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54화 (154/175)

제154화

“전부 설명해줘야겠어.”

내 물음에 아델은 숨을 죽인 채 이쪽을 바라봤다.

무어라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망설임이 가득했다.

말하기 주저하는 모습에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굳이 캐묻겠다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같이 쫓기는 처지에 이 정도는 알아둬도 이상할 게 없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채, 드래곤한테 쫓기는 것도 억울하기도 하고.

기나긴 고심 끝에 수긍한 모양인지 아델은 굳게 결심한 듯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봤다.

“아… 아저씨라면 알려줄 수 있어. 그리고 저기 돼지한테도.”

“둘리는 돼지가 아니… 읍읍!”

이어진 아델의 발언에 둘리가 발끈하고 나섰지만, 분위기를 초치기 전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 모습에 아델은 움찔했으나 괘념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드래곤 놈들이 말해서 알고는 있겠지만, 난 희생양이야.”

“희생양이라면?”

이전에도 들은 바가 있었으나 짐작되는 바가 없었다.

무엇을 위한 희생양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을 때쯤, 아델은 무신경한 눈빛으로 세계수를 바라봤다.

“나는 드래곤을 위한… 그리고 저주받은 나무를 위한 희생양이야.”

* * *

그 뒤로 아델은 감정을 꾹꾹 눌러가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탑의 수많은 장소와 다양한 사람을 만난 나조차도 헛구역질이 나올만한 내용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천 년 전까지만 해도 드래곤이 사는 이 숲속은 메마른 대지로 몹시도 척박했다고 한다.

드래곤인 그들조차도 숨을 쉬기 힘든 대지.

그들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을까.

어느 날 하늘에서 영롱한 기운이 담긴 씨앗이 떨어졌다.

‘세계수의 씨앗.’

하늘에서 떨어진 씨앗은 점점 성장해, 척박한 땅의 양분이 되어 지금과 같이 기름진 대지로 만들었다.

하나 그 행복은 영원치만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세계수는 시름시름 시들어갔다.

그런 세계수를 보며 걱정한 당대의 드래곤로드는 미친 결론을 내렸다.

대지의 힘을 이어받은 드래곤이 세계수의 거름 그 자체가 되면 살아나는 게 아닐까 하는 결론을 말이다.

‘또라이 같은 발상이네.’

정상적인 지식과 발상을 지닌 자라면 상상하기도 힘든 사이코패스 같은 발상.

그렇지만 놀랍게도 그 발상은 해결책이 되었다.

척박한 땅에 세계수가 거름이 되고, 그렇게 야위어진 세계수에 드래곤이 거름이 된다.

말도 안 되는 사이클.

그리고 그 희생양으로 아델의 일족이 선택받은 듯했다.

이러니저러니 포장해도 드래곤의 피로 만든 곳에 드래곤이 기생하는 형태밖에 되지 않았다.

“난 우리 일족의 마지막 남은 드래곤이야. 그래서 완전히 희생양으로 삼는 대신에 일정 주기로 드래곤하트를 세계수에게 갉아 먹혔을 뿐이지. 이게 전부야 들어서 만족했어, 아저씨?”

“…….”

마치 타인의 일인 양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아델을 보고서 할 말을 잃었다.

오랜 기간 의식장에서 놈들을 위한 희생양으로 인격, 신체, 인생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고 세뇌받으며 말이다.

사건의 전말을 듣고서 나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아저씨도 마찬가지지? 이런 이야기를 들어서 좋아할 사람은 없어 그게 설령 드래곤이라고 해도.”

“…….”

“그렇잖아. 드래곤로드를 비롯해 이곳에 사는 드래곤과 전부 맞서 싸워야 한다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모르는 척하는 게 낫잖아. 그러니 지금이라도 괜찮으니까. 난 내버려 둬.”

아델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나는 보란 듯이 조소를 흘렸다.

웃음을 참지 않고 내뱉자, 아델은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우뚝 웃음을 멈춘 채, 녀석을 응시했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어. 그건 안 물어봤잖아.”

“내가… 어떻게 하고 싶냐니?”

“어차피 세계수는 네가 그리고 네 일족이 없었다면 그뿐인 운명이야. 그러니 세계 역시 너 하기 나름이지. 원한다면 거기까지 데려다줄 순 있어.”

내 말에 아델은 벙찐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아, 아저씨 미쳤어? 상대는 드래곤이라고, 그것도 로드급 드래곤이야. 그런데 어째서….”

“그래서 상대가 로드니까. 지레 겁먹고 도망가라고? 그런 헛소리는 때려치워.”

나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눈을 부라렸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상대해왔다.

그게 설령 드래곤이라도 달라질 일은 없었다.

게다가.

“아까 전에는 드래곤하트를 얻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그 대신에 로드급의 드래곤하트라면 꽤 욕심나는데.”

“정말… 미쳤어, 아저씨. 또, 완전 제멋대로고.”

아델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그 모습에 나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 원래 얻고 싶은 건 꼭 손에 얻어야지. 직성에 풀려서 말이지.”

나는 구름의 너머까지 높게 솟아난 세계수 향해 팔을 뻗고는 이내 손은 불끈 쥐었다.

목표도 정해졌겠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 * *

세계수의 심층.

일명 성지라 불리며 삼엄한 경비로 가득한 공동 속에서는 차가운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주변으로 퍼져나간 한기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며 서리를 일으켜냈다.

드래곤마저 추위에 떨 한기 속에서 새하얀 생명체가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주변을 둘러싼 드래곤들은 전신을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로, 로드이시여.”

“지금 뭐라고 했지? 그 마녀가 의식장에서 도망을 쳤다고? 그게 정령 사실인가?”

“죄, 죄송합니다.”

모든 생명체의 우위를 점하며 남 앞에서 고개를 떨구는 법이 없는 그들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도마뱀이라도 된 것마냥 몸을 바짝 웅크러뜨렸다.

숨 쉬듯 익숙한 비열한 모습에 로드라 불린 드래곤은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크뢰뢰, 다시 들어도 재밌는 이야기로군. 그래서 그 마녀가 도망쳤다는 것도 우습지만, 그 범인이 고작 인간이라니.”

“…….”

“그리고 인간에게 당했다는 것도 재밌고.”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드래곤이 어렵듯 더듬거렸다.

“의, 의식장의 경비를 맡은 녀석들은 이곳에서 퇴출시키겠습니다.”

“암, 당연한 수순이다. 고귀한 드래곤의 품위를 떨어뜨린 놈들한테는 그것조차 분수에 맞지 않게 가벼운 벌이니.”

“로드께서 베풀어주신 이 은혜! 다시는 이러한 실수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흐음, 만일 이러한 실수가 다시 생긴다면?”

눈썹을 들썩이며 로드가 다시 묻자, 그 앞에 있던 드래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한 질문을 건네는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서.

“그… 그땐 저도 같이 퇴출을….”

“아니지.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이나 실수한 자에게 자비를 달라는 건가?”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목소리와는 달리 서슬 퍼런 살기가 공동 전체를 메꾸었다.

가공할만한 압박감 속에서 드래곤은 몸을 부르르 떨며 가까스레 입을 열었다.

“모, 목숨을 걸겠습니다.”

대답을 듣고서야 만족한 로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무사히 넘어가려나 하던 그 찰나였다.

쿠구궁!

강렬한 파철음과 함께 지면이 울리는가 싶더니,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드래곤들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들 호들갑을 떨었지만, 로드는 예상하였다는 듯 태평하게 되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 그것이… 로드! 세계수에 인간이 침입해왔습니다.”

“그런가.”

로드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앞에 있던 드래곤은 내려다보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약속한 두 번째로군.”

* * *

불과 1시간 전.

둘리의 진두지휘 아래에 세계수에 도착한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리야 여기가 맞아?”

“맞다! 분명 여기서 입구가 있다는 감이 느껴졌는데…….”

내 물음에 둘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세계수를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아델의 이야기에 의하면 로드는 세계수의 안에서 둥지를 틀고 있다고 했었다.

그래서 세계수에 들어올 수 있는 드래곤도 손에 꼽을 만큼 극히 소수.

어쩌면 둘리의 직감을 이용한다면 입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음… 입구가 어디에 있는진 잘 모르겠다.”

한참 동안 덩굴을 치우면서 주변을 살피던 둘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사실은 모르는데, 있다고 거짓말한 건 아니지?”

“아, 아니다! 둘리가 그럴 거로 보이는가! 아니면 한별도 한번 찾아봐라!”

말을 더듬는 게 영 수상했지만, 완강하게 부정하는 걸 보니 정말로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거짓말은 아닌 거 같은데….

실은 내 직감에도 이곳에서 묘한 느낌이 느껴지기도 했고.

난처해하고 있을 찰나, 뒤에서 따라오던 아델이 덩굴로 가득 얽혀 있는 벽을 손짓하면서 말했다.

“저기야. 저기로 가면 출입할 수 있는데, 지금은 로드의 마법으로 막혀 있어.”

“그래?”

아델이 언질 주기 전까지만 해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알아채고 나서 보니 다른 곳에 비해 유난히도 어색한 느낌이었다.

뒤늦게 둘리가 덩굴을 손톱으로 찢으려 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물리 공격은 튕겨 나갔다.

땅바닥에 한 바퀴 구른 둘리의 모습에 아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푸흡, 조심해, 말해주는 걸 깜빡했는데 그거 로드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거라 어지간한 공격은 튕겨내거든.”

“그걸 왜 지금 알려주나!”

“그야 안 물어봤잖아. 물어봤으면 알려줬지. 푸웁!”

일부로 골려 먹으려는 듯 웃음을 터뜨리는 아델과 씩씩거리며 성을 내는 둘리.

제 나이에 맞게 어린 애들이 벌일만한 행동에 나는 옅은 웃음기를 지었다.

항상 둘리에게는 친구를 못 만들어줘서 아쉬웠었는데.

둘 다 편하게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나는 티격태격하는 녀석들을 뒤로하고 검을 뽑아 덩굴을 향해 다가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를 지켜보던 아델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아, 아저씨 무력으로는 소용없으니까. 여기에서 다른 드래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

아쉽지만 아델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보다도 빨리 이변이 벌어졌기 때문에.

서걱!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덩굴이 싹둑 베이며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광경에 아델은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미, 미첬어. 로드가 사용한 마법을 이렇게 쉽게….”

나는 넋을 잃고 중얼거리는 아델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설명은 끝났나? 그럼 가도록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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