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59화 (159/175)

제159화

〈44층에 도착하셨습니다.〉

〈이번 층의 컨셉은 선택의 관문입니다.〉

〈대기실에 존재하는 관문에는 각기 다른 시련이 존재합니다. 관문에 따라 시련의 종류와 난이도는 천차만별이니 신중하게 선택해주십시오.〉

〈제한 시간: 60분〉

※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쉬운 시련이 존재하는 관문이 사라집니다.

44층에 도착했다는 문구와 동시에 시선 위로 설명이 적힌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나는 시스템창을 확인한 뒤, 긴장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후, 다행이네.”

43층의 피로와 부상이 남아 있어서 다음 층에 도착하자마자 습격을 받으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피로를 회복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긴 했지만, 없는 것보단 훨씬 낫다.

나는 서둘러 포션을 꺼내 상처에 끼얹었다.

살이 타오르는 감각과 함께 상처는 급속도로 아물었다.

‘피로는 최대한 빨리 등반해서 휴게 공간에서 쉬면 되겠지.’

자양강장제 같은 효과를 발휘하는 포션도 있긴 했지만, 그건 피로를 중첩하는 셈이다.

이번 층을 클리어하기 위한 조건을 모르는 이상 피로를 뒤로 미루는 건 위험했다.

상처에 적당히 붕대를 감아 두고 있을 때쯤, 둘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한별, 한별! 주변에 문이 많다!”

둘리의 이야기에 주변을 둘러보자, 수십 개의 문이 펼쳐졌다.

시스템 창의 언급에 따르면 저기에 존재하는 문은 전부 시련으로 향하는 입구.

제한 시간은 1시간이니 서둘러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신중하게 골라야겠지.’

다른 놈도 아니고, 그 탑이다.

저 문 뒤에 무엇을 숨겨뒀을 진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등반한 모든 층을 통틀어 최고난도의 시련이 주어질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만큼 만반의 준비는 필수였다.

관문을 바라보며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데,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히든 조건을 클리어한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이라는 문구에 나는 두 눈을 빛냈다.

43층을 클리어하고 나서 보상이 언제 지급되나 한참 기다렸는데,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보상을 확인했다.

〈백룡의 장갑(SS+)〉

- 수백 년 전에 죽은 드래곤 로드의 뼈로 만든 장갑으로 어떠한 장갑과 비교해도 비견할 수 없는 내구도와 강함을 자랑합니다!

- 백룡 시리즈를 연속으로 발견하셨습니다. (5/5)

- 아티팩트 세트의 추가 효과가 발동합니다. (속성 저항력+999, 내구도+999, 체력+999……)

※ 봉인되어 있습니다.

“떴드아아!”

이어진 문구에 나는 주먹을 움켜쥐며 탄성을 내질렀다.

한참 수집 중이던 백룡 시리즈 중에서도 마지막 파츠가 허공에 떠올랐다.

아티팩트를 착용하자, 시원한 감각과 함께 모든 신체 능력이 몇 단계나 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백룡 시리즈의 진정한 힘은 봉인되어 있다.

이 봉인을 풀기 위해선 드래곤 하트를 필요로 했다.

드래곤 하트를 얻기 위해선 드래곤를 처치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지만, 공교롭게도 내 손에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닌 로드급의 드래곤 하트가 말이지.”

나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드래곤 하트를 아티팩트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아티팩트는 진동을 일으키며 웅웅- 공명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강렬한 섬광을 일으켰다.

〈봉인이 해제됩니다.〉

봉인이 해제된다는 문구와 함께 아티팩트에서 빛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묘한 해방감과 동시에 백룡 시리즈의 ‘능력’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이거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탑을 만들고 플레이어들을 끌어당긴 모든 원흉인 마신을 쓰러뜨릴 방법이.

충분했다.

일전에 보상으로 획득한 초대권이 발동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가량, 남은 시간 동안 이 능력을 제 것으로 만든다면 탑의 개새… 아니, 마신을 쓰러뜨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도 아니리라.

앞서 받은 보상으로 앞으로의 시나리오를 계획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마지막 보상이 지급됩니다.〉

“어? 또 준다고?”

미친.

또다시 떠오른 시스템창을 보며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사실 방금 전의 보상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은 보상이 더 있었다니, 이건 못 참지.

나는 서둘러 보상을 열람했다.

그러자 허공에서부터 새하얀 깃털이 떨어졌다.

곁으로 보기에는 동물원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새의 깃털과 마찬가지였지만, 아티팩트에서 성스러운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의 잔재(■■■)〉

- ■■의 사념이 뭉쳐져 있습니다.

- 드래곤 종족이 아티팩트를 사용하면 ■■■ ■■■에 달하는 ■■■ ■■■ 수 ■■■■.(Feat_카르텔)

“누군가 싶었더니만.”

시스템 창의 끄트머리에 적힌 이름을 보곤 헛웃음을 흘렸다.

예전에 나눴던 성신 카르텔의 이야기에 따르면 차원을 관장하는 그녀는 마신의 구역인 탑에는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했다.

마신의 감시가 끼치지 않는 구역에서 조그마한 성역을 펼치는 게 기껏.

그마저도 상당한 기력을 낭비한다고 했다.

이렇게 선물을 보내는 것마저도 상당히 힘들 텐데, 기특할 따름이었다.

비록 아티팩트의 효과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나중에 둘리에게 맡겨두기로 할까.

그러던 도중이었다.

하늘에서 수십 개의 빛이 떨어졌다.

파앗!!

익숙한 빛이었다.

플레이어가 탑을 등반할 때마다 일어나는 섬광, 때마침 43층을 클리어 한 플레이어들이 속 속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플레이어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대기실에 떨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히든 조건을 클리어 한 내가 특이 케이스일 뿐이지. 다른 플레이어들은 다 같이 43층에 등반해서 10일간 생존하는 조건을 클리어했을 테니까.

‘어지간히도 고생했나 보네.’

44층에 도착한 플레이어들은 각기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42층의 특전을 통해 아무런 피해 없이 도착한 이들. 다른 한쪽은 42층을 패스한 탓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자들.

플레이어들을 둘러보고 있자, 멀리서부터 익숙한 면면이 보였다.

유채아와 소녀.

때마침 녀석들도 나를 발견한 모양인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한별 씨, 먼저 도착하신 거 보니까. 히든 조건이라도 클리어하신 모양인가 봐요.”

“뭐야? 43층에도 히든 조건이 있었다고? 그런 게 있었으면 나한테도 알려주지, 그랬어. 아저씨 혼자만 독차지하고, 치….”

“그야 히든 조건이니 찾기 어려운 건 당연한 거죠. 그러게 눈 크게 뜨고 살펴보지, 그랬어요.”

“이봐, 아줌마. 히든 조건을 클리어한 횟수라면 댁네보다도 내가 더 많을걸?”

“아, 아줌마라니…. 이 잼민이가.”

“지금 뭐라고…? 잼민이는 누가 잼민이야!”

유채아와 소녀는 각자 농담을 주고받으며 티격태격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없는 사이에 서로 친해진 모양이었다.

유채아도 그렇고, 소녀도 매번 볼 때마다 친구가 없는 거 같아서 걱정이었는데, 서로 친밀해진 걸 보니 다행이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쪽을 바라보고 있자, 옆에서 날카로운 지적이 들어왔다.

“한별도 없으면서, 친구.”

“그러는 너도….”

반박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둘리도 43층에서 친구를 만들어줬었지. 그럼 남은 건 나 혼자뿐인가?

문득 위기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둘리의 머리를 양 주먹으로 쥐어 짜내는 것으로 무마시켰다.

“으아아악! 한별, 아프다! 알겠다! 다음부턴 그런 말 안 하겠다!”

품속에서 발버둥 치는 둘리를 뒤로하고, 나는 소녀를 바라봤다.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응? 뭘 물어보고 싶길래?”

소녀의 해맑은 모습에 긴장을 풀었다,

42층에서부터 내내 가졌던 의문인데, 그동안은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기회는 지금 밖에 없겠지.

“42층에서 네 도플갱어를 만났는데, 직업이 마리오네트라고 하더라고. 그만한 힘이 있는데 왜 안 쓰나 싶어서.”

“네? 하, 한별씨 지금 뭐라고…. 마리오네트라고요?”

소녀에게 건넨 질문인데, 옆에 있던 유채아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휙 돌렸다.

크게 당황한 듯한 유채아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응, 그런데 왜?”

“하, 하지만… 마리오네트 능력은 골리엇의 고유 직업인데 어떻게?”

“골리엇?”

갑작스레 나온 이름에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 맞는데. 내가 골리엇이야.”

그냥 툭 내뱉은 소녀의 대답에 순간 뇌정지가 왔다.

골리엇.

탑을 등반하는 플레이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전무후무한 랭킹 1위와 더불어 탑을 등반하는 플레이어 중에서 단 한 사람조차 얼굴을 본 적이 없는 플레이어.

반쯤은 도시 전설로 여겨지는 플레이어였는데, 그 골리엇의 정체가 소녀였다고?

당황스러운 얼굴로 소녀를 바라보자, 소녀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양 무덤덤하게 내뱉었다.

“예전에 심심해서 컨셉 잡고 골리엇이라고 이름을 대고 다녔는데, 그게 인기가 많을 줄은 몰라서 말이지.”

소녀의 대답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까놓고 말해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대답할 줄은 몰랐다.

혹여나 남은 알면 안 되는 사정이 있나 싶어서 일부로 둘러 물었는데, 이렇게까지 당당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지금까지 가졌던 의문점이 전부 풀렸다.

‘그래서 그렇게 강했었나.’

내내 랭킹 2위를 차지했던 유채아한테는 어지간한 충격이었는지, 그녀는 입을 쩍 벌린 채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렇게 작은 해프닝을 뒤로 하고, 우리는 시선을 옮겼다.

〈문을 선택하시오.〉

〈제한 시간: 40분 12분〉

※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쉬운 시련이 존재하는 관문이 사라집니다.

대기실에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40분 남짓.

이곳에서 머무르면 머무를수록 쉬운 난도를 지닌 관문은 사라진다.

이점을 노려 다른 플레이어들은 앞다투어 문을 선택해 44층으로 이동했다.

시간이 지나자, 유채아와 소녀 역시 손을 흔들며 떠났다.

그렇게 대기실에는 나와 함께 선택 장애를 지닌 일부 플레이어가 남았다.

나는 수십 개의 문을 바라보며 눈에 집중했다.

“음… 역시 곁으로는 특출난 건 없나.”

혹시 몰라 숨겨진 트릭이나 함정이 있지 않나 싶었지만, 아무리 탑이라고 해도 문 자체에는 트릭을 써두진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는 뜻은 정말로 시간이 지날수록 시련이 어려워진다는 건가? 그러면 최대한 빨리 이동하면 끝이잖아.

탑이 정말로 44층을 쉽게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탑이라면 그럴 리가 없다.

무언가 트릭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한 번 더 꼬아서 끝까지 선택을 못 한 플레이어를 엿 먹이려는 탑의 계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선택지가 많아지다 보니, 머릿속이 지끈지끈해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문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래서 나는 선택을 맡기기로 했다.

“둘리야. 넌 어떤 문이 제일 나은 거 같아?”

“음… 잘은 모르겠지만 전부 비슷비슷한 거 같은 직감이 든다!”

둘리에게 맡기자, 녀석은 눈을 감고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전부 비슷하다고?

“그럼 아까 전에 사라진 문하고 지금 있는 문하고 차이점은 있는 거 같아?”

“그렇게 물어본다면… 차이는 있는데 솔직히 상관없을 정도로 미미한 거 같다!”

내 물음에 둘리는 팔을 올리며 대답했다.

나는 여러 가정을 상정한 선택지를 둘리한테 문답으로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제한 시간: 10분 12분〉

※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쉬운 시련이 존재하는 관문이 사라집니다.

10분이 남자,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플레이어마저 떠나고 나와 둘리만 남았다.

제한 시간이 있으니 슬슬 결정해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눈에 보이는 문 중 하나를 잡고 손잡이를 돌리려던 그때였다.

“아, 혹시…!”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묘책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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