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짤막한 내 대답에 싸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평소라면 긴장이라도 풀고자 농담이라도 내뱉을 둘리였겠지만, 녀석도 인지하고 있는 것이리라.
도플갱어가 녹록지만은 않다는 것을.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에 존재하는 도플갱어는 내 권능을 하나부터 열까지 복사한 복제품.
그런 존재가 약하다면 스스로 부정하는 이야기나 같은 셈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 정도는 해줘야지 싸울 맛이 나지.
“둘리야!”
“알겠다! 둘리만 믿어라!”
내가 연달아 신호를 주자, 둘리가 벌떡 일어나 흑염을 내뿜었다.
비록 성체는 아니라 브레스의 위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지만, 상대의 시선을 가리는 역할만 해도 충분했다.
다음은 내가 나설 차례!
도플갱어가 이터의 권능을 사용해 둘리의 브레스를 흡수한 사이.
나는 빈틈을 이용해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하나 도플갱어 역시 이쪽을 향해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움직임은 전부 따라잡히고 있다는 건가.’
내가 생각해도 아찔할 정도의 집착이었다.
곧바로 생명의 반지를 발동하자, 내 몸이 투명하게 바뀌며 허공에 동화되었다.
놈에게 움직임이 따라잡히고 있다면 모습을 감추면 될 뿐이다.
“후읍!”
방의 장식장을 즈려밟고는 놈의 견갑골을 향해 창을 찔러 박았다.
그대로 사선으로 내긋기 위해 양팔에 힘을 줬지만, 칼끝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창은 빠지지도 않았다.
그러는 사이, 도플갱어는 얼굴을 180도 돌렸다.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얼굴만 돌아간 그 모습은 공포스러운 분위기마저 유발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한 나는 창을 포기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때마침 대기하고 있던 둘리가 내 뒷덜미를 낚아채 방 한 켠으로 끌어당겼다.
-취이이익!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도플갱어의 손에 내 허벅지를 붙잡았다.
도플갱어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아릿한 고통이 다리에 덮쳤다.
‘악력만으로 다리를 절단해버릴 생각인가.’
아무리 내 도플갱어라지만 섬뜩한 발상에 치를 떨었다.
놈의 손에 붙잡힌 이상, 자력으로 떨쳐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억지라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투명 팔찌를 발동.
몸의 실체가 사라지며 내 다리를 붙잡고 있던 도플갱어의 손이 허공을 맴돌았다.
투명 팔찌의 효과가 유지되는 시간은 총 3.5초.
아주 짧은 간극이었지만,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투명 팔찌의 효과가 끝나자마자 도플갱어의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반격하기에도 말이지.”
나는 조용히 읊조리며 번개의 정기를 발동했다.
파찰음과 함께 사방으로 전격이 흩뿌려졌다.
효과가 있었는지 도플갱어를 괴로워하는 듯한 낌새를 보이며 정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터의 권능이 발동함과 동시에 뿜어져 나온 연보랏빛의 촉수가 전격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이걸로 놈을 쓰러뜨리라는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시간 끌기용.
전격의 빛에 파묻혀 배후에 도달한 나는 어둠의 정기를 놈의 몸에 가져다 댔다.
스스슥슥!
어둠의 정기에서 흘러나온 칠흑은 도플갱어의 몸을 잠식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놈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도플갱어를 격퇴하셨습니다.〉
〈남은 도플갱어의 숫자는 총 4인입니다.〉
연이어 떠오른 시스템창을 보고서 나는 침대에 주저앉았다.
“후, 힘들어 죽겠네.”
“으아, 한별 나도 마찬가지다!”
둘리도 힘들었던 모양인지 제자리에서 추욱 늘어졌다.
오래간만에 바짝 긴장을 해서 그런지,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도플갱어를 상대한 덕분에 호텔의 객실은 엉망이 된 채였지만, 나는 괘념치 않다는 듯 냉장고를 뒤져 물을 꺼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자, 둘리가 양손을 들며 외쳤다.
“한별, 나도 물! 물 마시고 싶다!”
“알겠어.”
둘리도 갈증이 난 모양인지 물병을 바라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물병을 건네자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물을 마셨다.
녀석을 뒤로한 채, 나는 손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도플갱어를 죽였다고 해서 권능이 돌아오거나 하진 않나 보네.’
물론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에 가볍게 넘기기로 했다.
실망한다고 해서 달라질 일은 없다.
어차피 다음 층에 가야지 권능을 되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안전하게 이번 층을 클리어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러려면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계획을 세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순간 둘리의 얼굴과 마주쳤다.
뭔가 묻고 싶은 거라도 있는 눈치.
아니나 다를까. 둘리는 활기찬 목소리로 물음을 건네왔다.
“한별 궁금한 게 있다!”
“뭔데?”
“아까 전에 한별하고 닮은 사람이 슈웅하고 사라졌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건가?”
“아아, 그거?”
나는 어둠의 정기를 손에 쥔 채 히죽 웃었다.
뭐가 궁금한가 싶었는데, 이게 궁금했었나.
“솔직히 말해서 그냥 해봤는데 되더라고.”
“그냥?”
“운 좋게 된 거지.”
일전에 탑을 등반하면서 어둠의 정기를 얻었을 당시, 꽤나 고생했던 기억이 있었다.
혹시라도 어둠의 정기를 사용하면 그때와 비슷한 효과로 놈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성공할 줄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결과만 좋으면 된 거지.
“아, 맞다. 둘리야. 그거 알아?”
“음? 뭔가?”
“내가 살던 세계에서 유명한 괴담인데, 도플갱어를 만난 사람은 죽는다고 하더라고. 그 도플갱어가 주인을 스윽 해버리고 나서 빈자리를 대신한다거나 뭐라나.”
“히익!”
일부러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말하자, 둘리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몸을 떨었다.
그 모습에 장난치고 싶은 생각이 급상승했다.
“나야 방금 막 도플갱어는 해치웠지만, 둘리 네 도플갱어가 있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너와 바꿔치기를….”
“으아아악! 그런 일 없을 거다! 한별 농담하지 마라. 둘리는 그런 괴담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허리에 양손을 올리며 덤덤하게 말하는 둘리였지만, 아무래도 자극이 된 모양인지 시꺼먼 안색이 되었다.
그 모습에 나는 옅은 웃음을 흘렸다.
“뭐 그거야 모르는 일이잖아.”
둘리의 반론에 적당히 웃으며 지레 넘겼다.
녀석의 반응이 재밌어서 한 번 해본 말이지. 정말로 둘리의 도플갱어가 나타나진 않을 것이다.
42층에서 해당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플레이어에 한정되어 있으니까.
물론 그 사실을 알 턱 없는 둘리는 벌벌 떨고 있지만, 조금 더 반응을 즐기다가 진실을 말해주기로 할까.
하여튼 시답잖은 잡담은 끝내고,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충분히 쉬었으니까. 슬슬 움직여볼까.’
이쪽은 도플갱어를 해치웠으나 다른 플레이어들은 어떤 상황에 닥쳤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상황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 * *
문을 열고 바깥에 나오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복도는 깔끔했다.
“둘리야 다른 사람들의 기척은?”
“음…. 적어도 여기에선 느껴지지 않는다.”
내 물음에 눈을 감고 집중하던 둘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 좀 더 위쪽은 시끌벅적한 거 같다!”
둘리의 대답에 시선을 위로 옮겼다.
혹시나 몰라 기감을 끌어올렸지만, 이전처럼 다른 사람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터의 권능이 사라진 지금으로선 둘리를 믿고 갈 수밖엔 없나.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위치는 2층.
‘우선 올라가 볼 수밖에 없나.’
다른 플레이어와 합류해 정보를 얻는 게 최우선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눈에 띄었지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비상계단을 이용했다.
4층에 도착하자 둘리의 말대로 소란이 느껴졌다.
“여기야?”
“맞는 거 같다! 아까 전에 한별하고 싸웠던 놈하고 똑같은 감각이 느껴진다.”
“인원은?”
“으으음…. 두 명, 아니 세 명인 거 같다!”
걱정할 건 없다.
내 도플갱어가 천외천이라 그렇지. 다른 플레이어의 도플갱어라면 둘리와 내가 지닌 아티팩트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문고리를 돌리고 나서던 그때.
화르륵!
뜨거운 화염구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이내 벽에 부딪혀 폭발했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위험할 뻔했다.
화염구에서 나온 불사르기에 맞은 둘리는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익살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우왓! 아뜨뜨 뜨겁다!”
화염구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스태프를 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으로 온몸이 그림자로 덮인 두 명의 도플갱어가 서 있었다.
소녀 역시 나를 목격했는지 반갑다는 듯이 양손을 흔들었다.
“어? 아저씨! 여기야 여기! 거기에 한 놈 가니까. 좀 부탁할게!”
뒤따른 말에 몸을 돌리니, 전사직으로 보이는 도플갱어가 두 눈을 빛내며 달려왔다.
내가 보기에도 상당한 괴력을 지닌 도플갱어.
“하여간 귀찮은 일이나 몰고 오긴.”
위협적이긴 매한가지였으나 내 도플갱어와 비교하면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한 끗 차이로 놈이 휘두른 도끼를 회피한 다음, 갑옷의 이음새 부위에 단검을 박았다.
그러고선 손가락을 튕기자, 단검이 배틀 엑스로 변하며 부피가 불어났다.
불어난 부피로 좌수가 폭발하듯 튕겨 나갔다.
한 찰나에 신체 일부를 잃은 도플갱어는 이쪽을 경계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이쪽을 경계해준다면 고마울 따름이다.
다른 쪽의 긴장감을 늦춘다는 뜻이니까.
“상대는 한별만이 아니다!”
통로의 반대에서 기다리고 있던 둘리가 브레스를 내뿜었다.
도플갱어의 몸은 흑염에 의해 불타 소멸했다.
〈도플갱어를 격퇴하셨습니다.〉
〈남은 도플갱어의 숫자는 총 2인입니다.〉
때마침 저쪽도 마무리된 모양인지, 도플갱어가 쓰러졌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저씨 괜찮아?”
고개를 돌리자, 소녀는 스태프를 갈무리하며 이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런 의심 없이 소녀에게 다가가려던 그때였다.
“한별! 기다려라!”
“둘리? 갑자기 왜 그래?”
갑작스러운 둘리의 난입에 나는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둘리가 이렇게까지 반응한 건 흔치 않았다.
“저건… 도플갱어다! 확실하다!”
“뭐라고?”
이어진 둘리의 발언에 나는 안색을 굳혔다.
그럴 리가 없는데?
지금까지 나타났던 도플갱어들은 전부 본체와는 달리 온몸이 그림자로 뒤덮여있었다.
그건 내 도플갱어나 방금 전에 쓰러뜨린 도플갱어들도 마찬가지.
하나 소녀의 신체는 정상적이었다.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둘리는 복도를 향해 브레스를 내뿜었다.
상당한 흑염이 복도 한 켠에 쏟아지며 메케한 연기가 흩날렸다. 모든 것을 앗아버릴 듯한 화력, 하나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예상외의 존재였다.
“쳇, 간단히 속여넘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들켰네?”
흑염을 뚫고 나타난 사람은 비릿한 미소를 지은 소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