 많아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항상 긴장만 하고 있다가 긴장감이 풀렸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

원래는 먼저 씻는 게 우선이지만, 그냥 침대로 곤두박질쳤다.

시체라도 된 듯이 침대에 쓰러져 있자 둘리가 옆으로 와서 되물었다.

“한별, 한별! 그럼 둘리 먼저 씻겠다!”

“알았어, 먼저 씻어.”

“야호, 알겠다!”

내 허락에 둘리는 휘파람을 불며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증기를 보고 있으니, 간만에 사우나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사우나를 조지고 나면 실외 온천까지 즐겨볼까.

머릿속으로 계획만 구상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씻을 거면 땀이라도 조금 빼두는 게 낫겠지.

나는 간만에 훈련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휴게 공간에 도착하면 둘리는 내가 억지로 시켜서라도 매번 이용했지만, 나는 누적된 피로를 푼다고 비교적 이용하지 못했다.

솔직히 훈련실에서 또다시 땀을 빼는 건 귀찮았으나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초대장의 시간도 다 되어 가니까.”

우리를 탑에 끌어당긴 원흉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그 자리에서 결착을 내려면 많은 힘이 필요했다. 그러니 남은 시간에 힘을 최대한 비축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럼 일어나 볼까.

결심을 내린 직후,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훈련실을 향했다.

그렇게 상당 시간의 훈련을 마친 직후.

땀을 뻘뻘 흘리며 바깥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선글라스를 끼고 오렌지 주스를 마시는 둘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혼자서 바캉스라도 온 듯한 모습.

하긴 탑에 비하면 바캉스긴 하지. 이쪽을 위협할 괴수도 없고, 위험한 함정도 없으니 온전히 적에게만 신경을 쓰면 된다.

“여어, 한별! 훈련 재밌게 하고 왔나 고생했다.”

둘리는 한껏 거만한 자세로 자리를 꼰 채, 인사를 건네왔다.

녀석의 모습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 녀석의 행동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긴 한데, 은근히 짜증 나는 건 왜지?

뽀송뽀송한 둘리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학심이 송이송이 피어올랐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짓고는 녀석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둘리는 내 손에 꼼짝없이 붙잡힌 채 버둥거렸다.

“가, 갑자기 뭔가!”

“뭐긴 뭐야. 설마 훈련을 빼먹을 생각은 아니지?”

“히, 히익! 하지만 다음 층에 가기 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는가! 그리고 둘리 방금 전에 씻고 나왔다!”

쉬고 싶다는 것을 표현하듯 둘리는 씻었다는 것을 과시했지만 통할 리가 만무했다.

“괜찮아. 기왕이니까, 내가 옆에서 좀 더 봐주지 뭐.”

“…….”

아무리 둘리라고 해도 더는 반박하지 못했다.

훈련을 전부 마친 사람이 남아서 추가로 더 하겠다는데, 이걸 두고 누가 마다하겠는가.

물론 마다한다고 해도 그대로 놔줄 생각도 없었지만.

어차피 휴게 공간과 훈련실 내의 시간 흐름은 사용자가 직접 설정할 수 있다.

훈련할 시간과 쉴 수 있는 시간도 마련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닐까.

또, 훈련실에서 쓰러뜨린 괴수의 힘은 [이터]의 권능을 사용해 흡수할 수 있었다. 현실적으로 말해 레벨의 상승이 불가능한 나한테는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내 설명에도 불구하고 둘리의 안색은 흙빛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훈련실에 들어갔다.

훈련실에 진입하자, 미리 설정해둔 대로 광활한 평야가 펼쳐졌다.

그래도 둘리는 막상 훈련실에 들어오니 흥이 올랐는지 의욕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만족하며 괴수를 소환시켰다.

“그러고 보니 한별 이번에 상대할 괴수는 뭔가? 항상 그랬듯이 오우거? 코볼트? 아니면 고블린 킹인가!”

둘리는 괴수가 소환 중인 쿨타임을 틈타 질문을 던졌다.

간만에 의욕을 보이는 그 모습에 나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드래곤 로드야.”

“음? 지금 뭐라고 했나? 둘리 잘 못 들은 거 같다.”

“아냐,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우리가 상대할 놈은 로드급 드래곤이야.”

나는 검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때마침 쿨타임이 전부 지나며 새하얀 안개 속에서 설정해둔 상대가 나타났다.

짙은 안개 속에서 새빨간 안광이 빛난다 싶더니, 이내 우악스러운 드래곤 피어를 내뿜으며 로드급 드래곤이 소환되었다.

그 광경에 둘리는 들고 있던 목검을 떨어뜨린 채, 경악했다.

“죽는다…. 한별 저놈하고 다시 싸우면 이번에는 100% 죽는다!!”

“거참 훈련실에서는 잘 안 죽는다니까. 대신에 죽기 직전까지 빡셀 뿐이지.”

“뒤가 문제다! 뒤에 한 말이 문제다!”

“엄살은…. 그래도 안 죽어.”

그런 확신이 있었다.

이미 공략해본 상대다.

또다시 싸워서 패배한다면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과는 별개로 둘리가 발끈하자, 나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 그래도 팁을 하나 알려줄까?”

“오…. 뭔가! 한별 알려줘라!”

“내가 해봤는데 죽으면 강해지긴 하더라고.”

나는 튜토리얼에서 999년 동안 머무르면서 깨우친 해답을 입에 담았다.

그야 강해지려면 죽기 전까지 굴러야 하는 건 상식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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