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자, 잠깐….”
내 발언에 드래곤들은 다급하게 뛰어왔다.
하나 그들보다도 내 행동이 더 빨랐다.
서걱!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르자, 천장과 연결된 세계수의 뿌리가 깔끔하게 잘렸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벌어진 상황에 드래곤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었다.
절망, 경악, 당황 등등.
여러 감정이 뒤섞인 시선 속에서 검을 갈무리했다.
나는 세계수와의 연결이 끊긴 뿌리를 내려다보며 안색을 굳혔다.
“둘리야.”
“한별, 불렀나?”
“세계수의 뿌리를 완전히 베어버린 게 맞지?”
“두, 둘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런 것 같다.”
내 물음에 둘리는 말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둘리의 말대로였다.
분명 세계수의 뿌리는 완벽하게 절단되었다. 혹시 몰라 세계수의 뿌리가 복수일 경우를 가정해봤지만, 적어도 내 기감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둘리 역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세계수의 뿌리는 이걸로 끝이었던 모양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목표물을 처리했으나 우리의 안색은 시꺼멓게 변했다.
그도 그럴 게.
‘세계수가 건재하잖아?’
뿌리를 절단함으로써 영양공급은 분명히 끊겼다.
하지만 세계수에서 느껴지는 방대한 생명력과 마나는 건재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뇌리에서부터 등줄기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마치 벌레를 씹은 듯한 불쾌함이 입 안에서 감돌았다.
머릿속에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타고 오르던 찰나, 로드는 이쪽을 바라보며 폭소하기 시작했다.
“크뢰뢰, 수백 년간 우리를 받쳐온 세계수가 그리 간단하게 무너질 법 싶더냐.”
“…….”
이어진 로드의 발언에 불안한 감정은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사실 이번 계획을 짜면서 상정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있었다.
그게 현실이 되길 바라진 않았는데 말이야.
하나 그런 기대를 깨부수듯 로드는 두 눈동자를 부라리며 말했다.
“비록 너희들의 계획대로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뿌리를 제거하면 일이 해결될 거라는 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 아닌가?”
이어진 로드의 발언에 나는 확신했다.
일전의 아델의 이야기에 따르면 세계수의 기원은 하늘에서 떨어진 씨앗이라고 했다.
세계수는 대지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에게 풍요로움을 제공했지만, 결말은 모두가 알다시피 시름시름 시들어갔다.
그것이 바로 세계수에 비축된 힘이 바닥났던 까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대의 로드는 대지의 힘을 이어받은 드래곤을 거름으로 삼았다.
그리고 새로운 양분은 세계수의 심장에서 소모됨과 동시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단 뜻이었다.
“표정을 보니, 네놈도 알아차렸나 보구나. 그래, 네 예상대로 세계수에 축적된 힘이 바닥나 완전히 시들기까지 수십 년 정도는 넉넉히 걸릴 거다.”
뿌리를 뽑아내는 것으론 곧바로 해결될 일이 아니란 뜻이었다.
“뭐, 우리 드래곤을 기준으로는 짧은 세월이지만, 충분한 시간이다.”
로드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형용치 못할 역겨움으로 가득했다.
이윽고 로드는 아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절망을 입에 담았다.
“세계수는 생존하기 위한 사이클을 반복한다. 마녀, 네놈을 생포해 세계수의 제물로 삼는다면 보란 듯이 부활할 테지.”
“그럴 수가….”
로드의 발언에 아델은 제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아델의 눈에는 떨쳐내려야 떨쳐낼 수 없는 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나.’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둘리를 향해 소리쳤다.
“둘리야. 플랜 B로 갈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프, 플랜 B라니 그게 뭔가?!”
내 말에 둘리는 귀를 쫑긋거리며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는 듯한 얼굴.
그야 당연했다.
플랜 B는 지금 막 머릿속에서 떠올린 방법이거든.
세계수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면 결론은 간단했다.
“저놈들을 해치우고, 무력으로 세계수를 지워버린다.”
뿌리를 절단해버려도 세계수가 건재하다면, 아예 싹을 잘라버리면 될 일이다.
근본부터 해치워버리겠다는 내 발언에 로드는 호쾌한 웃음소리를 냈다.
“크뢰뢰뢰, 당돌한 아이로구나. 무모하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만 이렇게까지 무모하고 대책이 없었을 줄이야.”
“왜? 이제 와서 내가 세운 계획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생각이야?”
“아니, 충분하지. 충분한 계획이야. 실현만 가능하다면 이루지 못할 거야 없겠지.”
내 질문에 로드는 음침한 미소를 띠며 말을 되새겼다.
로드는 잠시 눈을 감더니, 이내 손을 들어 올렸다.
“다만, 실현만 가능하다면 말이지.”
로드의 손은 정면을 향하더니, 그 앞에 서 있던 드래곤의 가슴을 꿰뚫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드래곤 하트가 자리 잡은 부위로.
순식간에 가슴을 꿰뚫린 드래곤은 경악한 눈빛으로 뒤를 돌아봤다.
“로, 로드이시여? 갑자기 저는 왜….”
드래곤의 물음에 로드는 히죽 웃으며 드래곤 하트를 손아귀에 쥐었다.
“네 녀석은 더 이상 장기짝으로써의 가치를 다했다. 이 정도의 설명이면 충분하겠지?”
드래곤한테 있어 드래곤 하트는 심장과 같은 존재.
산 채로 드래곤 하트를 빼앗긴 드래곤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눈에 빛을 잃었다.
손아귀에 쥐어진 드래곤 하트는 검은색 액체로 변하며 로드의 신체에 스며들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가 당황한 틈을 타, 로드가 마법을 발동하자 수십 갈래로 뻗어져 나간 얼음창은 드래곤의 몸을 차례차례 꿰뚫었다.
뒤늦게 반항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로드의 손속에는 자비란 없었다.
수십의 드래곤은 가슴을 꿰뚫려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더욱 정확하게는 검은 액체로 변모해 로드의 몸에 깃들었다.
촤르륵!
드래곤을 잡아 삼키던 얼음창은 곧바로 아델을 향해 쇄도해 들었으나, 나는 검을 휘둘러 놈의 손아귀를 떨쳐냈다.
손쓸 새도 없이 벌어진 상황에 아델은 희게 변한 낯빛으로 뒤로 물러섰다.
하마터면 주변의 드래곤과 같은 결말에 처할 뻔했다는 공포가 두 눈동자에 서려 있었다.
나는 땅바닥에 떨어진 얼음창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얼핏 봤지만, 확신하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역시 세계수의 뿌리와 똑 닮은 구조네.’
지금까지 벌어진 상황을 통해 뿌리의 쓰임새는 손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기어코 동족마저 희생해버릴 심산인가.”
“발언은 조심해주게. 희생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심장을 바친다고 해주게나.”
“염병, 위선자 새끼가 대의명분이나 찾고 있긴.”
변명이라도 할 거면 그럴듯하게 하면 몰라. 저걸 말이라고 지껄이나.
검은 액체로 변모한 드래곤들의 시체는 로드에게 스며 들어가고 있었다.
이전과는 달리 로드의 몸에서는 광활한 에너지가 흘러넘쳤다.
아델의 일족이 세계수의 거름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드래곤의 힘은 거름이 되어 로드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저게 목적이었나.’
순간적인 충동으로 일으킨 행동이라곤 생각하기 힘들었다.
놈은 내내 명분을 찾고 있었다.
동족을 희생시켜 스스로가 강해지기 위한 명분을.
그게 아니라면 세계수의 뿌리와 놈의 마법 구조가 비슷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힘들었다.
경멸스러운 눈빛에 로드는 스스로 떳떳하다는 듯 웃음소리를 내었다.
“고작 그런 소리나 하자고, 내 앞에 선 건 아닐 텐데?”
“그렇군. 그럼 슬슬 마무리 지어야겠구나.”
비아냥에 로드는 날개를 활짝 펼쳤다.
확실히 수십의 드래곤을 흡수해서 그런지 놈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안 쉬어지고, 피부가 따끔거렸다.
거대한 장벽을 보는 듯한 느낌.
끝없는 무저갱에 빠진 듯한 감각, 만약 놈을 쓰러뜨릴 수 있겠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파고들었다.
누가 신호한 것도 아니지만, 내 움직임과 동시에 로드 역시 수십 개의 마법을 영창했다.
공동 전체를 꽉 채운 마법진의 개수.
하나하나가 재앙에 가까운 위력을 지닌 일격이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서 나갔다.
설령 내가 진다고 해도 이대로 멈춰있을 순 없었다.
“후읍!”
짤막한 호흡과 함께 정면으로 검을 내찌르자, 마법진에서 수백, 수천 개의 일격이 떨어져 내렸다.
피부가 찢어지고, 검을 쥔 손톱이 떨어져 나간다.
온몸에는 크고 작은 자상이 수십 차례 새겨지고 눈앞이 새하얘진다.
당장에라도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몸 상태였지만, 내 발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한 걸음, 두 걸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눈앞의 물체가 흐릿해지고, 청각, 촉각, 그 모든 게 점점 옅어져 간다.
느껴지는 것은 그저 내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뿐. 아니, 어쩌면 그마저도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꿋꿋이 나아갔다.
나아가지 않고서 벌어지는 기적 따윈 믿지 않았기에.
피부를 넘어 근육이 파열되는 모양인지 어느샌가 무언가 뚝뚝 끊어지는 감각이 끼어들었다.
뿌득!
이윽고 날아든 마법에 의해 다리뼈가 박살 난 모양인지 휘청거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었다.
몸이 부서지는 듯한 기분이지만, 내 입가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어지는 고통이 있어서 비로소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이 느껴졌기 때문에.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 손을 뻗자 꺼칠한 감촉이 손끝에 머물렀다.
비록 시력이 옅어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로드의 피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띄엄띄엄 로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어, 이걸 뚫고 오다니 칭찬⎯ 그렇지만 내게 닿아서 뭐가 달라지⎯ 네 몸은 이미 걸레짝⎯ 그러니 내게 닿았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한낱 미물을 내려다본 듯한 목소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뼈는 부서졌고, 몸을 움직일 근육은 죄다 파열되어 로드에게 치명상을 가할 힘은 도저히 남아 있지 않았다.
하나 그게 뭐가 중요한가.
“결국에는 닿았잖아.”
“닿았다? 무슨 의미지?”
결국 이런 몸이 되고서도 놈에게 닿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다.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니까.
〈대상을 흡수합니다. 이터의 권능을 발동하겠습니까?〉
그 와중에도 뚜렷하게 떠오른 시스템 창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로드의 신체에 닿은 내 손끝에서 〈이터〉의 권능이 힘을 발했다.
내가 선택한 대상은 바로 로드가 흡수한 드래곤의 힘.
촤아아악!
내 손에서 뿜어져 나온 수백 다발의 촉수가 로드의 몸을 휘감았다.
이따금 끊어져 잘 들리진 않았지만, 그 순간 로드의 경악이 들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경악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
나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로드가 건넸었던 물음에 대답했다.
“남의 힘을 ‘강탈’하는 건 내가 더 잘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