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나는 벽과 주먹을 번갈아 보며 입을 쩌억 벌렸다.
분명 전력을 다해서 벽을 쳤다.
하나 벽에는 아무런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내 주먹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터의 권능이 없어진다는 게 스탯까지 전부 압수해간다고?’
미친, 무슨 개소리야.
현실을 인지하자 아찔함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일시적으로 이터의 권능이 소멸하면서 사라진 내 스탯은 고작 해봤자 3레벨 남짓일 것이다.
“그야 내가 3레벨이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머리 위에 떠 있는 레벨의 숫자를 확인했다.
다른 플레이어에 비해 필요 경험치 양이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3레벨을 달성하기까지 튜토리얼에서 999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다시 레벨업을 하기 위해선 그것과 동급. 아니, 그보다도 많은 시간이 소모될지도 몰랐다.
42층까지 등반하면서 얻은 경험치 양이라고 해봤자 전체의 1%에 불과했다.
일단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
“둘리야. 일어나.”
“으음, 한별… 여긴?”
“42층이야. 일단 바깥에서 누가 오는지 안 오는지 확인해줘.”
“알겠다!”
둘리는 눈가를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평한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계획을 세웠다.
비록 이터의 권능은 일시적으로 소멸했지만, 지금까지 탑을 등반하면서 얻은 경험이나 아티팩트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까지 손에 얻은 아티팩트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었다.
우선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부터 벗었다.
〈자이언트 종족의 반지(B+)〉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집안이 풍비박산 난 고대의 거인들이 고안해낸 반지다.〉
〈힘이 너무 넘쳐서 주체를 못 하는 당신! 그런 당신에게 적극 추천!〉
* 정력에도 적용되니 주의 바람!
‘이건 무용지물이겠지.’
힘을 주체하지 못하던 때면 몰라도 지금 상황에선 팔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끼우는 셈이었다.
반지를 포켓에 수납한 다음, 내가 지닌 아티팩트를 전부 꺼내 펼쳤다.
호신용이나 공격, 방어까지 폭넓게 사용할 수 있는 아티팩트들이 잔뜩 나왔다.
그 외에도 지닌 잡다한 아티팩트까지 합치면 이번 층을 대비하기에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름 할 만한 거 같은데.”
혹시 몰라서 악착같이 여러 아티팩트를 수집해놓은 보람이 있었다.
아티팩트를 정리하던 도중, 내 눈에 종이 한 장이 띄었다.
곁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묘한 힘이 느껴지는 기운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내가 이런 걸 갖고 있었던가?’
나는 종이를 훑어보며 기억을 뒤졌다.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이의 정체를 떠올렸다.
“아, 맞다. 뭔가 싶었는데 초대장이었네.”
탑을 등반하기 초기에 보상으로 획득한 물건이었다.
그 정체는 탑의 핵심 유력자를 포함해 마신이 한데 모이는 연회장으로 통하는 초대장.
당시에 연회는 3개월 뒤에 열린다고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을 테니, 슬슬 연회가 열릴 때가 됐는데….
‘대략 3주 정도 남았나.’
짧으면 짧고,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는 기간.
모든 원흉은 지구를 침략하고 멀쩡한 사람을 탑에 밀어 넣은 마신이다.
연회장에서 그놈만 죽이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갈지도 모르지. 어쩌면 탑을 100층까지 등반할 필요도 없이 마신을 해치우면 해결될지도 모르고.
그러기 위해선 지금보다도 강한 힘이 필요로 했다.
시스템의 제약마저 상쇄할 만한 압도적인 강함을 말이다.
“뭐, 그거야 차차 해결하면 되려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초대장을 포켓 안에 수납했다.
우선 이번 층을 클리어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천 리 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필요한 아티팩트를 정비하고 있을 찰나, 문 앞에 바짝 붙어 있던 둘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한별! 잠깐 와 봐야 할 것 같다!”
“무슨 일이지.”
마침 정비도 마쳤겠다.
나는 검에 손을 가져다 댄 채, 둘리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둘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좀 이상하다! 바깥에서 한별하고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
“나랑 같다고?”
“응. 그렇다! 하지만 묘하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둘리의 발언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이터의 권능이 사라지면서 이전처럼 기감을 느끼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상황을 살피기 위해 문을 열려고 하는데, 옆에 있던 둘리의 안색이 바뀌며 내 몸을 밀쳤다.
“한별 위험하다! 피해라!”
“윽….”
그대로 둘리와 나는 땅바닥을 뒹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비비며 일어서려고 할 때쯤, 문짝이 박살나며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난데없는 난입에 나는 둘리의 목덜미를 잡고는 창문을 향해 재떨이를 던졌다.
쨍그랑!
유리는 깨졌지만, 시스템의 제약으로 창밖으로 나가는 건 금지된 모양인지 재떨이는 반사되어 방 안을 뒹굴었다.
‘그렇다면 탈출로는 저놈이 들어온 문밖에 없나.’
나는 혀를 채며 인상을 찌그러뜨렸다.
난데없는 습격에 당황스러웠으나 그 이상으로 머릿속은 차가워졌다.
상대에게는 안타깝게 됐지만, 나한테는 강자로서 산 것보다도 약자로 산 세월이 더 길었다.
능력 하나둘쯤 뺏어간다고 해서 약자로서 생존해온 내 경험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선 상대의 능력부터 파악해야….”
상대의 무장을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나는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도 그럴 게.
“어라? 한별이 두 명이다?”
둘리의 말대로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내 얼굴과 똑 닮은 내가 있었기 때문에.
상대의 정체에 당황하고 있을 때쯤,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42층의 클리어 조건은 호텔에 존재하는 모든 도플갱어를 쓰러뜨리는 것입니다.〉
〈도플갱어는 히든 직업의 집약체입니다.〉
※ 호텔의 바깥으로는 나갈 수 없으니 주의 바랍니다.
뒤늦게 떠오른 시스템창에 나는 못마땅하다는 목소리를 툭 내뱉었다.
“기왕이면 일찍 일찍 알려줄 것이지.”
일이 터지고서 알려주면 무슨 소용이야.
여러모로 불만족스럽지만, 이렇게 불만을 내뱉어봤자 아무런 소용은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일이다.
벌어진 일이라면 최대한 빨리 수습하는 게 최선이었다.
“둘리야!”
“알고 있다!”
내 외침에 미리 준비하고 있던 둘리가 날카롭게 세운 손톱을 뻗었다.
어지간한 실력의 플레이어라면 못 알아차릴 만한 습격이었지만, 도플갱어는 한 치 차이로 회피한 다음 둘리의 배를 걷어찼다.
콰앙!
순식간에 벽에 부딪힌 둘리는 기침을 하며 숨을 거칠게 쉬었다.
다행히도 정신을 잃은 건 아닌 듯 보였다.
도플갱어의 움직임을 살펴보던 나는 안색을 굳혔다.
인정하기 싫지만, 방금 보인 그 움직임은 나와 매우 닮아있었다.
게다가 반응 속도 역시 나와 같다.
그걸 확인해보기 위해 나는 쥐고 있던 거미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방 안에 설치해둔 각종 총화기가 불을 뿜으며 도플갱어를 타격했다.
이전에 도박에서 플레이어들에게 받은 일회용 화기류.
놈에게 피해를 줄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아도 행동반경을 살피기에는 제격이었다.
“그럼 결과를 확인해볼까.”
나는 형형한 미소를 지으며 방 안을 가득 채운 연기를 걷어냈다.
그리고 이어진 결과를 보고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예상과는 달리 도플갱어의 몸에는 아무런 흠집도 없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도플갱어의 주변에는 총알의 흔적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터의 권능으로 전부 먹어 치운 건가.’
미친.
내가 봐도 말도 안 될 정도의 권능이었다.
막는 것으로도 모자라 총알을 제거해버리다니.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확신했다.
당장 도플갱어를 제거하는 건 무리라는 것을. 확실한 준비를 하고 찾아오는 게 맞았다.
서둘러 둘리의 목덜미를 붙잡은 다음, 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놈이 방심하고 있을 틈에 이대로 튈 생각이었지만, 그조차도 읽고 있었는지 도플갱어의 시선은 내 몸을 따라 향했다.
그러다가도 잠시, 자리에 멀쩡히 서 있던 도플갱어가 사라졌다.
“없어졌…. 윽!”
눈을 번쩍 뜨자마자 배에서 아릿한 격통이 찾아오며 몸이 붕 떠올랐다.
그대로 천장에 등을 부딪친 뒤,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 쪽이 먼저 부딪혔는지 두통이 지끈거림과 더불어 내장이 뒤틀리는 통증이 온몸을 뒤덮었다.
늑골이 아프긴 했지만, 다행히도 부서지거나 금이 생기진 않은 듯 보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신음 소리를 냈다.
3레벨의 신체 능력이라면 온몸의 뼈가 으스러져 즉사할 만한 충격이었으나 백룡 시리즈의 갑옷 덕분에 피해를 줄인듯했다.
‘그동안은 상처 입을 일이 없어서 S+급의 값어치인 줄은 몰랐는데, 정말로 효과가 있었네.’
나는 조소를 흘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물론 백룡 시리즈의 효과를 이렇게 증명하게 될 줄은 상상치도 못했지만 말이다.
한 번은 어찌어찌 막았으나 두 번은 무리다.
다음 공격에 정통했다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죽음의 칼날이 턱 끝까지 다가왔지만, 위기의식보다도 묘한 즐거움이 뇌리를 감돌았다.
“간만에 즐겁네.”
이렇게 죽음의 위기를 느껴본 게 언제쯤일까.
흔치 않은 경험이라 그런지 기억도 안 난다.
하나 이대로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 상대가 탑에서 만들어 낸 나의 도플갱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것만큼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탑의 계략에 넘어가는 꼴이니까.
“한별!”
슬쩍 시선을 돌리자, 미리 준비를 해둔 모양인지 둘리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였다면 여기에선 물러선 다음, 다른 기회를 노려 도플갱어를 제거해버릴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놈은 반드시 여기에서 처리해야 한다.
어차피 바깥으로 향하는 통로를 막고 있는 이상, 탈출을 감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기왕 할 거면 확실하게 해야지.
- 한별, 방법은?
결심한 순간, 둘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일종의 텔레파시이자 드래곤 전유물인 용언.
걱정스러운 둘리의 표정에 나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방법은 있어. 놈을 쓰러뜨릴 묘책이.”