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56화 (156/175)

제156화

내 발언에 로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내게 들은 발언으로 인해 분노했는지 한 마디로는 정의하기 묘한 표정이 되었다.

이내 상황을 정리한 로드의 얼굴에는 분노가 미약하게 깔렸다.

“감히 이 몸을 우롱하려 들다니. 인간 주제에 당돌하구나.”

“도마뱀 새끼가….”

“지금 뭐라고 했지?”

작은 목소리를 중얼거리자, 그 소리를 들었는지 로드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서 나는 검을 어깨에 걸치고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도마뱀 새끼가 왜 이렇게 혀가 기냐고, 나불거리지 말고 덤빌 거면 덤벼. 난 말로 안 해.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지.”

“인간 따위가 시건방지긴! 감히 누구 앞이라고 그런 망발을 저지르느냐!”

누가 봐도 뻔한 조롱에 주변을 둘러싼 드래곤들이 매서운 살기를 내뿜으며 일갈했다.

드래곤 피어가 공동 전체에 감돌며 따끔한 감각이 피부를 찌른다.

자신의 수장 격인 대가리가 욕을 들었으니, 분노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

하나 당사자인 로드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은 채,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공동이 웅웅 울릴 정도의 웃음소리를 냈다.

“크뢰뢰뢰뢰!! 마음에 들어, 인간이지만 정말 마음에 든단 말이지.”

“로, 로드이시여…?”

“실력이나 자신만만한 포부를 보나 어지간한 드래곤보다도 높이 쳐줄 만하군. 솔직히 말해 감탄했도다. 설령 그게 거짓부렁이라고 하더라도 이만한 존재들을 앞두고 그런 소리를 내뱉는 걸 보니 대담하구나.”

갑작스러운 태도의 변화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것도 잠시, 로드는 매서운 서릿바람을 일으키며 이쪽을 노려봤다.

“응당, 사내라면 그 발언을 짊어질 수 있어야 하는 법이지. 허울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보거라.”

로드가 날개를 활짝 펼치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드래곤들이 당장에라도 달려들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모습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결국 자기는 안 나설 거면서 나불거리긴.”

신경 쓰지 말자, 이렇게 포위한 시점에서 로드가 도발에 넘어가 일기토에 응해주리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어차피 예정된 수순.

놈들을 전부 깨부수고 이번 층을 클리어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이미 예정한 대로 상황이 돌아간다는 사실에 속이 시원했으니까.

나는 검을 어깨에서 떼고는 지면에 축 늘어뜨린 상태에서 앞장섰다. 그리고는 바짝 긴장한 둘리에게 조언을 건넸다.

“둘리야, 거긴 네가 책임지고 지켜. 이번에는 너한테까지는 신경 쓸 여유는 없을 거 같으니까.”

“아, 알겠다! 한별 이쪽은 내가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말고 싸워라!”

평소와는 달리 엄숙한 내 발언에 둘리는 사뭇 긴장하면서도 억지로 어깨를 활짝 펼쳤다.

제 딴에는 다른 드래곤들에게 기죽지 않으려는 모습 같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기특할 따름이었다.

불안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둘리라면 등을 맡길 수 있다.

그런 믿음이 있었다.

“그럼 봐주지 않고, 처음부터 전력으로.”

〈백룡 시리즈의 효과로 (존재감 은신)이 발동 중입니다.〉

〈존재감 은신을 해제하겠습니까?〉

“해제해.”

허공 위로 떠오른 시스템창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내 실력을 얕보고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부 아티팩트를 이용해 내 실력을 내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싸우게 되면 놈들도 내 기량을 알아챌 터.

그렇다면 구태여 숨길 필요는 없었다.

아티팩트의 은신 효과가 사라지자, 공동 전체에 내 힘이 용솟음쳤다.

상상치도 못한 기백에 드래곤들은 당혹스러운 얼굴을 지었다.

“어떻게 인간이 이만한 힘을….”

“상관없다! 뒤로 물러서지 마라! 어차피 놈은 인간, 망설임이 곧 실패로 이어진다!”

놈들 중에서 지휘관으로 보이는 드래곤이 고함을 지르며 분위기를 고무시켰다.

하나 늦었다.

곧바로 놈의 배후에 파고든 다음, 검을 휘둘러 놈의 날개를 찢어발겼다.

“좋은 판단이야. 그런데 틀렸어. 내 힘을 알았다면 망설이지 말고 덤볐어야지.”

한 찰나를 다루는 전장에선 망설임은 곧 독이다.

‘날개는 곧 기동력.’

기동력을 잃으면 나한테 불리한 공중전을 뺏을 수 있다.

나는 포켓에서 창을 꺼내, 놈의 심장을 향해 투창했다.

피슈우우웅!

허공을 가르며 빠르게 나아간 창은 놈의 비늘을 파고들어 심장을 찔렀다.

“크윽…. 네, 네 이놈!”

하나 명색이 드래곤이라고 심장이 찔렸음에도 불구하고 놈은 다시 일어났다.

곧바로 반격을 계획한 모양이었지만, 그보다도 빠르게 놈의 심장에 박힌 창에 다가가 검을 해머로 변환한 후 있는 힘껏 내리찍는다!

콰득, 얕게 박힌 창은 충격이 전도되어 심장에 깊숙이 박혔다.

초월한 신체를 지녔다고 불리는 드래곤이니 이걸로 죽지는 않을 테지만, 움직임을 무력화시키기에는 충분한 일격이었다.

‘아쉽긴 해도, 이걸로 만족해야지.’

나는 입맛을 다시며 쓰러진 드래곤을 내려다봤다.

짧은 순간에 습격을 감행해 거둔 성과라곤 해도 에이션트급을 무력화시킨 것은 크나큰 이득이었다.

충분한 성과였다.

증거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드래곤들은 이쪽을 바짝 경계했으며, 로드는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경계심이 짙어진 만큼, 방금 전과 같이 습격을 반복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내 힘은 드래곤에게도 충분히 통한다는 뜻이니까.

나는 검지를 들어 올리며 카운팅했다.

“우선 한 마리.”

* * *

‘전부 설명해줘야겠어. 굳이 캐묻겠다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같이 쫓기는 처지에 이 정도는 알아둬도 이상할 게 없잖아.’

처음에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그 생각을 고쳐먹기까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우선 한마리.’

아델은 바로 직전에 꺼낸 목소리를 떠올리며 숨을 죽였다.

증오스러운 로드가 몇 마디를 주고받는가 싶더니, 아저씨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였다.

다른 드래곤들 역시 곁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인해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거봐, 방금 전까지만 가득했던 자신감은 어디 가고. 아저씨랑 싸우는데 바짝 긴장한 모습이잖아.

저게 그 콧대 높은 드래곤의 말로라니, 꼴이 우스울 따름이다.

“그래도 쉽지 않아.”

아델은 전황을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아저씨가 우세를 점했다고 해도 그게 곧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분명 아저씨도 충분히 강했지만, 다른 드래곤도 그와 맞먹는 강자.

게다가 뒤에는 로드가 건재하게 버티고 있었다.

적들도 우수수 쓰러졌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저씨의 몸에도 얕고 깊은 상처가 하나하나 새겨졌다.

그래도 전투에서는 우위를 점하고 있을 테지만, 시간이 지나도 가슴 한 켠을 옥죄이던 찜찜한 기분은 그대로였다.

나를 그리고 우리 가족을 학살한 주범이 울컥 피를 토하고,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연달아 쓰러진다.

꿈에서조차 바라고 바랐던 일이었지만, 통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왤까?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쯤, 옆에 있던 둘리가 버럭 소리를 외치며 뒤로 물러섰다.

“아델! 위험하다! 적이다!”

머릿속에서 경종을 울리는 외침에 고개를 불쑥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포위망에서 벗어난 드래곤이 이쪽을 향해 쇄도했다.

다른 드래곤과는 달리 아저씨와의 전투를 벌이지 않았는지, 멀쩡한 모습이었다.

적 중 한 명이 이쪽으로 왔음에도 아저씨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그 모습에 아델은 둘리의 등을 붙잡고 외쳤다.

“뚱, 뚱뚱보! 위험해! 어서 도망을….”

“둘리는 도망 안 간다!”

“그게 무슨 소리야! 위험하잖아. 그러니까 어서….”

버럭 소리를 외쳤지만 둘리는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순간이었지만, 둘리의 눈빛은 아저씨와 겹쳐 보였다.

그리고.

적이 이쪽을 향해 아가리를 벌렸을 찰나, 둘리에게서 강력한 에너지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새하얀 증기가 사방으로 뿜어졌다.

증기가 가시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둘리가 서 있던 자리에는 우람한 덩치의 블랙드래곤이 서 있었다.

외견도, 덩치도, 느껴지는 기백마저 딴판이었으나 아델은 한순간 알아차렸다.

눈앞의 드래곤이 바로 둘리라는 것을.

“여긴 내가 맡았다!”

둘리는 버럭 소리를 외치더니, 강렬한 브레스를 뿜었다.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적은 뒤로 물러서며 이쪽을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뚜, 뚱돼지가 정말로 드래곤이었어?’

아델은 눈을 끔뻑끔뻑 뜨며 둘리를 올려다봤다.

항상 입버릇처럼 자신은 블랙드래곤이라고 했지만, 그게 정말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아저씨에 둘리까지.

예상치 못한 전력에 놀라고 있는데, 둘리는 공주님 안기를 하며 버럭 외쳤다.

“아델! 여기에서 이탈한다!”

“어디로 갈 거야?”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묻자, 둘리는 눈을 번뜩 빛내며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드디어 찾았다! 세계수의 뿌리를!”

* * *

“둘리야. 정말이야? 세계수의 뿌리를 찾은 건?”

“그렇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밑으로 가면 된다! 이번엔 확실하다!”

둘리의 외침에 나는 확신을 더 했다.

세계수에 진입하기 전에 녀석에게는 세계수의 뿌리를 찾아보라고 언질을 줬었다.

나라면 몰라도 감이 좋은 녀석이라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지녔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적중했다.

둘리가 가리킨 방향으로 가면 갈수록 세계수 내의 마나가 점점 짙어져 갔다.

이는 세계수의 심장부로 가고 있다는 뜻.

대개 모든 나무가 그렇듯 뿌리를 잃은 식물은 죽게 된다.

그리고 이는 세계수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몰라 아델에게 교차 점검을 받은 사실이니 확실하리라.

상당한 두께의 토벽으로 막힌 벽을 뚫고서 지하로 파고들자, 이전보다 광활한 공동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밑에는 천장에서부터 뿌리내린 뿌리가 지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저것만 처리하면 모든 게 끝이야.’

아델의 일족에 대한 굴레를 끊을 수 있으며, 다음 층으로 등반하기 위한 히든 조건도 클리어할 수 있다.

뿌리에 점점 다가가자, 뒤따라 따라온 드래곤과 로드의 모습이 천장에 드리웠다.

우리가 세계수의 뿌리에 접근했다는 사실에 놈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뿌리를 끊어버리면 놈들의 터전은 끝장이기에.

내가 세계수의 뿌리에 다가가자, 어깨에 큰 부상을 입은 드래곤이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멈춰라! 그걸 끊어버리면 드래곤의 명이 끝이라는 건 마녀 너도 잘 알 텐데! 그래, 네 목숨이 그리고 네 일족의 피가 희생되었다는 건 우리 역시 잘 알고 있고 또 통감하고 있다. 하지만 그 뿌리를 자르면 드래곤 전체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사실을 정령 모르겠단 말인가? 한 명의 희생 혹은 전체의 몰살 어느 것이 가치가 더 큰지 모르겠더냐!”

드래곤의 눈빛에는 거짓은 보이지 않았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원치 않는 피에 의해 세워진 세계?

지금의 내 행동에는 정답은 없었다.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 누구든 정의가 될 수 있었으며. 또, 악당이 될 수도 있다.

정의란 매우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문제기 때문에.

하나,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세계수의 뿌리를 향해 검을 세차게 휘두르며 말했다.

“인간일 뿐인 내가 드래곤의 사정 따윈 알 게 뭐야.”

나는 굉장히 제멋대로고 이기적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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