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42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43층의 입성 전, 대기실입니다.〉
〈대기하십시오.〉
강렬한 섬광과 함께 눈을 뜨니, 새하얀 공간이 펼쳐졌다.
대기하라는 문구와 함께 편안한 기운이 온몸을 포근하게 감쌌다.
둘리는 어느새 양팔을 펼치고는 곯아떨어져 있었다.
당장 누가 업어 가더라도 눈치를 못 챌 만한 모습.
천하 태평한 모습에 무심코 조소를 흘렸다. 과연 탑에서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지, 둘리여서 가능한 거겠지.’
흔들어서 깨울까 싶었지만, 가만히 두기로 마음을 바꿨다.
저렇게 곯아떨어진 걸 보면 어지간히도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42층에서는 둘리의 도움이 없었다면 클리어조차 못 했을 것이다. 기왕 도움을 받았으니까 다음에 휴게 공간에 가면 둘리가 하고 싶다는 건 전부 하게 해줄까.
나는 손아귀를 쥐었다 피기를 반복하며 권능을 살폈다.
손바닥 안에서 보랏빛의 안개가 생성되었다. 이내 흩어져 사라졌다.
“돌아왔나 보네.”
[이터]의 권능도 돌아왔겠다. 별문제 없이 싸울 수 있다.
그러던 중, 시선을 돌리자 시스템창이 불쑥 떠올랐다.
〈42층의 보상이 지급됩니다.〉
〈단신으로 다수의 도플갱어를 쓰러뜨린 공적이 인정되어 최상급 보상이 지급됩니다.〉
연이어 떠오른 시스템창에 나는 주먹을 움켜쥐며 쾌재를 불렀다.
다른 것도 아닌 최상급 보상.
다른 일이면 몰라도 탑은 보상만큼은 철저하게 계산해서 지급한다.
탑에서 직접 단언한 최상급 보상이라면 금은보화가 있어도 비견이 안 될 정도의 보상임이 틀림없었다.
기대감이 잔뜩 부풀어 올랐을 즈음, 허공에서 황금빛 섬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오….”
누가 봐도 선명한 황금빛에 나는 두 눈을 빛냈다.
적어도 S급 이상의 아티팩트가 나타날 때만 나타나는 빛!
그것만으로도 감탄할 만한 일이었는데, 황금빛은 점점 짙어지기 시작하더니 오색빛으로 바뀌며 영롱한 힘을 자아냈다.
“서, 설마….”
앞에서 펼쳐진 광경에 나는 입을 떠억 벌렸다.
〈백룡의 흉갑(SS+)〉
- 수백 년 전에 죽은 드래곤로드의 근육을 엮어 만든 흉갑으로 어떠한 흉갑과 비교해도 비견할 수 없는 강함을 자랑합니다!
※ 주의! 봉인되어 있습니다.
.〈백룡 시리즈를 연속으로 발견하셨습니다. (4/5)〉
- 아티팩트 세트의 추가 효과가 발동합니다. (속성 저항력+500, 내구도+600, 체력+500…)
오색빛의 안개가 걷어지며 그 속에서 아티팩트가 나타났다.
아티팩트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주먹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나이스!”
백룡 시리즈 중 벌써 네 번째 아티팩트.
이는 상당한 가치였다.
서둘러 흉갑을 착용하자 이전에 비해 상당한 힘이 단전에서 끓어올랐다.
이걸로 네 번째, 마지막 하나만 더 손에 얻으면 백룡 시리즈를 완성할 수 있었다.
‘물론 봉인을 해제하려면 드래곤의 마나하트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거야 차차 찾아보면 된다.
탑에서 드래곤의 위용이라고 함은 신과 맞먹는 힘을 지닌 초월자.
그런 괴물을 어떻게 쓰러뜨릴지는 둘째치고, 어떻게 발견해낼지도 모를 일이다.
“일단 등반해보면 알겠지.”
나는 상념을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준비를 마쳤는지 다음 층으로 향한다는 시스템 창이 허공 위로 떠올랐다.
〈43층으로 이동합니다.〉
〈준비를 해주십시오.〉
이어진 문구에 나는 곯아떨어진 둘리를 안은 채, 상공을 바라봤다.
“그럼 가볼까.”
그 말을 끝으로 상공에서 강렬한 섬광이 떨어졌다.
* * *
〈43층입니다.〉
〈이번 층을 클리어하기 위한 조건은 생존입니다.〉
〈10일간 생존하십시오.〉
“윽…. 머리야.”
섬광이 가시고 43층에 도착한 직후, 나는 목덜미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43층에 떨어지는 와중에 뒤통수를 어디에다가 박기라도 한 모양인지, 두통과 함께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빛이 들어오지 않은 방에 떨어진 모양인지 주변은 깜깜한 암흑이었다.
“둘리야, 불 좀…. 어, 둘리야?”
둘리를 불렀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귀에 들리는 건 벽에 부딪혀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는 내 목소리뿐.
서둘러 기감을 넓혀 주변을 둘러봤으나 어디에서도 둘리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공기 중에 퍼져 있는 방대한 마나의 영향으로 기감을 살피려고 해도 영 신통찮았다.
어쩔 수 없이 포켓에서 빛의 정기를 꺼내 주변을 밝혔다.
“…여긴 도대체 뭐야.”
일대를 둘러본 나는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내가 도착한 장소는 감옥이었다.
사방에는 세밀한 철장으로 막혀 있었으며 고문 기구로 보이는 형체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당혹스러운데, 내가 놀란 이유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시부럴, 여긴 왜 이렇게 커.”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입을 쩍 벌렸다.
감옥의 규모도 규모지만, 천장부터 시작해 고문 기구, 쇠사슬까지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게 본래 형체의 수십 배에 달하는 크기였다.
이렇게 보니까. 미니어처라도 된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이걸 보고 동경심이나 모험심을 느낀다면 엿이나 먹으라지. 정체도 모르는 장소에 내 몸의 수십 배나 되어 보이는 규모의 물건들이 눈앞에서 나타난다면 그건 공포 영화나 다름없었다.
‘우선 여기에서 탈출해야겠지.’
비록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썩 좋은 예감은 들지 않았다.
쇠창살 앞에 다가가자 정전기가 파지직 일어나며 손톱이 부서졌다.
“일종의 마법인가 보네.”
상황을 지켜보며 인상을 구겼다.
비록 마법사가 아니라 복잡한 사정까지는 모르겠지만, 쇠창살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틀림없는 마나였다.
차라리 부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관두기로 했다.
쇠창살에 충격을 감지하는 마법이 걸려 있다면 낭패나 다름없었다. 어떠한 마법인 줄 모르는 지금으로선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야 했다.
“그래도 일단 나가긴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
쇠창살을 향해 손바닥을 뻗자, [이터]의 권능이 발동하며 보랏빛 안개가 일어났다.
보랏빛 안개는 용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쇠창살을 집어삼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앞을 가로막고 있던 창살이 사라졌지만, 다행히도 마법은 작동하지 않았다.
[이터]의 권능이 마법을 구성하는 핵을 잡아 삼켰기 때문에.
나는 감옥에서 유유히 탈출하며 시선을 돌렸다.
“끄응, 우선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야 할 거 같은데….”
얇은 침음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위치를 파악하고 싶어도 방대한 마나의 흐름으로 기감을 펼칠 수가 없었다. 기껏 해봤자 인근 500M가량일까.
‘시간은 걸리겠지만, 일일이 다녀볼 수밖에 없나.’
감옥의 구조와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현재로선 어쩔 수 없었다.
조급하게 생각할 건 없었다.
43층을 클리어하려면 10일간 생존해야 한다.
여기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찰나였다.
바로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서둘러 시선을 돌리자, 기껏 해봤자 허리춤에 다다를만한 신장과 양 갈래로 묶은 포니테일이 인상적인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어린애가 왜 여기에?’
아니, 그보다도 언제부터 서 있었던 거야?
이렇게까지 다가왔다면 알아차릴 법도 했을 텐데, 눈으로 먼저 확인하고 나서야 꼬마의 기감이 느껴졌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있을 때쯤.
꼬마는 총총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와 손을 뻗었다.
“사탕 먹고 싶어!”
“어… 어? 사탕?”
난데없는 요구에 옷을 뒤져보자, 둘리에게 주려고 남겨뒀던 막대 사탕이 손에 잡혔다.
막대 사탕을 건네자, 꼬마는 두 눈을 빛내며 사탕을 입에 넣었다.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꼬마를 훑어봤다.
‘전혀 몰랐어.’
아무리 기감이 약해져 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가까이 다가왔는데 모를 수가 있다는 건 이상했다.
혹시 몰라 꼬마를 훑어봤지만, 별다른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42층의 특전으로 임시 스킬: 친화도 상승(LV. MAX)이 발동합니다.〉
〈친화도: 30〉
그러던 도중, 소녀의 옆으로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시스템에서 가리키는 친화도의 수치는 30.
다른 케이스가 없어서 친화도가 나타내는 수치가 높은 건지 아니면 낮은 건지 확실하게는 모르겠다.
그래서 직접 질문을 던졌다.
“꼬마야, 넌 어디에서 왔니?”
“음… 원래는 비밀인데, 아저씨는 사탕 줬으니까 특별히 알려줄게. 난 저쪽에서 왔어!”
꼬마는 싱글벙글 웃으며 복도를 향해 손짓했다.
손짓한 방향을 훑어봤지만, 어두워서 그런지 자세히 보이진 않았다.
그러다 말고 꼬마에게서 기시감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둘리와 대화를 나눌 때와 같은 느낌인데, 역시 이 나이대의 애들은 정신연령이 엇비슷해서 그런가.
“하나만 더 물어보려고 하는데, 혹시 여기서 드래곤은 못 봤어?”
“드래곤? 음, 모르겠는걸.”
혹시나 싶었지만 짚이는 게 없는지 꼬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나는 명칭을 바꿨다.
“아니면 뚱뚱한 흑돼지는….”
“아아! 그 돼지 녀석 말이지. 봤어! 아까 전에 철장 안에서 쿨쿨 잠들어 있던데.”
항상 소녀가 둘리를 부를 때 쓰던 명칭을 사용하자 꼬마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그나저나 이런 상황에서도 자고 있다니 태평한 것도 정도가 있지.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을 덧붙였다.
“거기에 안내해줄 수 있을까.”
“음, 귀찮은데.”
“데려다주면 사탕 하나 더 줄 테니까. 어때?”
“꺄르륵, 좋아!”
막대 사탕을 건네며 꼬드기자, 꼬마는 두 눈을 빛내며 앞장섰다.
꼬마의 뒤를 따라가다 말고 나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은 어쩌고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야? 혼자야?”
“모르겠어, 눈을 뜨고 보니까. 여기였어.”
내 물음에 꼬마는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대답했다.
적어도 거짓을 고하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 대답에서 상황을 유추해보려고 하는데, 꼬마는 앞에서 빙그르르 돌더니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자, 도착했어. 여기야!”
꼬마가 손짓하며 부르자, 쇠창살 안에 누워있던 둘리의 모습이 보였다.
이쪽의 얼굴을 본 둘리는 활짝 웃으며 두 손으로 쇠창살을 붙잡으며 외쳤다.
“한별! 구해주러 왔구나!”
희망에 가득 찬 둘리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저도 잡혀서 왔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