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가공할 만한 압박감이 온몸을 옥죄어왔다.
마치 송곳 위를 걷는 듯한 기분마저 들게 하는 힘.
와이번이나 이무기와는 달리 순도 100%의 초월자의 피를 지닌 드래곤만 낼 수 있는 권능이었다.
‘드래곤이 확실하네.’
저런 힘을 낼 수 있는 강자는 드래곤 이외에는 존재할 리가 없다.
상대의 정체를 깨닫자, 내내 의문을 갖고 있던 퍼즐이 맞춰졌다.
“감옥의 규모가 이상하게도 크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였나 보네.”
감옥에 수감될 상대가 드래곤이라고 치면 그만한 규모와 크기를 자랑해도 이상할 게 없다.
드래곤의 신체 크기에 맞췄을 테니까.
문득 시선을 돌리자, 바짝 긴장한 둘리와 그에 반해 무표정인 아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둘리는 그렇다 쳐도 아델은 이미 상정했다는 듯한 기색.
‘글쎄….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일종의 산제물이라고 들었어.’
문득 일전에 아델이 꺼냈던 발언이 떠올랐다.
그때는 산제물이라고 해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었지만, 지금 보니 거대한 의문이 떠올랐다.
‘드래곤의 산제물이면… 도대체 뭐야.’
플레이어와 NPC 사이에서 일컬어지는 드래곤의 존재는 단신으로도 지형과 날씨를 바꾸고, 심지어는 생명체의 조물주로서 불린다.
그야말로 재앙이자 수호신.
그만한 존재가 산제물을 바칠 정도의 일이라….
‘히든 조건이 떠서 어지간히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상상을 초월하는데.’
그래도 상관없다.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래봤자 탑의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탑의 타도를 목표로 하면서 고작 드래곤 따위한테 겁을 먹고 있을쏘냐.
“그렇다곤 해도 드래곤하고 정면 대결이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란 말이지.”
놈들의 드래곤 하트가 대단히 욕심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정면 결투는 사양이다.
가령 드래곤을 쓰러뜨린다고 하더라도 둘리와 아델의 생존은 보장할 수 없었다. 또, 놈들의 전력을 확실히 알 수 없기도 하고.
히든 조건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이곳을 돌파할 필요가 있었다.
‘눈에 보이는 드래곤은 총 일곱 마리인가.’
크기를 봐서는 전부 웜급 드래곤, 무력으로 강행 돌파하기에는 충분했다.
“너희 중에 에이션트급이 없었다는 걸 불행으로 여겨라.”
“크뢰뢰! 하등한 인간 주제에 건방지군. 의식장에는 어떻게 숨어 들어가 마녀를 데리고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여기를 지키는 이상 네놈들한테는 승산은 없다!”
“인간의 자신감치고는 볼만하곤, 아량을 베풀어 아프게 않게 보내주도록 하마.”
내 발언에 드래곤들은 고자세에서 내려다봤다.
보잘 것 없다고 여기며 이쪽을 깔보는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별 기대도 안 했다.
높은 지위에 올라 자신이 최고라고 여기는 자들이야 지금껏 여럿 봐왔으니까.
결국 지고의 존재라고 불리는 드래곤조차도 인간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좋은 일이다.
적을 깔보고 방심하는 상대에게 한 방 먹이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기에.
“둘리, 아델 여길 돌파할 테니까. 떨어지지 않게 꽉 붙잡아.”
“여길… 돌파할 거라니? 거짓말, 저기에 드래곤들이 있는데 어떻게….”
내 말에 아델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내게 되물었다.
무얼 시도해보기도 전에 망연자실한 모습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당사자가 의기소침해진 상태에서 내가 무슨 말을 꺼내든 신뢰를 얻기는 힘들 것이다.
녀석한테는 미안하게 됐지만, 무력으로도 데리고 가야 하나.
그런 생각에 고민하고 있을 찰나였다.
“한별이라면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한별만 믿어라!”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둘리가 대뜸 나섰다.
적들의 압박감에 자기도 창백해진 주제에 주먹을 불끈 쥐어 허공에 내찔렀다.
“한별이 실패하면 내가 지켜줄 테니까 둘리에게 맡겨라!”
“푸웁, 배만 불룩 튀어나온 땅꼬마 주제에 자신만만한 척하긴. 알겠어, 너희만 믿고 갈게.”
둘리의 모습에 용기를 얻었는지, 아델은 배시시 웃으며 내 옷깃을 잡았다.
그리고 뒤늦게 내 품에 안겨드는 둘리까지.
한 손으로 두 명을 안아 든 뒤, 나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미리 봐둔 탈출로를 곁눈질로 확인한 다음, 생명의 반지를 발동하자 우리의 모습이 주변과 동화되며 투명해졌다.
“어디 갔지?”
“……!”
멀쩡히 있던 내가 사라지자, 일순 드래곤은 당황한 목소리를 자아냈다.
그 틈을 이용해 탈출로를 통해 돌파하려고 했으나 놈들 역시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쯧, 인간 따위가 눈속임이나 부리긴. 그까짓 속임수에 속아 넘어갈 법 싶더냐!”
은색 갈기가 인상적인 드래곤은 두 눈을 번뜩이며 이곳을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며 빠르게 쇄도하는 손톱에 나는 혀를 내두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촤아악!
검과 손톱이 부딪히며 새빨간 불사르기가 튀었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검을 대각선으로 비틀자, 놈의 손톱은 내 뺨을 스쳐 지면에 틀어박혔다.
엄청난 충격이 지면을 강타하면서 거대한 규모의 크레이터가 발생했다.
덩달아 아티팩트에도 충격이 전해지면서 투명화가 해제되었다.
상정한 부분이었기에 당황할 것은 없었다.
나는 곧바로 검을 대검으로 바꾼 후, 앞질러 오는 드래곤의 목을 그었다.
가능한 힘껏 베었지만, 비늘에 막히며 도리어 검이 튕겨 나갔다.
날이 나간 검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검이야 다시 바꿀 수 있으니 상관없다.
다만.
드래곤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아예 목을 베어버릴 생각이었는데, 내 계획과는 달리 드래곤은 멀쩡했다.
더욱 정확하게는 피부와 근육이 베이며 그 안에 존재하는 새하얀 피가 드러났으며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을 뿐.
일반적인 인간이었다면 그것만 해도 즉사겠지만, 초월한 신체를 지닌 드래곤한테는 죽음에 달하는 피해는 아니었다.
고작 몇 개월을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는 상처.
‘둘리네를 안고 있어서 전력은 못 냈다고 쳐도 이건 좀 아쉬운데.’
웜급 드래곤을 무력화시키는 게 고작이라니.
시큰둥한 내 반응과는 달리 드래곤은 눈을 부릅뜨며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인간이 어떻게 우리의 목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쳇, 힘을 숨기고 있었나.
놈들은 눈을 부라리며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방금 전까지의 반응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
〈백룡 시리즈의 효과로 (존재감 은신)이 발동 중입니다.〉
‘어쩐지 태도가 확 변했다 싶었는데, 그런 이유에서였나.’
시스템창을 읽어보니, 세트 네 개를 수집하면서 새로운 효과가 생긴듯했다.
능력은 적이 내가 지닌 힘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일종의 권능.
〈존재감 은신을 해제하겠습니까?〉
연이어 떠오른 시스템 창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해제하지 마.’
적들에게 구태여 전력을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필요하다면 모를까. 굳이 경계심을 부추길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경계심 대신에 분노를 부추기기로 했다.
“잘 모르겠는데, 그냥 너희들 감이 도마뱀 수준에서 그친 것뿐 아니야. 그걸 남의 탓을 하면 쓰나. 아, 마음의 그릇도 도마뱀 수준이라서 그런가?”
적당히 너스레를 떨며 도발을 하자 그들은 살기를 내뿜었다.
“인간이 뚫린 입이라고….”
살이 저릿저릿하기까지 한 분위기.
‘도마뱀이 콤플렉스였나.’
하긴 멀쩡한 사람보고 영장류라고 부르는 꼴이니 당연한 셈인가.
드래곤이라는 프라이드를 지닌 그들한테는 그보다도 더한 욕이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크레이터 사이를 도약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미안하게 됐지만, 더 이상 그들에게는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장난도 끝이다.
이터의 권능을 사용해 지면을 흡수하자, 일순 발을 디딜 곳이 소멸한 드래곤들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지면을 박차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제, 젠장…. 마녀가…!”
“어서 로드께 이 사실을 전해라! 의식을 앞두고 마녀를 잃으면 안 된다!”
뒤에서는 처절한 드래곤들의 외침이 메아리칠 뿐이었다.
* * *
무사히 포위망을 뚫고 감옥에서 벗어난 직후.
우리는 은신처로 삼기 위해 수십 년간 인적이 끊긴 것 같은 동굴 속으로 들어섰다.
동굴의 내부에는 강력한 마나의 흐름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과거에 드래곤이 거주하고 있다가 버린 둥지인 듯했다.
“으싸! 한별, 불은 어디서 때우면 되나?”
동굴 안을 샅샅이 살펴보는데, 둘리가 양손에 장작을 가득 짊어지고 와서 되물었다.
나는 손을 들어 둘리의 행동을 저지했다.
“불은 때지 마. 우리의 위치를 특정해서 추적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아! 그런가. 이해했다!”
기껏 갖고 온 장작이 쓸모없다는 사실에 실망한 모양인지 시무룩해졌지만, 억지는 부리지 않았다.
녀석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듯싶었다.
다음에 드래곤들과 맞서 싸우게 된다면 이번처럼은 넘어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시선을 돌리자 드넓은 수풀 너머로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구름보다도 높게 우뚝 솟아 있으며, 한눈에 담지 못할 정도로 상당한 규모의 위용에 둘리와 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분명 세계수라고 불렀던가.’
숲속 전체에는 엄청난 밀도의 마나가 퍼져 있었는데, 세계수에 가까워질수록 마나의 양은 점점 짙어져 갔다.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드래곤이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것도 전부 세계수의 덕이라고 한듯했다.
“저깟 나무가 뭐가 좋다고 그러는 거야.”
세계수의 풍경을 눈에 담고 있을 때쯤, 뒤에서부터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놈들이 신목이니 뭐니 해도 그래봤자, 베서 쓰면 땔감이잖아. 그게 뭐 대수야?”
눈을 부라리며 차갑게 뇌까리는 그 모습에 나는 확신했다.
드래곤과 아델, 세계수와 감옥과 관련해 거대한 연결 고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나는 아델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물음을 던졌다.
“아까 전에 감옥…. 아니, 그 의식장은 도대체 뭘 하기 위한 장소지?”
분명 드래곤들은 감옥이 아닌 의식장이라고 불렀으며, 아델더러 마녀라고 부르며 경멸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되새겨보면 단순한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전부 설명해줘야겠어.”
내 물음에 아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