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59채널- 43층 전용 채널〉
- 하… 43층 오자마자 드래곤 뭔데
⤷ 드래곤이 바퀴벌레처럼 무한증식한다고 ㄹㅇㅋㅋ
- ㅁㅊ 드래곤하고 만나자마자 바로 적대하는데
⤷ ㄷㄷ 어케 살았누
⤷ 이번 층에서 드래곤한테 죽은 애들 개 많음
- 엥? 유채아나 다른 플레이어들은 드래곤하고 친하게 지내던데 그건 뭐임?
- 들었는데 42층 클리어하면 드래곤하고 친화도 만렙이라던데
⤷ 그럼 우리가 쫓기는 것도 42층 안 가서 그런 것임?
⤷ ㅇㅇ 그걸 이제 알았냐ㅋ
- 누가 칼 들고 42층 가지 말라고 협박함?ㅋㅋㅋㅋ 호구쉑
⤷ 긍까ㅋㅋㅋ 탑 한두 번 겪냐
- 그러고 보니 신협도 42층 깨지 않았음? 아까 전에 보니까 드래곤하고 싸우던 거 같던데
⤷ 어허! 그분은 드레곤슬레이어의 숙명을…(중략)
⤷ ㅂㅁㄱ
* * *
언제일까.
지금은 기억조차 흐릿한 먼 옛날.
첫 기억은… 그래, 가족의 따스한 손길이었다.
“아델, 너는 우리와는 달리 행복하게 살렴. 그리고 자유롭게 말이지.”
언젠가 건네준 부모의 이야기, 당시까지만 해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과 다 같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또,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기에.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바램과는 달리 가족은 점점 줄어갔다.
악의를 지닌 이들에 의해서 짓밟혔기 때문에.
“크뢰뢰! 허튼 짓거리를 하긴. 너희 일족은 드래곤 전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너희가 있어 대지는 더욱 비옥해지지. 그러니 나를, 드래곤을 위해 너희의 심장과 영혼을 바쳐라!”
욕망을 지닌 새빨간 안광이 번뜩인다.
그 눈빛은 이윽고 새붉은 선혈이 되어 몰아닥쳤다.
한 명.
또 한 명.
또… 또 한 명.
그토록 아끼던 가족이 끝없이 줄어져 간다.
혼자 두고 떠나지 말라고, 손을 뻗었지만 짤막한 팔은 닿을 리가 없었다.
모두가 곁을 떠나고, 마침내 외톨이가 되었을 때쯤 새빨간 안광은 가까이 다가왔다.
“마지막 한 놈인가? 쯧, 서둘러 대안을 찾아봐야겠군. 그전까지 이놈은 죽이지 말고, 천천히 짜내듯 소모하도록. 드래곤의 안녕을 위해서 말이지.”
새빨간 안광은 철저히 소모품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흘겨보며 말했다.
철컹!
그 말을 끝으로 차가운 철창이 닫히며 암흑이 도래했다.
항상 암흑 속을 지탱하고 버티던 가족은 이젠 온데간데도 없었다.
그날부로 아델의 세계는 멸망했다.
* * *
“아델, 슬슬 일어날까.”
“으음… 아저씨? 갑자기 어딜….”
“어디긴. 충분히 쉬었으니까. 다시 움직여야지. 갈 길도 멀고 하니까.”
아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잠에서 깨우자, 녀석은 눈가를 비비다 말고 벌떡 일어섰다.
“아, 맞다! 벌써 세계수 안에 들어왔었지. 헤헤, 미안 잠깐 잠들었어.”
“움직일 순 있고?”
“물론, 충분히 잤어.”
내 물음에 아델은 씩씩하게 대답하며 손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근육은 없어서 나오는 건 젖살밖에 없었으나 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열심히 하려는 의지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예 아무것도 안 하려는 놈도 있는데 뭘.
“한별, 벌써 움직이나? 조금 더 쉬었다 가도 될 것 같은데.”
마찬가지로 뒤에서 누워있던 둘리가 섭섭하다는 듯이 입을 다셨다.
“그럼 두고 갈 테니까. 혼자서 느긋이 쉬다가 오던지.”
“아, 아니다! 둘리도 한별을 따라가겠다!”
상관없다는 듯이 앞장서자, 둘리는 허둥지둥 일어났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작은 해프닝을 뒤로하고 세계수의 안을 거닐며 호기로운 눈빛을 지었다.
“세계수의 안이라고 해서 탄광처럼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완전 상상 이상인데?”
그도 그럴 게.
세계수의 내부는 맑은 공기와 풍족한 마나, 그리고 어두운 곳을 비추는 빛의 정령까지 모든 게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드래곤의 피를 기반으로 형성된 땅이라곤 못 믿을 정도로 말이다.
“흥, 그래봤자 불타면 석탄이야. 로드의 공간은 이보다도 더 안쪽에 있어.”
아델은 도리어 불쾌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그러뜨렸다.
“아마도 우리가 침입했다는 건 로드도 알아차렸을 테니까.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
“네 말대로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르겠는데.”
말꼬리를 끊고 앞으로 나서자, 아델은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놈들의 아지트에 침범한 이상, 쉽게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상정했던 일이다.
하나 상대가 초장부터 강수를 쓸 거라곤 예상치 못했을 뿐이지.
“둘리야. 아델은 네가 책임지고 보호해. 여기서부턴 나도 어떻게 될진 모르니까.”
“알겠다 한별!”
내 목소리가 사뭇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둘리는 밖에서 꺾어온 나무막대기를 든 채, 바짝 경계했다.
긴장감이 절정에 치달을 찰나, 이변이 일어났다.
쿠구구궁!
땅이 쩌저적 갈라지더니, 이내 강력한 폭발과 함께 지면이 무너져 내렸다.
일순 발을 디딜 곳이 없어지게 되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둘리는 아델을 붙잡은 채 날개를 이용해 하늘로 떠올랐다.
“하, 한별!”
“내 걱정은 말고, 네 걱정이나 해!”
“알았다!”
내 외침에 둘리는 날개를 파닥거리며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일단 둘리는 해결된 거 같은데, 역시 상대의 목적은 나부터인가 보네.
둘리를 향한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시선을 밑으로 떨구자 급속히 낙하하는 풍경 속에서 거대한 아가리가 눈에 들어왔다.
유황 냄새가 풍기는가 싶더니, 강렬한 에너지가 소용돌이쳤다.
에너지는 일점에 응축함과 동시에 유황과 만나며 강력한 파괴력을 일으켰다.
‘브레스인가.’
고민하고 있을 찰나는 없었다.
또, 느긋하게 대응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기에 서둘러 검의 형태를 최대한 납작한 형태로 변경시킨 상대에서 앞을 가로막았다.
그와 동시에 브레스가 작렬한다.
“윽…!”
강렬한 충격 속에서 최대한 방패의 형태를 구현한 검을 붙잡았다.
급하게 형태를 만들어내서 그런지, 검은 측면에서부터 가루가 되기 시작했다.
브레스가 완전히 검의 형태를 부서뜨리기 직전.
서둘러 클레어모어로 검을 변경한 다음, 떨어지는 가속력에 더해 있는 힘껏 세로로 내리그었다.
촤아악!
브레스가 절반으로 상쇄되며 나는 놈의 얼굴을 절반으로 세차게 휘둘렀다.
“끄아아아악!”
얼굴의 반 틈이 싹뚝 썰려나가자 드래곤은 고통에 물든 비명을 내지르며 비명을 내질렀다.
놈의 혈흔의 일부가 피부에 닿자, 연기와 함께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독? 산성? 아니… 둘 다 해당하나.’
드래곤의 피가 포션으로도 사용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는데, 역시 거짓말이었나. 아니, 이독제독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니 잘만 사용하면 회복약으로도 쓸 수 있지 않을까.
뭐, 이런 고민도 지금으로선 별 영양가는 없지만 말이다.
나는 고개를 내저어 상념을 꺾어낸 다음, 놈의 목에 검을 틀어박았다.
이미 중상인 상처에 결정타를 가하자 이곳을 습격한 드래곤은 숨을 잃고는 즉사했다.
검에 묻은 혈흔을 떨쳐내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둘리가 다가왔다.
“한별 고생했다!”
“자칫하면 위험할 뻔했어. 이놈은 에이션트급인가.”
덩치를 보니 그쯤 되는 것 같았다
역시 에이션트급 드래곤쯤 되면 이전에 조우했던 웜급 드래곤하고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강함이었다.
방심했다면 당했을지도 몰랐을 정도로.
‘그나마 경계해서 다행이지.’
상처 부위에 포션을 뿌리고 있을 때쯤, 곁으로 다가온 둘리가 쓰러뜨린 드래곤을 툭툭 치며 되물었다.
“한별, 이놈의 드래곤 하트도 챙겨갈 건가?”
누굴 닮았는지 속물에 찌든 둘리의 발언에 나는 폭소했다.
뜬금없이 웃음을 터뜨리자, 둘리는 의아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나는 날이 나간 검을 변형한 뒤, 녀석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마음 같아선 챙기고 싶은데, 과연 저 녀석들이 그걸 내버려 둘진 잘 모르겠는데.”
“저 녀석들이라니?”
내 손짓에 둘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 순간 사방에서 드래곤피어가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새빨간 안광이 어둠 속에서 번뜩거렸다.
하나라면 모를까.
적어도 열 명이 넘는 기척.
나는 둘리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치며 말했다.
“그렇게나 자존심이 높은 것들이 인간을 상대로 이깟 함정이나 준비한 걸 보니까. 드래곤의 명성은 엿이나 바꿔먹었나 봐.”
“자존심이라고 부르니 어감이 별로 안 좋구나. 신중한 걸로 해두면 안 되겠나.”
“누가 그랬지. 신중한 것과 겁쟁이는 한 끗 차이라고.”
비아냥거리는 내 어조에 상대는 콧방귀를 뀌었다.
비록 새까만 어둠 속이라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느껴지는 기척만으로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까지 만난 드래곤과 비교해도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기백.
그 기백 앞에서 아델은 부르르 떨었다.
“로, 로드….”
“어이쿠, 마녀가 여기까지 행차하셨군. 그 행동은 가상하게 여기지만 거기까지다. 포기하도록.”
로드의 발언에 썩 좋지 않은 기억이라도 떠올린 모양인지 아델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어릴 적 트라우마라도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분명 힘들 테니까.
대신해서 내가 앞으로 나서려는데, 그 순간 아델은 앞서 나가려는 내 손가락을 붙잡았다.
“결심했어. 여기까지 동행을 부탁했는데, 무섭다는 이유로 뒤로 빠지진 않을 거야.”
아델은 식은땀을 흘리며 한 발자국 앞으로 뻗었다.
미약한 한 걸음이었지만, 그건 아델이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뻗은 자신의 의지였다.
로드는 한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이쪽을 조롱했다.
“마녀여, 네 승산은 없다. 만일 네 도우미가 그쪽에 있는 한낱 볼품없는 미약한 인간이라면 더더욱 말이지.”
“과연 그럴까?”
“인간이 허풍은….”
“글쎄, 두고 보면 알겠지.”
너스레를 떨며 손가락을 튕기자, 공동 전체에 드리운 짙은 흙먼지와 함께 상공에서 떨어진 잔해가 강풍에 쓸려나갔다.
흙먼지가 가시자, 머리가 떨어진 에이션트 드래곤의 모습이 드리웠다.
방금 전에 내가 쓰러뜨린 드래곤의 시체.
그 광경을 지켜본 로드는 입을 벌리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 어떻게 인간이…. 설마 힘을 숨기고 있었나?”
“글쎄, 신중하다면 그것까지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