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50화 (150/175)

제150화

이어진 대답에 나는 안색을 굳혔다.

거짓말이나 농담인가 싶었는데, 둘리를 보나 소녀를 보나 장난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 앞에 서 있는 놈은 소녀의 도플갱어라는 뜻.

다른 도플갱어의 몸은 전부 그림자로 덮여 있었는데, 소녀의 도플갱어는 명확한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다른 도플갱어와의 차별이 뭐지?

머릿속으로 여러 가정을 떠올려봤지만, 명확히 집히는 구석은 없었다.

‘음…. 역시 모르겠네.’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른 도플갱어도 모습을 드러낼 수 있지만, 굳이 모습을 안 드러냈을 가능성도 있었고.

혼란스럽긴 했으나 일단 도플갱어를 쓰러뜨리는 게 먼저다.

판단과 동시에 놈을 해치우기 위해 검을 들어 올리려는데, 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서둘러 몸을 뒤로 내뺌과 동시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백룡 시리즈의 세트 효과로 상태 이상을 극복합니다.〉

갑자기 떠오른 시스템창.

생각지도 못한 문구에 나는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상태 이상이라니?”

도플갱어가 무언가를 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는데?

다른 플레이어의 도플갱어도 아니고, 소녀의 도플갱어다.

그래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소녀의 움직임은 하나부터 열까지 관찰하고 있었다.

일이 터지고 나서 대처하면 그땐 늦었을 테니까.

하나 도플갱어가 무언가를 하는 기색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또, 마법을 사용함으로서 나타나는 마나의 기척도 없었다.

‘단순히 나만 못 느낀 건가?’

둘리라면 모를까 싶어서 슬쩍 확인해봤지만, 녀석 역시 의아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놈이 쓰는 수를 모른다고 해서 주저할 생각은 없었다.

해치우기 위해 정면 돌파를 하려는데, 소녀의 도플갱어는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췄다.

너무나도 짧은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대처할 틈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놓칠 순 없었다.

“둘리야!”

“찾았다! 한별, 바로 위층이다!”

곧바로 기척을 파악한 둘리가 손짓하며 외쳤다.

5층을 향해 앞장서는 둘리를 따라가려는데, 허공 위로 거추장스러운 느낌이 느껴졌다.

무엇인가 싶어 허공을 스윽 쓸자,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실이 눈에 밟혔다.

‘거미줄? 아니 실인가?’

끈적거리는 점도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거미줄은 아닌 듯싶었다.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주저할 틈은 없었다.

지금은 도플갱어를 쫓는 게 우선이다.

비상구를 통해 5층에 도착하자 새하얀 공동이 펼쳐졌다.

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곳곳에는 미사에 쓸 법한 각종 장식물과 멋들어진 석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영락없는…

‘신전이잖아?’

이전 층과는 달리 거리감이 느껴지는 풍경에 미간을 찌그러뜨렸다.

성신 카르텔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샘물과 비교하면 요사스러운 느낌이었다.

샘물의 주변에 가면 심신을 따스하게 북돋아 준다면 이 신전에서는 공포와 절망이 잔뜩 깃든 기분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갈 수밖에 없다.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즈음, 멀리서부터 익숙한 그림자가 보였다.

옆에서 앞장서던 둘리가 이쪽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결심한 둘리가 손톱을 바짝 세우며 인기척이 느껴지는 장소에 급습했다.

“항복해라!”

먼저 앞장선 둘리의 뒤에 따라붙자,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하, 한별 씨! 둘리!”

“유채아?”

우리가 급습한 곳에는 유채아가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꼼짝달싹도 못 한 채 공중에 띄워져 있었다.

슬쩍 확인해보니, 유채아의 손목에는 빛에 비쳐 반짝거리는 실이 보였다.

문제는 손목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목부터, 팔, 다리, 허리까지 유채아의 모든 신체 부위가 실에 포박되어 있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원인이 저건가?’

조금 전에도 본 기억이 있었다.

떠올릴 수 있는 원인이라면 소녀의 도플갱어가 벌인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편이 가장 가능성이 크겠지.

“한별 씨 구해주세요! 도플갱어의 흔적을 따라서 여기까지 왔는데 함정에…. 윽”

유채아는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온몸을 포박한 실이 점차 조이며 핏줄기가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보기보다 출혈량이 많은 모양인지 유채아의 안색은 희게 질려 있었다.

“제발… 구해주세요. 여기에서 탈출만 한다면 한별 씨와 같이 이번 층을 클리어하고 싶어요.”

유채아는 내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당장에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듯 애잔한 목소리.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마저 감정이 복받쳐오기를 것 같은 기분을 만들어냈다.

애절한 침묵 속에서 유채아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이윽고 유채아의 앞에 도달한 나는 검을 쥔 채,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리고 내 검은 유채아의 몸을 포박한 실이 아닌 가슴을 향해 내뻗었다. 촤아악!

검은 유채아의 몸을 꿰뚫은 채, 검신을 타고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하, 한별 씨 어째서…?”

순식간에 심장이 꿰뚫린 유채아는 이쪽을 바라보며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아니 그녀였던 자의 물음에 나는 차갑게 뇌까렸다.

“유채아는 너처럼 목숨을 구걸하지 않아.”

“…고작 그걸 이유라고?”

“고작이 아냐, 설사 함정에 빠졌다고 해도 위험이 도사릴지 모르는 곳에 우리를 끌어당길 리가 없잖아. 유채아를 나약하게 생각하고 흉내낸 네 불찰이지.”

나는 짤막하게 답했다.

탑에 들어온 직후, 튜토리얼을 겪을 때부터 유채아는 항상 그랬다.

위험한 곳이 있으면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약자를 이끌고, 그 위협을 배제했다. 만일 자신이 위협에 노출되었다고 해도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언젠가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혼자서 짊어지려고 한 이유를.

‘미련하게 당할 게 아니라 위험하면 도움을 청하면 되잖아. 왜 혼자서만 짊어지려고 하는 거야.’

‘한별 씨, 그건 미련한 게 아니에요. 만약에 저로 인해 다른 플레이어가 죄다 당해버리면 그땐 희망조차도 없는 거잖아요. 희망도 없는 세상 따윈 멸망해도 알 게 뭐예요.’

그런 말을 당당히 내뱉은 유채아의 행동이라기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다.

내 말이 끝나자, 심장에 검이 꿰뚫린 유채아는 미친 듯이 폭소하기 시작했다.

“푸하하핫, 어련하시겠어. 그렇게 믿는 와중에 미안한데 너흰 끝이야. 여기에서 전부 끝내는….”

콰득!

도플갱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말을 전부 잇기도 전에 내 검이 그녀의 머리를 박살 내렸기 때문에.

“뚫린 입이라고 막 지껄이면 안 되지.”

〈도플갱어를 격퇴하셨습니다.〉

〈남은 도플갱어의 숫자는 총 1인입니다.〉

이제 남은 도플갱어는 한 명뿐.

또 이러한 일을 저지를 법한 놈도 한 명밖에 없었다.

“거기에 숨어 있는 거 다 알아. 슬슬 나오지 그래?”

내 발언에 신전의 천장에서 소녀의 도플갱어가 내려왔다.

“어머, 이렇게 쉽게 들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글쎄.”

도플갱어의 발언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곁으로는 여유로운 척했으나 속으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 진짜로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어?’

미친 진짜라고?

솔직히 말해 심심해서 내뱉어 본 말인데, 본인이 등장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하, 한별 대단하다! 둘리도 몰랐던 건데 어떻게 알았나! 나도 그 비결을 알려줘라!”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곁에 있던 둘리는 두 눈을 반짝거렸다.

아니, 그렇게까지 반응할 필요는 없어 둘리야.

“호오…. 역시 권능이 없어도 엄청난 건가.”

둘리의 반응에 덩달아 도플갱어도 예리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였었나.

정작 본인은 이렇게까지 속일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사담은 집어치우고 이 실은 네가 저지른 짓거리지.”

“정답이야. 아저씨 감이 좋은데?”

주변에 흩뿌려진 실을 가리키며 묻자, 도플갱어는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지닌 히든 직업은 마리오네트, 보다시피 실을 이용해서 이것저것 할 수 있어.”

“적한테 그런 거까지 알려줘도 괜찮나 봐?”

“그야, 내 모습을 알아차릴 정도의 눈썰미라면 그것도 금방 알아차릴 건데 뭘 새삼스레.”

“…….”

의도치 않은 일이긴 했지만, 결과만 좋으면 된 거잖아. 안 그래?

도플갱어와는 나눌 대화도 딱히 없었기에 정면을 향해 검을 겨눴다.

그와 동시에 놈도 양손으로 실을 집어 당기자 천장에서 무수한 빛줄기가 그물처럼 얽혀서 떨어졌다.

빛에 반사되어 잘 보이진 않지만, 저 빛이 전부 실.

“어지간히도 촘촘하네.”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다.

둘리라면 몰라도 스탯이 부족한 내가 저 공격에 부딪힌다면 깍두기처럼 댕강 썰릴 것이라.

서둘러 투명팔찌를 발동하자, 몸의 실체가 사라지며 실이 지면을 썰었다.

지반이 붕괴하며 발을 디딜 곳이 없자, 때마침 나타난 둘리가 손을 내밀었다.

“한별 붙잡아라!”

“알겠어.”

둘리의 손을 붙잡고는 곧바로 상공으로 도약.

기둥 위에 착지하자, 방금 전의 일격으로 붕괴된 지반이 허공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자그마치 수만, 수십만 개의 돌덩이의 끝에는 실이 전부 연결되어 있었는데, 돌덩이는 나를 향해 쇄도해 들었다.

나는 서둘러 검을 가로그어 돌덩이에 연결된 실을 끊었다.

“어떻게 되어 먹은 힘이야.”

실은 상당한 절삭력으로 바위를 무처럼 썰 뿐만 아니라, 세세한 조정으로 무수히 많은 물질을 움직이고, 거기에 모자라 팔과 다리에 걸리며 움직임을 철저하게 봉쇄한다.

또, 실을 끊어도 또 다른 실이 부족한 자리를 대신한다.

상당한 범용성이었다.

지금까지 소녀가 이 능력을 사용하지 않은 게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나마 백룡 시리즈의 방어력이 있어서 망정이지.

그것도 없었다면 진즉에 쓰러졌을 것이다.

자잘한 공격은 갑옷이 막아준다고 해도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한 건 이쪽이다.

“윽….”

서둘러 투명팔찌를 발동해 일격을 피한 다음, 도플갱어를 향해 뛰어들었다.

3.5초.

투명팔찌가 해제함과 동시에 나는 도플갱어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나 도플갱어가 보인 것은 비릿한 웃음이었다.

내 검은 끝내 놈을 베지 못했다.

놈을 베는 것보다도 먼저 무수하게 엉킨 실이 내 몸을 묶어버렸기 때문에.

“또 그 힘을 쓰시나요. 하지만 소용없어요. 해제되면 제 눈에는 똑똑히 보이거든요.”

“아, 그래? 그것참 도움 되는 이야기네.”

도플갱어의 발언에 나는 미미한 웃음을 지었다.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실을 튕겨낸 직후, 투명팔찌의 쿨타임이 끝나자마자 다시 발동했다.

“소용없다고 말했….”

3.5초.

발동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내 실체가 나타나지 않자 도플갱어는 당혹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당연히 나타나리라 생각한 내 모습이 나타나지 않으니 당황할 수밖에.

한참이 지나 놈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나는 놈의 심장을 향해 검을 쑤셔 박았다.

“어, 어떻게….”

생명의 팔찌의 효과인 투명화를 해제하고 정면에 나서자 도플갱어는 눈을 부릅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검을 비틀어 가로로 크게 내찌르자, 검은색 피가 울컥 솟아 나왔다.

이걸로 놈은 끝이다.

나는 씩 웃으며 도플갱어에게 해답을 알려줬다.

“미안한데 싸움에는 절대라는 건 없어. 애송아.”

경험의 부재, 그게 바로 이 싸움의 승패를 가룬 결정타였다.

* * *

〈모든 도플갱어를 쓰러뜨리셨습니다.〉

〈43층으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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